ㅁ작가론 보고서/서지월시인론ㅁ
(경산대학교 국어국문과/윤미전)
[서지월 시인 설문 자료]
▣문단에 등단한 이후로 여섯 권의 시집을 출판하셨는데 많은 시 중에서 자신을 대
표하는 시와 또 개인적으로 아끼는 시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부분의 시인들은 답을 잘하지 않지요. 자기 시를 다 아껴달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내 시 중에 <가난한 꽃>이라는 향토 서정을 노래한 시가
내 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고 자화상이라 말할 수 있으며 더 욕심을 낸다면
개인적 지향을 가진 <한국의 달빛>이라는 시로 달밤에 아내가 잠자다 깬 아기를
업고 타관에 돈 벌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을 노래한 시인데 그 두 편 중
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나의 자화상과 같은 <가난한 꽃>이라 할 수 있습니
다.
▣두번째 시집 『강물과 빨랫줄』에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얼굴도 모르는 누
나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를 쓰다 보면 누구나 영향을 받게 되는데 나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미당께서
자신의 시 <국화 옆에서>를 두고 실제 누이가 있느냐는 얘기들을 했다고 합니
다. 실제 누이가 없어도 시에서는 가족사에 누이가 있는 것 처럼 등장하는 경우
도 있습니다. 전자나 후자의 경우처럼 시를 쓰는데는 어떤 형태든 상관은 없습니
다.
미당의 그 얘기를 듣다가 나도 내 가족에 얽힌 가족사를 찾아봤더니 실제 세 살
때 홍역을 앓다가 숨을 거둔 누나가 있었습니다. 비록 얼굴은 못 보고 자랐지만
내 마음엔 그 누나가 늘 함께 살고 있었지요.
▣시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시세계는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어떤 생각을 하고 시를 써 온 것은 아닙니다.
부드러운 사랑의 서정시와 향토적 서정시를 써 오면서 문학 활동을 통해 많은 사
람들과 문인들을 만나며 스스로 깨우침을 얻게 되고 한국을 넘어 중국 만주
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절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전공하는 영역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지가 뻗어
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인생의 개척이라면 나는 문학의 개척이라고 생각 합니
다.
내가 마지막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5천년 역사에서 시원이 되는 지금은 잃어버린
만주 땅이랄까요. 정치적, 역사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당장 회복할 수 없어도 우리
정신사에서는 우리의 것으로 노래하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세 번째 시집 『가난한 꽃』은 전체적 분위기가 미당의 시풍과 닿아 있다고 보이
는데 문단에서 미당과 인간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습작시절 나의 스승이신 박재삼 선생을 통해 미당을 뵙고자 했지만 만날 수 없었
습니다. 그러다 등장한 지 얼마되지 않아 서울의 전원출판사에서 초,중,고교 교사
로 재직 중인 시인 다섯 분(송수권,나태주,이성선,김강태 시인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분)을 선정하여 공동 시집 출판기념회가 있어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 미당께서도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하셨어요. 행사를 마치고 따라나가
인사 드렸더니 반갑게 웃으시며 “오 그래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언제 한번 우
리집에 와”미당은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이라 감히 만날 수 없었는데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서울 자택으로 찾아뵌 것이 인연의 계기가 되었어요.
언젠가 우리집 마당에서 익은 홍시를 갖다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분 마지막 시집
인 「80소년 떠돌이의 시」에 나를 모델로 한 <서지월이의 홍시>라는 시를 수록
해 놓으셨어요. 그분과의 인연은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참 각별했지요.
미당의 전성기 시절엔 “미당의 집 방엔 불 꺼지는 날이 없다”라는 말이 회자되
기도 했는데 5공화국이 끝나면서 그러한 것들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요. 그러나
미당이 돌아가실 때까지 미당과 관련된 일에 찾아가 보면 미당의 시제자는 안 나
타나도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는 꼭 보였어요. 미당을 끝까지 모신 이는 전국에서
이경철 기자와 나 둘이었죠. 많은 분들이 지금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시에 <빨랫줄>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 배경은 무엇입니까?
실질적으로 제 생가 마당에 빨랫줄이 걸쳐져 있었고요. 두 번째 시집 「강물과
빨랫줄」에 <집 보는 날>이라는 시가 있는데 ‘먼 산의 뻐꾸기는 빨랫줄에 와서
울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건 시가 아니라 사실은 시조입니다.
훗날 많은 시인들이 특히 시조시인들이 “그 문장이 좋다”라는 표현을 해 주셨
지요. 빨랫줄은 고향 정서이면서 어머니의 노고를 노래한 회상으로서 저에게는
기의 순환처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직장 없이 집에서」란 시에 어렵게 시만 쓰던 시절이 잘 그려지고 있는데 전업
시인이 되신 사유는 무엇이며 그 각오는 어떤 것입니까?
누구에게나 환경이란게 무척 중요하지요. 내가 경북 어느 학교에서 2년 동안 교
편을 잡았는데 1년가야 원고 청탁 몇 번 오지 않고 산골에 가 있으니 대구의 문
인들, 친구들과의 교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토요일 대구에 오면 오후 5
시가 넘고 이튿날 오후 1∼2시면 근무지로 돌아가야 하는 생활이 반복되어 이건
인간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에 환멸을 느꼈어요. ‘내가 문학을 하려면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돌아와 활동을 해 보니 그 전엔 원고
청탁이 1년에 2∼3번 오던 것이 20건이 넘게 들어 왔어요.
문단 활동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도움이 되는 거예요. 폐쇄적 삶이 싫어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는데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전업시인이 된 뒤 그 해가 1987년이었어요. 「우리시대 젊은 시인」이란 무크지
를 창간하여 대구 시내 서점에서 2위,1위를 몇 달간 기록하기도 했지요. 베스트셀
러가된 목록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전국의 시인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지요.
▣현대 시류에 맞지 않는 서정시를 지키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건 내 생리죠. 지렁이는 흙을 파 먹고 살 듯 내 성장과정이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시골에서 살았어요. 왜 사람들은 돌솥밥을 먹고 생수를 떠 먹으러 다니면서
정서는 우리 고유 정서를 밀치고 햄이나 치즈 정서를 좋아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분의 ‘밥은 우리의 영원한 정서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밥이 우리의 주
식이라면 시에 있어 우리의 주식은 서정시가 아니겠느냐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그 길로만 왔지요.
전세계 국제 정세가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가듯이 시도 이념이
붕괴되니 인간 근본의 정서로 돌아오고 있지요.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 스승이신 박재삼 시인과 평소 극찬을 아끼지 않는 미당 서정주 시인에게서
문학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시인의 시각에서 본 두 분의 시세계를
간단히 비교해 주십시오.
두 분의 공통적인 정서는 한(恨)이예요. 또는 한국 정서예요.
미당은 우리의 토속 정서에다가 역사 의식을 끌고 왔고 표현의 기법은 서구적 기
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상을 연 분이지요.
그러나 미당의 수제자 되는 박재삼 선생은 스승인 미당의 기법과 전혀 닮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냈어요. 소재만 바뀐게 아니고 어휘의 활용이 전
혀 달라요. 「춘향이 마음」이란 첫 시집이 나와 굉장한 찬사와 함께 5월 문예상
을 받았지요. 신인으로서 문단의 극찬을 받는 건 드문 일이예요.
이런 점은 시를 공부하는 모두가 배울 점이죠.
▣습작 시절 시공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러가지 길이 있겠지만 내가 습작시절엔 유치환,한용운,김소월,윤동주,김영랑 등
유명시인의 명시만 계속 읽고 내 시를 쓰니 시가 물렁물렁하고 단단하지를 않았
어요. 고민을 하다가 여러 당선작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명시들과는 달라
요. 명시는 살 붙이기이고 당선작은 뼈대 세우기더라구요. 그런 내 체험을 종합하
여 어디서 강의를 하게 되면 ‘뼈대 세우기에 살 붙이기’를 하란 말을 자주 하
지요. 좋은 시인이 되려면 미술 시간에 철사로 뼈대를 튼튼하게 만들어 놓고 진
흙을 붙여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듯 시도 뼈대 세우기를 한 후에 살 붙이기를
해야 좋은 시가 되는 겁니다.
▣최근 출판된 시집『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에는 <내 나이 마흔 넷의 시>
라는 부제로 여러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실제 마흔 넷의 나이와 특별한 연관이
있습니까?
특별한 뜻은 없지만 나이 마흔 넷이 되니 쓸쓸한 삶이 떠 오르더군요.
그래서 여덟 편의 시에 마흔 넷을 붙였어요. 아쉬운 것은 마흔 넷에 대한 시를
시집 한 권의 분량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다른 일들로 바빠 그 해를 넘겨버려 기
회를 놓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중단해 버렸어요.
▣2002년에는 중국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중국 내의 정상급 시인들과 활발
하게 교류하고 계신걸로 아는데 앞으로 국내를 벗어난 문학 활동에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윤학 시인이 언젠가 전화를 해와 중국 연길에서
유명한 여류 소설가가 천지 문학상을 수상 했는데 그 소설이 한국 KBS TV에서
드라마로 나왔대요. 그런 연유로 그 소설가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문학과 창
작’이란 문예지와 인텨뷰를 하는 과정에서 “만주에서 가장 알려진 한국 시인이
누구냐 ”는 질문에 “한국의 서지월 시인이 그쪽에서 가장 알려져 있고 그의 시
가 선호되고 있다”고 했다더군요.
그 일은 내가 장백산 문학상을 받기 훨씬 전이었고 만주 땅을 밟기 전의 얘기예
요. 세월이 지나 세 번째 만주 땅을 밟던 날 밤 11시가 되어 눈이 펑펑 내리는
눈길을 헤치고 장백산 잡지사 주간을 만나 내 개인 시집과 <우리시대 젊은 시인
> 무크집을 드렸는데 이튿날 아침 일찍 식사를 같이 하자고 찾아와선 “밤새 책
두 권을 다 읽어 봤는데 놀랄만하네요. 우리 장백산에서 내년도 수상자로 서지월
선생님을 추천할까 합니다” 그 분과 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내 정서와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길 예술대학 강당에서 있은 【정지용 문학제】에 참석해 보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들 한복을 입고 나왔고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나는 가무가 내 시의 정
서와 100% 일치함을 느꼈습니다. 이렇듯 장백산 문학상 수상과 내 시의 세계는
5천년 역사의 정신과 깊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죠.
[서지월 論 /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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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서론
2. 본론
1)작품의 해석 비교
2)작품 세계 조명
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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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서구 문물의 급속한 도입과 빠른 물살처럼 급변하는 시대적 조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 한길을 걸어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지월 시인. 그는 동행 없는 외로운 오솔길을 갈지나 스스로 탄탄대로를 만들며
뚜벅뚜벅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한학을 하신 아버지 逸溪 徐賢奎의 6남으로 1955년 5월 단오날 달성군 가창면 대
일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徐錫幸이며 가창초등학교 6년동안 늘 전교 수석을 차지
하여 神童으로 불리어졌으며 사생대회에서도 당시 최고상인 특선을 6년간 휩쓸어
달성군내 어린 예술가로 인정 받았다.
중 1때 MBC라디오 「전설따라 삼천리」에 <정몽주 태몽설>이 채택되어 방송된 것이 처음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1971년 「소년중앙일보」에 동시 <초록빛 잎새>가 발표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로
첫 지면발표의 계기가 되었다.
형의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3년 가까이 별 하는 일
없이 어려움을 겪다 군 입대 후 강원도 최전방에서 3년의 군대 생활을 무사히 마치
고 돌아와서는 늦깎이 대학 입학의 꿈을 실현했다.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대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경북 의성군 다인중학교 및
봉화군 춘양종합고등학교에서 2년여 교편 생활을 했다.
교직에 있는 동안 1985년 제2회 「전국 교원학예술상」 공모에 시 <꽃잎이여>로 문
예부문 대상에 당선되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5년 『심상』신인상에 <겨울 신호등>외 3편(심사. 박재삼,황금찬)과 1986년
『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시 <조선의 눈발>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심사.박
재삼,김봉건)하였다.
1986년 『아동문예』신인문학상에 동시 <바람에 귀 대이면>외 4편이 당선되었다.
1988년 제1회 「한하운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유교적 전통관을 중시한 가풍은 서지월 시인의 성장 과정에 중요하게 작용하였
다. 1980년대 등단한 시인으로서 자칫 민중시인으로 뿌리내리기 쉬웠을터임에도 오
로지 전통 서정시를 고수하고 있음은 漢詩를 즐겨 쓰시며 한국적 인상이 강했던 아
버지가 바탕이 되었다.
오세영 시인(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박태상(한국방송대 국문과교수) 문학평론가
는 '서지월 시인은 권력과 금권과 물질에 오염된 우리 시대의 아픔을 고발하고 이
를 초극하는 한 방법으로 전통적인 우리의 삶을 제시했던 것'이며, '서지월다운 질
그릇의 투박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지닌 서정시를 쓰면서 우리의 민족 숨결과 끊임
없는 조국사랑에 대한 숭고한 마음을 현재에 되살리겠다는 그러한 확고한 인식, 미
래에 대한 낙관주의, 바로 그것이 서지월 시인이 가진 내적인 힘'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고은 시인은 '서지월 시인은 장작불이다. 금방 활활 타올라 사그라지는 불
이 아니라 뼈를 고을 때 오래 타오르는 그런 장작불을 말함이다. 그만큼 한국 시단
에 귀한 존재다. 또는 지속적으로 뜨뜻함을 더해가는 느긋한 구둘돌이다. 서지월
시인은 우리 시대의 뜨듯함을 일깨워주는 만만찮은 저력을 던져주고 있다'고 평했
다.1)
2.본론
1)작품의해석 비교
●두번째 시집 「강물과 빨랫줄」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얼굴도 모르는
누나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서술자>
비록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나지만 혈육의 정인데 무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형제의 막내로써 한 분 누님에 대한 그리움은 특별한 것이었으리라. 가끔
씩 꺼내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존재이면서 서정 시인의 정신적 위안처가 되었
을 것이다.
<시인>
시를 쓰다 보면 누구나 영향을 받게 되는데 나도 그런 경우가 있다. 미당이
말하길 자신의 시 <국화 옆에서>를 두고 실제 누이가 있느냐는 얘기들을 했다고 한
다. 실제 누이가 없어도 시에서는 가족사에 누이가 있는 것처럼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나 후자의 경우처럼 시를 쓰는데는 어떤 형태도 상관은 없다.
내게도 실제 세 살 때 홍역을 앓다가 숨을 거둔 누나가 있었는데 비록 얼굴도 못
보고 자랐지만 내 마음엔 그 누나가 늘 함께 살고 있다.
●초창기 시에는 <빨랫줄>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
<서술자>
'빨랫줄'은 시인의 고달픈 행로가 잘 농축된 표현이라 생각한다. 직장도 없이
시만 쓰며 빈 집을 지키는 시인이나 웬종일 햇볕의 굴러가는 모습만 우두커니 지켜
보고 있는 외줄기 빈 빨랫줄이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까
<시인>
'빨랫줄'은 고향 정서이면서 어머니의 노고를 노래한 회상으로서 내겐 기의
순환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집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에는 <내 나이 마흔 넷의 시>라는 여덟
편의 연작시가 실려 있는데 실제 나이 마흔 넷과의 관계?
<서술자>
불혹으로 접어들면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마련이다. 먼 길
을 가야 할 나그네가 잠시 물 한 사발 들이키며 갈증을 풀 듯 생을 다시 추스리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시인>
특별한 뜻은 없지만 나이 마흔 넷이 되니 쓸쓸한 삶이 떠올랐다. 그래서 여덟
편의 시에 마흔 넷을 붙인 것이다.
2) 작품세계 조명
서지월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일단 그 양면성 내지 포괄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무릉도원> <바늘점> <신천을 바라보며> <당산 잿마루> <秋夕賦> <先山> <朝
鮮의 눈발> <한국의 달빛> <玉구슬> 등 여러 작품들은 그 제목이나 택해진 제재들
이 거의 우리 고유한 쪽의 것 또는 토속적인 쪽에 속하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씨와 가락에는 우리 사회를 오래 지배해온 순응 조화 감성이 여기 저기에 배
어 있다.2)
하이네도 좋고 릴케도 좋고
바이런도 좋고 구르몽도 좋지만
우리의 산에서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우리와 같이 눈물 흘리며 핍박 받아오던 시대의
오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붉은 목젓이 되어 헝클어진 진달래꽃 다발 안고
북녘 어느 소년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는가
흰옷 입고 자라고 흰 창호지빛 문틈으로 세상 엿듣고
동여맨 흰 수건 튼튼한 쇠가죽 북 울리며
예까지 흘러왔건만...중략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부분.
시인은 시의 첫 머리에서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될 세계는 하이에나 릴케와 같은
서구적인 서구적인 세계에 있지 않고 소월의 산새와 같은 세계에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다시 9행에서 <흰 옷 입고 자라고 창호지빛 문틈으로 세상 엿듣고> 사는 삶
을 동경하는 이 시인의 마음가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왜냐하면 <흰색>이란 우리
고유의 전통을 상징하는 색이고 소월의 산새 역시 전통적인 본연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꿈꾸는 순결한 삶이 고유의 전통적
인 삶이라는 사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그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지만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권력과 금권과 물질에 오염된 우리 시대의 아픔을 고
발하고 이를 초극하는 한 방법으로 전통적인 우리의 삶을 제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라는 질문은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시
대 대부분의 사람에게 본연의 인간다운 삶을 성찰시키는 외침이라 할 수 있다.3)
서지월의 시들이 너무도 순수 투명하고 유행성마저 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오늘날 독자적인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저간의 기승을 부리고 있는 포
스터모더니즘의 시, 키취세대의 도회지적 감수성, 팝아트 양식의 시 등이 부정적으
로 기여하고 있는 다국적 정서의 함량에 대한 탈근대적 대안의 하나로 인증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 중에서 「나는 마차를
끌고 싶다」(현대시학,1990.11)
결국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뒷짐진 시대와 겨울에 핀 개나리꽃 숨찬
터널 빠져나와
어디에도 볕은 들지 않고 어디에도 따뜻한 불꽃은
뵈지 않는다
앞서 끄는 마부와
굴러가는 마차의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덕지덕지 내리는 눈발은
하늘로 내리지 않고 우리들
따슨 이마로 내린다
식어져서 맛없는 보리밥이여
식어져서 싸늘한 불꽃이여
누가 우리를 태우지 못하는가
성냥개비처럼 검게 타 목없는 귀신 될지라도
이 강산 재로 남아 이 강산 재 되려니
누가 바람을 바람 불게 못하시고
바다가 밀물을 강으로 쳐올리지 못하는가
하나씩의 물결마다 하나씩의 날개가 돋는 바다
오오래 멍든 하늘과
오지 않는 새와 희망을 위하여
뭍으로 뭍으로 향한 그리움처럼 나는
馬車를 끌고 싶다
-「馬車를 끌고 싶다」 부분.
만약 그가 퇴영적인 과거에 머물고 만다면 약속없는 세대가 그려내고 있는 살풍
경한 불신의 세계관과 대차 없으리라. 그러나 그가 현실 세계에 다소 신뢰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 시대의 보다 따뜻하고 믿음직한 미래로
향한 마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4)
마치 詩經을 읽고 있듯이 전아하고 단아한 민요시풍에 이만한 생각을 앉힐 수 있
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이만큼 투영시켜 민족어(향토어)의 혼발림과
춤사위(가락)을 탈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서정적 재질이 뛰어난 시인이며 이
시대의 희귀한 존재 가치를 지닌 시인인가를 단번에 알 수 있게 한다.5)
미당이 진정한 仙風에 닿아있는 이 땅의 시인을 꼽는데 그 한 시인으로 서지월
시인을 꼽고 있는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6)
이제 서지월 시인의 시세계가 어디로 가야하고 그의 자리매김이 무엇인가가 거의
밝혀진 셈이다. 무엇보다 그의 자리매김은 전통서정 즉 토속정서가 단절된 90년대
에서 그는 마지막 세대에 위치한 마지막 시인이란 점이다.마지막 서정시인으로 자
리매김 되는 그의 몫은 소월로 출발한 서정시가 서지월 시인에 와서 종착역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7)
왜 꽃은 지면서 끝내
저들끼리 말하고
저들끼리 상여 매고 훌훌 떠나는가?
-「꽃은 왜 피나?」 부분.
시인이 '꽃들이 저들끼리 말하고 저들끼리 상여 매고 훌훌 떠난다'고 인식 했다
면 그것은 고독과 고립에 처한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싶
어하는 시인의 존재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8)
3.결론
이상으로 서지월 시인의 작품을 두고 서술자적 입장과 시인의 입장에서의 해석을
서로 비교해 보고 시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 보았다.
앞에서도 언급됐듯이 마지막 서정시인으로 자리매김 되는 시인답게 그는 고독한
외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갈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선뜻 들어서길 주저하는
오솔길로 소신을 가지고 묵묵히 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
움을 느끼게 한다. 서지월 시인이 그러하다. 희귀한 존재 가치를 지닌 시인의 오늘
이 있기까지 얼마나 멀고도 가파른 길을 걸어 왔을지 짐작해 볼 뿐이다.
<詩碑이야기>에서도 밝혔듯 조지훈 시인의 '지초 芝'字와 김소월 시인의 '달月'字
로 만든 芝月, 徐芝月이란 필명이 文壇史에 영원하길 희망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
다.
⊙참고자료
1)「낭만시」제6집,대일,P130
2)강물과 빨랫줄,문학사상사,P139
3)현대문학,1991.4
4)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시와시학사,P117
5)가난한 꽃,전망,P150
6)가난한 꽃,전망,P152
7)가난한 꽃,전망,P158
8)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천년의시작,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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