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3> 송강하를 가다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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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만주기행때의 일이다. 남들이 거름 지고 장에 갈 때 따라가는 것도 좋은 초석이 될 때가 있다. 요즘 세상은 다들 잘 나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차려놓은 밥상에도 나타나지 않고 용꿈만 꾸는 이들이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전세계를 감동시킨 김연아의 경우 그녀를 오늘에 있게 한 코치가 금메달선수가 아닌 은메달선수였다는 것, 일본의 마사오의 코치는 은메달선수가 아닌 금메달선수가 코치인데 겉보기에 더 화려한 코치라 해서 자신이 절로 화려해지는 것이 아닌 것도 시사하는 바 있듯이 말이다.
나의 첫 만주기행은 늘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첫 물꼬를 터주었다고 할까.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소설가 박명호씨가 어느 해 여름방학이 되어 느닷없이 찾아와 '만주 가자!' 해서 무작정 따라간 것이 나의 문학적 인생을 바꾸었다 할까, 나의 인생척도를 더 광활하게 터주었다 해야 옳을지 하여튼 그저 좋아서 따라나선 것이었으며, 그 후론 내가 터득해서 열심히 열심히 (부산일보 기사에 의하면 '뻔질나게') 만주땅을 밟았던 것이다.
내겐 첫 만주기행이었던 만큼 모든게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였는데 무작정 풀숲 가시덤불을 뚫고 헤쳐나가는 것 다름아니었다. 압록강 하류 북한의 신의주 맞은편인 중국 항구도시 단동에서 고구려 제1도읍인 환인땅으로 산넘고 물건너 찾아간 것, 거기서 압록강 중류 고구려 제2수도인 집안땅으로 미끄러져 갔던 것, 집안땅에서 통화라는 전혀 낮선 땅을 모험으로 거슬러 갔던 것, 통화에서 전혀 모르는 송강하(松江河)로 밤열차에 몸을 실어 무작정 가보자는 식으로 디밀어붙였다는 것, 이 모두가 모험이었다. 여기에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가이드 전혀없이 한국에서 간 우리끼리 6명이 움직였던 것이다.
◆통화역 근처 장백산대주점에서 만난 조선족 문인들과 함께 통화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모습
통화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 마디로 황당했다. 이곳에서도 버려진 몸이 되었다. 백두산 장백을 가려면 일단은 이도백하로 가는 열차를 타야하기에 통화로 오게 되었는데 먼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주위를 두리면거리며 살펴 보았는데 눈에 띄는 조선어 간판이 보였다. <장백산천지대주점>이었다. 첫 만주기행이었던 만큼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대주점'이니 고급술집으로 인식되는데 그게 관광호텔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대주점'이라면 호텔 즉 숙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만 봐도 우리와 다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너무나 반갑고 기뻐 들어갔다. 역시 조선족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말이 통하니 후련했다.
우리 일행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환인을 지나고 집안을 거쳐 백두산을 가려고 통화로 왔다고 했더니 이날 밤 9시 5분발 송강하행 밤열차를 타야한다고 일러주는 거였다. 로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날이 통화조선족문인들 모임이 있는 날이라서 여러 조선족문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담소도 나누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통화역 구내까지 마중 나와 손 흔들어주기도 했는데 이는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던 순간이었다.
◆통화역 부근 장백산대주점에서 만난 조선족 문인들과 함께한 한국 대구시인학교 시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밤 9시가 되었는데도 통화역 2층 대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한국으로 보면 명절때 북적대는 대합실 다름 없었다. 중국 만주땅은 어느 역을 가나 인파들로 북적거렸는데 만주는 땅이 넓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데 4~6시간 소요되는게 보통이라서 하루에 한번꼴로 열차가 운행되니 인파가 많이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열차에 올랐을 때에도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여간 애를 먹은게 아니었다. 좌석표도 아닌 입석표를 가지고 타야 했으니 더욱 난감한데다 열차 칸칸마다 이미 만원이니 뚫고 들어가는데도 숨이 막혔다. 안스러운 것은 어린애들이 어른들 사이에서 푹 파묻혀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해 울어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살아가는 것도 고생인데 잠시잠깐 차를 타고 오가는 것까지 고생이라면 이 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통화에서 송강하 가는 밤열차 속에서,중국 만주족 소학생 유호우양과 함께.
어찌되었던 힘센 자가 이긴다고 길을 내어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열차에 몸을 싣기 전에 이곳 통화조선족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있었다. 즉 좌석이 없더라도 먼저 앉는 자가 주인이니 양보하지 말라는 것, 그러다 보면 중국인들은 아무말 못하니 대범하게 행동하라는 것 등이었다. 평균 5시간을 가야 하니 그들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중국땅은 위계질서가 확립되지 않아서 모든게 그대로 지켜지는게 없었으며 목소리 큰 자가 이기고 먼저 앉는자가 왕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동네임엔 분명했다. 되는 대로 움직이는 중국인들의 습성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아래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 나가면 되는 것이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처럼 바삐 움직여 더 열심히 하려는 의욕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가 낙후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억지로 몸을 비비며 열차 안에 들어서니 열차 칸칸마다 인파로 꽉 차서 발 디딜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식하게 밀고 들어가 서있는 자리라도 겨우 확보해 무작정 낯선 곳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생기면 얼른 차치해 앉아야 하는 것도 그들의 문화였다.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이 6명인데 모두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고 두세 자리는 확보해 교대로 앉았다가 서다가를 했다.
5시간의 지루한 밤열차임을 직감한 나는 소설가인 내 친구 박명호와 함께 식당칸으로 가서 아예 거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깊어가는 밤의 이국땅 바깥 풍경을 보려했으나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잠시잠깐씩 열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했으나 어디인지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이런 걸 유랑이라 하는지 방랑이라 하는지는 몰라도 난생처음 만주땅에 와서 겪는 무대책의 전진이었다. 한참 지났을까 자리로 돌아와 보니 중국 소학교 어린이인데 노래도 잘 부르고 아주 맹랑하고 똑똑해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노랑나비같이 노랑색깔의 옷을 이쁘게 차려입은 중국인 소학교 이 어린이를 모두 귀여워하며 서로 깔깔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 애의 부모들과 친척도 동행한 모양이어서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보아하니, 소학교 3학년인 여학생이 노래와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우리일행이 탄 칸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박수를 치고 앵콜을 부르고 야단이었다. 중국 소학교 학생이지만 우리 일행중에는 1000원짜리 한국지폐를 주며 퇴계 이황이라고 설명도 해 주었는가 하면 나는 1만원권 한국지폐를 기념으로 주며 세종대왕이야 하며 말했으나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보던 중국화폐가 아니라 한국 코리아화폐라니 그저 좋아하는 것이었다. 주위는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였고 그 애는 한국화폐 여러 장 선물로 받았으니 더욱 신이 났던 것이다. 복잡한 열차 안이었지만 카메라 후레시를 번쩍이며 기념사진도 찍어대며 더욱 친해진 것이다. 어린 아이야 세계 어느 나라 아이든 귀엽고 순수하지 않은 애 없지 않고 보면 말이다. 나에게는 이 중국애만한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냄이가 있어 더욱 흥겨웠다.
나는 그 애에게 내 여행수첩을 내밀어 주소와 이름을 써서 받게 되었는데 중국어인 한자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는게 여간 또 대견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통화시 중국인 소학교 3학년 이름은 '유효우'양이었다. 나이는 열살로 아버지가 통화시 철도공무원으로 송강하역 부근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집으로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가는 중이었다. 일행은 유효우양의 부모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오빠, 외삼촌 등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유효우양의 아버지였다. 우리 일행과 같이 앉아 있었으며 마주 보며 앉아있는 이들도 가족 일행들이었다. 마침 통로 이쪽 좌석에는 나이 드신 어른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이 분이 바로 요녕성 조선소학교 교사를 지낸 분으로 정년퇴직하고 아들가족들과 백두산 관광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일행과 유효우양 가족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해 주셨던 것이다. 언어가 달라 영 대화가 안 되기에 한국말과 중국말을 통용하며 의사전달을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유효우양과 조영제선생과도 기념촬영을 하며 복잡한 객실안이었으나 무려 5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송강하까지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추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 일행들의 여행은 바로 고급관광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갖는 여행인 만큼 인간미까지 흠뻑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밤 2시쯤 되었을까 열차가 송강하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 많은 인파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아무 대책없이 역사를 나오고 있는데 주위는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였다. 유효우양 어머니가 무어라고 말은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때 유효우양 아버지가 두 손을 모아 한쪽 뺨에 갖다대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잠자는 시늉을 해보이는 거였다. 이걸 벌떡 알아차린 나는 '아, 함께 가자는 것이구나!', '잠 잘 곳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구나!'로 판단하고 응답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따라가겠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는 어둠속을 따라갔다. 철로변을 따라 어느 정도 걸어 가니까 어두운 나무판자로 막은 울타리 사이 골목이 펼쳐졌으며 대문이 눈앞에 보였다. 곧장 따라 들어가니 철도관사였다.
◆송강하의 전형적인 만주족 집, 만주족 소학생 유효우양 외할머니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그녀 가족 친지들과 서지월시인 등 한국 대구시인학교시인들과 함께.
낯선 중국인 집에 들어서니 불이 환하게 켜지고 기다렸다는 듯 유효우양의 외삼촌 되는 사람이 반가이 맞아주었는데 자기들끼리 우리 일행이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금도 불안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술을 마시자는 것과 저쪽 방에 짐을 풀어라는 것과 다 함께 이 관사에서 투숙할 수 없으니 남자들은 이웃에 있는 초가로 가서 잠을 청하라는 것을 눈짓손짓으로 다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리 한국의 시골과 다름없이 한밤중인데도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는데 유효우양의 외할머니였다.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우리 일행은 알아차렸던 것이다. 유효우양의 외삼촌이 그 외할머니의 맏아들이며 유효우양의 아버지가 둘째아들로 보였다는 것 등 여러 정황들이 느낌으로 와 닿았다. 그들이 마련해 준 집에 하룻밤 잘 보내고 아침식사 대접도 잘 받고 다시 송강하역 앞에서 승합차를 대절해 이도백하로 향할 때까지 유호우양은 엄마와 함께 마중나와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도 유효우양은 대화가 되지 않는데도 늘 싱글벙글했다. 내 곁에 다시 오더니 코스모스 꽃잎을 여러 개 따와서는 내 옷 단추구멍마다 하나하나 끼워주는 애교도 보여주었는가 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송강하역까지 마중나오면서도 송강하역 철길 앞에서 언제 발견했는지 나팔꽃을 따서 들고 오더니 다시 내 옷 단추구멍에 꽂아주며 "이쁘다!"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좋아했다.
◆송강하 역에서, 마중 나온 만주족 소학생 유효우양에게 한국 서지월시집'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를 선물해 기뻐하며 펼쳐보고 있는 모습.
어젯밤에 못보았던 코스모스를 비롯해 나팔꽃 등 여러 빛깔의 꽃들이 철길가에 피어 있었는데 우리네 한국정서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동심은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 세상 어른들이다. 어른들이 비극의 역사를 만들고 종족과 종족을 갈라서게 하고 비극의 눈물을 흘리하니 말이다. 보라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주권이 달라도 유효우양에게는 국경이 없어보였다. 나는 가지고 간 한글로 씌어진 내 시집『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를 건네주었는데 그녀는 신기한 듯 좋아라고 펼쳐보는 것이었다.
만주족 집에서 그들과 우리 일행이 하룻밤 기거하며 함께 했다는 것은 오랜만에 멀리서 찾아온 친척과 같은 인정 다름아닌 것이었다. 언어와 풍습을 달리해서 언어소통은 안 되었지만 의사소통은 전혀 무리없이 이루어진 것만 봐도 동질이라고 감히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알고 보니 중국 본토의 한족이 아니라 만족, 즉 만주족이었다. 청나라 민족이다. 만주족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만주족 가옥은 한국 초가와 같은유형이지만 집 전체를 흙담으로 쌓아올려 짚이 아닌 갈대 같은 것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방안을 완전히 온돌로 한게 아니라 방 한쪽을 침대같이 쌓아 온돌로 하고 나머지 공간은 난로를 설치해 놓은 형태이며 창문을 해 달아놓은게 달랐다. 마당에는 채소밭이 있었는데 마당귀퉁이 화장실에 가 보았더니 한국처럼 재래식이었으나 이물질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송강하(松江河)라면 우범지대나 다름없는데 '그곳을 밤중에 갔단 말인요?'하고 깜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고 보면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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