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남일보·연재/[영남일보]기획연재-만주이야기

[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10>길림성 왕청 백초구 만천성 웅녀상 ♪..♬

아미산월 2010. 5. 14. 10:45

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10>길림성 왕청 백초구 만천성 웅녀상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10] 길림성 왕청 백초구 만천성 웅녀상

 

중국 3대 음악가 정율성은 '한국인' 이었다
중국 國歌 만큼 유명한 '팔로군 행진곡' 작곡
광주서 태어나 19살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루쉰과 함께'신중국 영웅 100인'에 뽑히기도

 

ㅡ'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된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말한다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 악보. (출처:바이두 백과사전)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 악보. (출처:바이두 백과사전)
중국의 대표 군가를 작곡하던 한창 시절의 정율성
중국의 대표 군가를 작곡하던 한창 시절의 정율성
광주 히딩크호텔 앞마당에 세워진 정율성 탄생 기념비.
광주 히딩크호텔 앞마당에 세워진 정율성 탄생 기념비.
광주 정율성 생가 우물 앞에 선 필자.
광주 정율성 생가 우물 앞에 선 필자.

◇중국인민해방군가 작곡가 정율성

정율성은 누구인가.

한국인 보다 중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의 작곡가다.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200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도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로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올랐다.

1990년 9월 22일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힘찬 연주로 시작됐는데 300만 중국군이 아침저녁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어김없이 연주되는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인 것이다. 이 곡은 중국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된다고 한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했을 때 북한이 연주한 것도 정율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가(조선의용군 행진곡)>이었으며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군악대가 연주했던 곡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인 첫 만남에 울려퍼진 곡도 모두 정율성의 곡이었다는 사실은 중국과 북한에서 그의 음악적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일제식민지 치하 중국과 한국은 동질의 선상에서 일본국에 의해 지배당한 나라이다. 이런 치욕이 만주제국이라는 이름을 낳게 했으며 만주땅 뿐만 아니라 상해나 중경 북경 등지에 일제치하 항일독립운동 근거지가 된 것도 그런 연유이리다.  

중국이 몸서리쳐지게 일제압박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몸서리쳐지게 식민지가 되어 헤어날 길 없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대륙과 만주땅 일대에서 열렬히 독립 운동을 펼쳤고 보면 한민족독립운동사의 대부분도 중국땅에 존재한 것이며 지금도 기념하는 행사가 중국에서 열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해의 임시정부와 안중근의사가 순직한 뤼순 등이다.

우리가 오늘에 와서 정율성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가 한국에서 태어난 즉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유능한 인재는 조국땅에서 조국의 이름으로 빛을 발하면 더없이 영광스런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건 개인의 운명을 역사가 만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선생이 중국 당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친 일이나 정율성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름을 떨친 일은 우리민족의 긍지로 해석되어도 좋지 않을가 싶다.


2009년, 10월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었다.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국경절이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한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을 선정 후세에 기리도록 했는데 여기에 중국의 대문호 루쉰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선인이 포함돼 있으니 그가 바로 정율성이라는 사실이다.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가 낳은 중국 최고의 혁명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본명이 정부은으로 19세때인 1933년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항일투쟁간부양성소인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조선혁명당원으로서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중 상해에서 레닌그라드 음대교수 출신인 저명한 음악가 크리노와를 만나게 된다.  이름을 ‘부은’에서 ‘율성’으로 개명한 것도 이 때로. 약 2년간 크리노와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자연스레 정율성의 마음속엔 혁명음악의 꿈이 무르익게 됐던 것이다.

1936년, 정율성은 김산 등이 결성한 한중연합전선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추구하던 공산주의 계열단체인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과거 몸담았던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장개석 등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면,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중국공산당과 동지적 관계였다.

1937년 그는 바이올린 하나를 둘러메고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향했다. 연안에 당도한 정율성은 곧 루쉰문예학원에 입학해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졸업 후 이 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그는 중국인의 아리랑이라 일컫는 <연안송>과 오늘날의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리워지고 있는 <팔로군행진곡> 등 대작들을 쏟아낸 것이다. 특히 <팔로군행진곡>은 중국대륙 전역으로 퍼져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군과 맞서 팔로군에게 결사항전의 신념을 고취시켜주었던 것이다. 1949년 동북과 화북지역에서 국민당 군대를 연파한 인민해방군은 북경의 자금성으로 행진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조국의 대지 위에 / 민족의 희망을 안은 / 우리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 / 우리는 싸움의 전위 / 우리는 민중의 무장 / 두려움 없이 굴함 없이 영용하게 싸워 /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자 /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아, 나팔소리 울린다. /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 」

ㅡ 공목 작사, 정율성 작곡 <팔로군행진곡>

이 <팔로군행진곡>은 정율성이 1937년경 연안시절 섬북공학 학생때 구상하여 항일군정 대학시절인 22세 때 완성된 작품으로 정율성 작품 가운데 단연 씩씩하고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지는 대표적인 행진곡이다. 또한「보탑산 산봉 우에 노을 불타고 / 연하강 물결 우에 달빛 흐르네 /  ..... / 아, 연안! / 장엄하고 웅위로운 도시 / 정열에 끓어 넘치누나」 로 부르는 <연안송>은 1938년 노신예술학부 학생시절에 작곡하여 혁명성지인 연안에 대한 중국인들의 동경과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의 아리랑처럼 중국인에게 애창되었던 중국 최초의 서정송가로 알려져 있다. 정율성 자신이 소프라노 당영매와 함께 만도린을 타면서 직접 불러 당시 모택동이 격찬을 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천안문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며 인민해방군을 상징하는 군가로 울려퍼지게 된 것이다.

중국공산당 혁명에 참가하며 조국의 해방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그는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해방을 맞는데 해방 후 고향인 남한을 택하지 않고 북한을 택했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가로 조국과 단절된 시간이 워낙 길었던 게 그 이유일 것이다.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의 단장이 되어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해 그것이 북한 인민군의 공식군가가 되었으나 연안파라는 낙인이 찍혀 6.25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소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던 주은래의 호의로 가족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 군가에서 탈피 노동자의 생활상 노래도 작곡

6.25 한국전쟁의 현실을 등 뒤로 하고 북한에서 다시 중국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정율성은 '생활속에는 투쟁만 있고 붉은 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유쾌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조국산천도 노래하여야 한다'고 음악가로서의 마음을 다지곤 했는데, 1952 년 그는 눈 덮힌 만주땅 북녁 흥안령의 생활상을 통해 '벌목가'와 '흥안령에 눈 내리네'를 작곡했다. 흰 눈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벌목노동자들과 둘러 앉아 '노동 속에서 산출된 음악이진정한 민간의 음악'이라 하며 그들과 어울리며 향기로운 술에 취한 듯 즐거워하곤 했다며 중국인 아내 정설송이 정율성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회고한 대목이다.

하지만 반우파투쟁과 1960년대 모택동의 친위쿠데타라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 등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정치적인 광풍에 휩싸이면서 평생 존경했던 주은래가 1976년 봄 사망하고 몇 달 뒤 모택동마저 사망하자 10여년간 철저한 감시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1976년 복권 되었으나 그해 12월 고혈압으로 이역땅 중국에서 숨을 거둔다. 중국 국립묘지인 ‘팔보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정율성의 비문에는 '인민은 영원하며, 율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고 새겨져 있다. 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빛나는 위업은 또한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빚은 결실이기도 하다.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중국의 3대 음악가(섭이, 선성해, 정율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그는 무려 360여 곡이 넘는 많은 노래를 남겼는데 중국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가 불리워지고 있다.

◇ 광주에 이는 정율성 신드롬 

1992년 한국과 중국 수교 이후 정율성 대한 일부가 기사로 다뤄졌지만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고 말았는데 반공이데올로기에 묻혀진 그의 역사를 이젠 되찾아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넘어 민족이라는 이름아래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남 광주에서는 2004년부터 '음악가 정율성기념 국제학술대회'와 2005년부터는 ‘광주 정율성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광주의 정율성 생가를  2년간 7000여명 가량의 중국인 관광객이 방문차 광주를 찾았다고 한다. 정율성이 사망한 지 3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중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여전하여 하얼빈에서 ‘정율성 평생사적관’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2년에는 정율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양을 향해 달린다(원제 走向太陽·주향태양)>도 나왔다. 샤(關峽) 중국교향악단 단장은 정율성에 대해 '그는 중국·북한·한국 3개국 국민들의 공통된 심성을 반영한 음악가이며 동시에 3개국 국민들로부터 동시에 기념되는 인물'이라며 이는 작곡가 중 거세무쌍(擧世無雙·세상을 통틀어 대적할 상대가 없다)한 것이라고 했다 한다.

중국 문화부장과 함께 8번이나 내한한 정율성의 외동딸 딩샤오디(丁小提·63)여사는 '아버지와 관련해 많은 기억이 있다'며 '성품을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낙관적이고 마음이 넓으셨고 항상 천진난만하게 소년처럼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또 '아버지에 대한 중국의 예우는 각별하다'고 강조했으며, '이미 중국에서는 아버지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7번 정도 열렸는데 공연을 관람한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딩샤오디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바로크합창단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0년과 2007년 1,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을 찾아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할 때도 정율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는데 중국의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軍歌)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아마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정율성의 고향 광주에서는 정율성의 생가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남구 양림동 79번지이냐 히딩크호텔 터인 동구 불로동 163번지이냐는 것이다. 광주 남구청에서는 양림동 79번지 도로 이름을 ‘정율성로’로 바꾸고 남광주 청년회의소 측에서는 정율성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는가 하면 동구 불로동 163번지 히딩크호텔 앞마당에는 기념비와 우물 등을 복원해 놓았다.  ◆전남 광주 히딩크호텔 앞마당에서 한국 서지월시인과 중국 조선족 김승종시인과 함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