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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5>'방천'에서 안중근을 말하다

아미산월 2010. 4. 2. 23:35

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5>'방천'에서 안중근을 말하다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5] '방천'에서 안중근을 말하다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머물렀던 초가
영웅은 간데없고 영정만 덩그러니…
1909년 3월 대한독립 맹세하며 단지동맹 맺었던 그 현장이 지척에…

안중근 의사가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싣기 전 독립운동을 하며 머물렀던 권하촌 마을 초가. 아직도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영정이 걸려있다.
안중근 의사가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싣기 전 독립운동을 하며 머물렀던 권하촌 마을 초가. 아직도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영정이 걸려있다.
용정 조선족학교에서 개최된 조명희 문학제 광경.
용정 조선족학교에서 개최된 조명희 문학제 광경.
안중근의사가 머물렀던 권하촌 마을 초가를 방문한 필자.
안중근의사가 머물렀던 권하촌 마을 초가를 방문한 필자.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서 안중근 의사를 닮은 서학동 관장과 담소 장면.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서 안중근 의사를 닮은 서학동 관장과 담소 장면.

◇ 용정 포석문학제

장춘 대화호텔에서 개최된 한중 국제토템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이튿날 장춘의 유명한 호수 남호(南湖)에서 길림신문사 박문희부사장과 장춘대학의 박향연양 셋이서 동심으로 돌아간 듯 하루종일 뱃놀이를 즐기고 연길로 오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것은 오후 5시였다. 정들자 이별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 만주땅은 어딜 가나 정겨운 사람들이 조선어를 쓰며 살고 있었다. 연길시외버스터미날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25분이었으니 장장 9시 25분 소요된 먼 거리였다. 그 먼 거리를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 중에 한국인은 나 한사람뿐이었다.

잠이 잘 안 오는지라 고속버스 중국운전기사 옆자리에 앉아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담소도 나누었는데 물론 언어가 다르기에 전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한 것이다. 밤 깊은 연길역 오른 켠에 있는 연길시외버스터미날 뿐만 아니라 정면의 연길역마저 불이 꺼져있어 적막감이 감돌았다. 마중 나온다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아 택시를 잡아타고 자주 가던 숙소로 향했는데 그때 조선족 심예란시인과 조민호시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 이튿날 한국에서 내가 온 줄 알고 용정에서 개최되는 포석문학제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포석문학제란 충북 진천출신으로 일제시대 시인이며 소설가, 극작가로 한 획을 그은 포석 조명희선생을 기리는 행사였다. 해마다 한국과 중국에서 병행해 치뤄지는데 조명희선생의 문학과 민족애를 조선족들에게 알리는 국제문학행사였다. 한국 청주 동양일보에서 매년 주관해 오고 있으며 특히. 중국 조선족소학교 중학교 학생들 대상으로 조선어로 백일장을 열어 시상하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포석(抱石) 조명희(1894~1938)선생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일본유학을 거쳐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해 활동하며 일제의 농민수탈과 이에 저항하는 지식인 운동가의 삶을 그린 대표작 < 낙동강 > 을 발표했으며 1928년 구소련으로 망명해 〈만주의 빨치산〉, <붉은 깃발 아래에서>, <짓밟힌 고려인> 등을 썼으며 망명지인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사범학교 교원으로도 일하며 그는 36년 스탈린이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조선인을 강제이주시키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다 1937년 소련 KGB에 체포당해  1938년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일제의 첩자라는 혐의로 체포돼 총살당한 인물이다.

이후 명예회복이 되어 소련작가연맹회원으로 복권다되었으며 타슈켄트의 나보이기념관에는 조명희기념관실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타슈켄트의 남쪽에는 '조명희 거리'라고 명명된 거리가 있으며 조명희선생의 장남 '조선인'과 장녀 '조선아'씨가 이곳에 살고 있다. 이들의 이름에 모두 '조선'이 들어 있는데 조명희선생은 아들과 딸 이름을 부를 때면 늘 성과 함께 큰 소리로 부르며 조국을 생각했다고 한다. 포석 조명희선생은 1920년대 조선 근대문학의 하늘을 연 큰 별이며, 〈낙동강〉은 카프계열 작품들 중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고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있다.

◇ 두만강 치하류 어미지향 마을

역시 그 다음날도 한국 동양일보(시인 조철호회장)에서 주관한 두만강 방천기행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리임원시인이 동행하자 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 전서린학생과 함께 말로만 듣던 방천기행을 하게 되었다. 방천이라 부르는 두만강 최하류 어미지향 마을은 함경북도 최북동쪽과 만주땅 훈춘 동쪽 끄트머리와 러시아와 국경지대로 3국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동남쪽은 러시아와 잇닿아 있고 서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중,러,북한이 3국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닭울음 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 3강을 놀라게 한다.'는 신비의 땅으로서 대대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비경 또한 대단해 길림8경의 하나로 꼽힌다.

◆동남쪽은 러시아와 잇닿아 있고 서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마주하고 있는 중,러,북한이 3국 국경지대에서, 한국 서지월시인 연변대학 전서린양 조선족 리임원시인.

 

오른쪽 출입국사무소 건물 위로는 나란히 중화인민공화국 깃발과 러시아깃발이 함께 게양되어 있었는데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서 러시아땅 쪽을 멍하니 바라보니 하나의 굽이진 산길 같은게 놓여있었다. 나는 중러 국경선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왜냐하면 이길을 계속 가면 안중근의사가 항일 독림운동을 펼치며 1909년 3월 김기용, 백규삼 등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씩를 끊어 조국의 국권회복 의지를 다졌던 ‘단지동맹’을 맺었던 그 현장을 지척에 두고있기 때문이다.

◆두만강 최하류 어미지향 마을 방천함경북도 최북동쪽과 만주땅 훈춘 동쪽 끄트머리와 러시아와 국경지대로 3국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동남뽁은 러시아와 잇닿아 있고 서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중,러,북한이 3국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러시아와 북한 국경 민간인통제구역인 연추하리(煙秋下里) 마을은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으로, 안중근 의사가 1908년 4월 러시아지역에서 최초의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 이토오히로부미를 암살할 것을 맹세하고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던 역사의 현장이며, 손가락을 자를 때 뚝 뚝 떨어졌을 핏방울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타오르는 횃불을 연상케 하기도 하는 모양으로  '단지동맹비'가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세워져 있기도 한 곳이다. 또한 안중근의사가 원흉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하여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그 출발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역 가는 길목이니 말이다.


◇ 권하촌 마을에서 

 

◆안중근의사가 원흉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머물렀던  훈춘 권하촌 마을초가 마당 한 켠에 놓여있는 탁자앞에서「안중근의사의적」이라 써붙인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는 서지월시인.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하는 발길이 원망스러웠다. '편하게 살려면 꿈을 못 이룬다'는 나의 신념도 타국의 국경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되돌아오는 길에 권하촌(圈河村) 마을을 찾았다. 권하촌 마을 맨 위에 나즈막한 초가 한 채가 나타났는데 이 초가는 안중근의사가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마지막 머물던 곳으로 저격하기 1년 전인 1908년 4∼6월경까지 머물며 독립운동을 구상하며 묵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시골집으로 방 하나에 마루와 부엌이 연결돼 있는 전형적인 만주땅 가옥구조 그대로였다., 마루에는 안의사의 영정이 걸려 있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초라했다. 보라,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진정한 애국자는 이토록 후미진 변방의 초가에서 머물며 한 시대를 처절하게 살다갔거늘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을 몰라서였겠는가.  

나는 깜작 놀랐다.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가 이곳에서 마지막 기거하며 원흉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미리 다짐했던 곳이니 말이다. 침대 하나 그리고 부엌의 검은 솥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그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듯  했다. 마당 한 켠에는 탁자가 놓여있었는데 안중근의사를 추모하는 모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대한민국 국기가 나란히 새겨져 있는「안중근의사의적」이라 써붙인 방명록에 '아, 안중근! 민족의 상장(上長)!'이라 기록해 놓았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으나 돌아나오는 발길이 무겁기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