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9>백두산 아래 첫동네 장백현 풍정 ♪.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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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플러' 두른 아이들 보며 끝내 눈물이…'김일성 찬양' 교사 보고는 어안이 벙벙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학교 아이들
같은 동족 한 핏줄인데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나라의 사상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하니…애통하고 통곡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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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보 전투승리기념탑
장백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장백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장백이라면 백두산 바로 아래 첫동네로 불리우는 곳으로 조선족들이 집단으로 사는 조선족자치현인데 북한의 혜산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강폭이 아주 좁아 너비가 불과 20여 미터 밖에 안 되는 시골의 개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북한땅과 아주 인접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와 삼수군 김정숙군 김형직군과 마주하는 변경 지역이자 길림성 남부 조선족 집거지역의 문화중심지이기도 하다.
발해시대에 세워진 영광탑이 있는 탑산(塔山)에 오르면 압록강 건너 북한의 혜산의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이 첫눈에 들어온다. 1936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단(사단장 김일성)의 장병 200여명이 한밤에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 삼림수비대를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죽이고 소총 몇 자루를 노획한 전과에 불과했지만 중국 동북지방에서 치러졌던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와 달리 조국의 산하에서 수행된 최초의 항일무장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전투때 희생된 부대원 이경희는 운명하기 바로 직전 “여기가 조국의 땅이라지요? 이렇게나마 조국 땅을 밟아보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네요. 모두들 내몫까지 잘 싸워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한다. 당시 일본의 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된 보천보전투로 청년 김일성은 재만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해 결국 북한의 영도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 보천보전투는 북한의 건국 서사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이 항일연군들을 때려잡던 일본사관학교 출신의 만주 주둔 관동군 장교 박정희는 후일 남한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전한다.
송강하에서 오전 9시 40분에 출발하여 장백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 50분이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제2실험소학'이었다. 이 소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시 소설 평론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는 황영성씨와의 만남은 동행한 내 친구 소설가 박명호와 사전연락이 닿아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제2실험소학'이란 조선족학교라는 뜻이며'제1실험소학'은 중국한족소학교로 나중에 황영성씨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다. 특히 장백현은 조선족자치현이기에 조선어를 위에 쓰고 중국어를 아래에 쓰는 간판이 눈에 띄어 친밀감을 주었다. 황영성씨를 만나기 전 우리 일행은 아예 '제2실험소학'을 찾아갔는데 우리의 시골 초등학교의 초라함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교건물은 아마 일제시대에 지은 것처럼 오래 되었으며, 벽보판도 있었는데 칠판에 여러가지 색깔의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놓았다.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이 신기하게 보이는 듯 쳐다보고 바라보고 하다가 말문을 연 중년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학교 교사였다. 우리는 조금 놀랐다. 별 치장 없이 수수하게 차려입은 차림새로 보아 시골 학부형이나 밭에서 일 하다 온 차림같이 느껴졌는데 이곳 소학교 교사였다. 그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받았던 느낌을 그대로 말해본 것이다. 조금 후가 되어 황영성씨가 나타났는데 그분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황영성씨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시와 소설을 주로 쓰며 평론까지 겸하고 있는가 하면 몇 해전 <북한미술대전>에도 뽑혀 참가한 우수화가 렛델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동북삼성 일대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있는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였다. 그가 그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족여인상은 우리의 잊혀져 가는 옛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어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 색동저고리 입은 어린이
우리 일행은 한참을 소학교에서 보냈다.
곧이어, 리춘섭 교장선생님께서 마중나와 머나먼 한국 대구에서 온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으며 소학교 정문 옆에 있는 식당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조선족자치현이라지만 역시 중국음식 특유의 그 상차이냄새는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돼지고기조림이나 쇠고기볶음 생선찜이 한결같이 그 냄새로 코를 찔렀다. 단지, 감자채볶음이 나왔는데 이 맛은 덜했다. 중국 만주땅 어딜가나 빠지지 않는게 술 그중에서도 맥주는 필수였다. 대낮인데도 점심 먹는 상위에 맥주가 오르고 이 맥주는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는 식탁문화에 우리 일행은 으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춘섭 교장선생님은 식당까지 와서는 우리 일행을 접대하고 학교일로 먼저 가셨고 황영성씨와 함께 하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장백현 식당에서- 한국 이채운 서지월시인, 소설가 박명호, 조선족 황영성교사, 한국 정이랑 이별리시인.
냉면을 시켜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다시 소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한참의 시간을 거기서 보냈는데 학교안을 샅샅이 둘러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소학교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는데 그중에 색동저고리 한복을 입은 어린이도 몇이 눈에 띄어 사라져가는 우리의 문화가 이곳에 있음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그애들은 한결같이 목에 붉은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이념의 표상이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한없이 슬퍼졌다. 같은 핏줄인 조선족어린이들이 목에 두른 저 붉은 머플러를 두르지 않는 한, 국적은 중국임이 엄연하며 그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처절한 운명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천진난만한 저 애들의 목에 두른 붉은 머플러를 벗어던져 주겠는가.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그래도, 잘도 뛰어노는 저 애들을 보라. 아무것도 모른 채, 제 나이만큼 천진한 마음으로 줄넘기를 하며 발 맞추어 공중을 뛰는가 하면 빙빙 돌아가며 게임을 하고있는 저 애들은 우리의 민족이 아니란 말인가. 그 애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도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말을 건네고 하는데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 소학교는 며칠전 개학을 했다고 한다. 방학동안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나오는 날이 있기 마련이어서 이날따라 온 교정이 분주한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닌 개학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어 방학이 끝난 2학기 개학이 아니라 새로 학년이 올라가는 새학기 개학이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3월인 새봄을 맞아 새학기가 시작되는데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8월이 다 가기전 새학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소학교 전반을 둘러보았다. 복도를 지나치다가 나는 복도벽에 판넬로 붙여놓은 많은 인물들의 사진과 행적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역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장백조선족자치현 제2실험소학교에서-한국 서지월 이채운시인 중국조선족 황영성 그리고 여교사, 한국 이별리 정이랑시인,
즉, 한국의 초등학교에도 보면 복도벽에 세종대왕이나 을지문덕 안중근 이런 위인들의 사진을 걸어두어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키우는데, 이곳 소학교 벽면에는 모두가 중화인민공화국 위인들로 메워져 있다는 것. 또 그 모두가 중국 공산당 투쟁열사 인물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루는 위인은 전투열사들의 공적으로 평가해 공산당 애국심의 초점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황계광(黃繼光)의 경우 우리의 입장과 상반되는 6.25 한국전쟁때 가슴으로 막은 중국 인민지원 특급영웅이며 동존서(董存瑞)라는 인물은 중국인민해방군 전투영웅, 인소운(印少云)은 중국인민해방군 일급영웅, 백구은(白求恩)은 캐나다 여성으로 국제공산주의 전사로 이러한 이들이 위인들로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소학교 어린이들이 중국인 학생이라면 몰라도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 어린이들일진데, 운명이 달라서 다른 나라의 위인을 흠모하고 따라가는 교육을 받아가며 성장해야 되니 이 얼마나 엄청난 슬픔이며 막을 수 없는 과오란 말인가.
◇ 중국 공산당 홍보용 벽보로 변한 교실 게시판
이 뿐만이 아니었다. 소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벽보판 칠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슬픔이 있었다. 칠판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이나 모든 내용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상교육 그대로였다. 「1999. 제18기 흑판보」가 그것인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서는 호남성 소산에서 태어났어요. 모주석께서는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매우 즐겼어요. 그는 혁명의 큰뜻을 품고…」를 비롯해서 「리홍지와 <법륜공>을 철저히 배격 비판하자!」는 내용에서는 「리홍지는 <법륜공>이란 것을 조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씌워준 죄인이예요. 리홍지는 <법륜공>을 하면 죽어서 천당과 서방극락세계에 간다는 황당한 론조를 퍼뜨렸고…」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비판적 내용들로 메워져 있었다.
◆장백현 시외버스정류소에서, 한국 정이랑 서지월시인, 조선족 황영성교사, 한국 소설가 박명호교사, 이별리 이상월 이채운시인재미있는 것은 이 벽보판을 담당, 장식하는 교사가 미술교사 황영성씨인 것이다. 우리가 만난 황영성씨는 남달리 김일성 우상화의 찬양론자였다. 그러기에 당연히 모택동같은 중국공산당 우두머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교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토양인 것은 부인할 순 없으나 그게 투철한 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만난 우리 일행에게도 서슴없이 김일성을 찬양했다. 찬양 이상으로 격분하다시피 했으니까 말인데 보기드문 김일성 찬양론자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택동도 김일성에 비하면 별것 아니며 한국의 대통령의 경우는 김일성의 위대함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식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장백현 탑산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북한땅 혜산시 픙경
함께 탑산에 올랐을 때 북한땅 혜산을 바라보며 그는 스스로 감동하며 '위대한 김일성수령'을 외치며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나도 어디 가면 열변을 토할 땐 거침이 없는데 그의 다혈질이 나를 능가하는 순간이었다. 왜 모택동도 김일성에 비하면 별것 아니고 한국의 대통령의 경우도 김일성의 위대함에 비교도 안되는가 하면, 중국의 모택동이나 한국의 대통령은 신문의 한 면에 일부분을 차지하는데 김일성의 경우 신문 한 면의 전면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대서특필되며 TV 뉴스에도 보면 모택동이나 한국의 대통령의 경우 잠깐 나왔다가 회면이 바뀌는데 김일성장군은 TV에 장시간동안 방영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북조선(북한)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면, '벌어먹는 직장 주지요 사는 집 주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지구상에 이 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어딨냐' 는 것이었다. 그는 황홀하다 못해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나는 곁에서 똑똑히 보았는데 입맛이 쓰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의 논리는 명명백백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마저 없었다. ◆장백현 탑산에 올라-한국 이별리 이채운시인, 중국조선족 황영성교사, 한국 서지월 이상우 정이랑시인,
이는 우리 일행이 예견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장백으로 흘러들어오기 전 장백에 가면 황영성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 분이 있었다. 길림의 「도라지」 잡지사의 소설가 고신일선생인데, 자신의 제자가 장백에 있는 황영성교사라는 것이었다. 가서 만나되 생각이 아주 다르니 미리 알고 가라는 것과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황영성씨는 철저한 북한사회주의 사상의 첨단을 걷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 그늘을 걷어낼 길이 없음을 안 우리 일행은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 돼버렸다. 그래도 그는 떠나간 첫사랑의 상처를 받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과 이곳 장백은 우범지대 다름 아니니 밤이 되면 절대 혼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누가 노크해도 밤에는 숙소의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낯선 여자일 경우 마구 혐의를 덮어씌워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장백조선족소학교 황영성교사가 한국 서지월시인에게 그려준 조선여인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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