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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평론>시인론)서지월의 시세계/박수연

아미산월 2009. 8. 15. 06:58

ㅁ[유심](평론>시인론)서지월의 시세계/박수연

서지월의 시세계 / 박수연
결여를 넘는 교류의 시학
[20호] 2005년 03월 10일 (목) 박수연 문학평론가

1.

 

   
“시를 써서 무엇하나, 사람들아”라고 시인은 쓴다(《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 94면). 논리적으로만 정리한다면, 말의 사원을 모아 놓은 시집은 형식이고 그 말들이 결합되는 맥락은 내용이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그 말이 기록되어 있는 장소의 맥락을 생각해야 한다.

독서의 과정에서 그렇게 될 때, 흔히 알고 있듯이 형식과 내용은 서로 교응한다. 이때, 내용의 차원에서 위의 말은 시를 업으로 삼은 존재들에 대한 질타이지만, 형식에 말려들어감으로써 그 말은 언어적 전도로서 의미화되는 시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위의 말은 시를 쓰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 쓰기의 필연성을 포함한다면, 위 진술은 시인의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시인은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고 말함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로 표현해야 하는 역설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시인은 시를 부정함으로써만 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부정은 이를테면 시적 성취에 도달하기 위한 부정이지 외면하기 위한 부정이 아니다.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는 말의 맥락은 이렇다.

 

 

 

    시장바닥에는 생어물 건어물 포함해서

    …중략…

    참 많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해서
    똑같이 틀 속에서 뜨겁게 익어 나온 붕어빵들
    무슨 좋은 세상 맞은 듯 줄지어 얹혀 있지만
    너들은 말을 못해 말을 못해!
    움직일 수도 없어! 하며 귀뜸해 주려다 말았지만
    그처럼 부질없는 일도 없듯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시를 써서 무엇하나?
    차라리 산골짜기 시냇가 언덕 위에 피어나는
    착한 꽃이 되지 꽃이나 되지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었네
    ―〈시를 써서 무엇하나, 사람들아〉 부분

시보다 존재의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사실이 역설(力說)된다. 역설이기는 하되 나직한 역설이다. 시가 쓸모 없다고 외치지 않고 다만 ‘중얼거리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정적인 생각이지 행동이 아니다. 시인은 ‘할‘을 외치며 시를 단숨에 끊어버리지 못하고 시를 여전히 쓴다. 무슨 연유인가에 의한 유보가 있는 것이다.

 

일단, 시 속에 겹쳐 있는 두 개의 담론을 말해보자. 하나는, ‘시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환원론이다. 비록 문학 언어를 재현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재현 대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또한 언어이다. 시는 ‘어떤’ 삶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시는 곧바로 현실을 가리키기도 하고 주체의 내면을 거쳐 현실을 지향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는 이런 관계맺음을 통해 현실에 대한 미적 재구성의 방식으로 삶에 삼투된다.

 

그렇다면, 시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말은 결국 시 이전의 삶의 미학화를 전제하는 셈이다. 삶이 시의 미적 기획에 앞서서 그 기획을 보다 잘 실현하고 있다면 그 삶에 시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는 말은 사상(事象)들의 진실됨 자체를 바라보는 사람의 긍정적 목소리이다.

 

다른 하나로, 삶보다 못한 시가 있을 수 있다. 인용 작품을 보면, 좁은 시장길에서 시는 붕어빵과 같은 것으로 뒤바뀐다. 붕어빵은 똑같은 틀에서 나온 똑같은 모습의 결과물이다. 그것이 바로 시의 모습이라면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고 묻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일일 것이다. 시인이 하는 말은 “너희들은 말을 못해 말을 못해!/움직일 수도 없어!”이다. 말못함의 정황에 대한 구조적 분석도 연민 어린 동감도 여기에는 없다. 그는 세계의 냉정한 관찰자일 뿐이다. 냉정함은 거리로부터 비롯되는데, 본래 구조주의적 시선은 구조 외부의 시선이다.

 

그런데 시인은 끝내 그 냉정을 유지하지 못한 채 할 말을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다(“귀뜸해 주려다 말았지만”). 그 이유는 붕어빵과 시인을 나란히 놓는 시의 대칭구조 속에 있다. 붕어빵도 말을 못하지만, 시 또한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본디 말은 보편적 랑그의 개성적 발화로 실현되는 것이다. 삶이란 그 말이 탄생하는 주형틀이며 말은 삶의 혀이다. 동일한 삶이 없듯이 동일한 파롤도 없다. 시인에게 시가 세상과 말을 나누는 형식이라면, 따라서 시는 특이한 방식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시는 언제나 개체이다. 그럴 때 시는 비로소 자기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데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시의 대칭구조 속에서 붕어빵과 시가 ‘말못함’이라는 공통자질로 휘감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은 구조의 외부에서 말못함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말못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냉정한 관찰의 위치가 구조 내부에 있을 때 “시를 써서 무엇하나”라는 말은 시의 언어로써 아무 말도 하지 못하리라는 시인 자신의 절망을 표현하게 된다. 이 질문은 시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데, 한 존재의 개성적 실존 여부를 타진하는 차원의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질문은 상인에 의해서도 학자에 의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상품화된 욕망의 시대에 실존의 가능성마저 자본의 기획에 맞춰 주조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존재의 상실감과 본원성이라는 문제를 각각의 방식으로 던져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씌어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어쨌든 시인은 시로써 세상에 자발적으로 응한다. 더구나 시는 개성의 미적 표현에 대한 욕망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현실과 관계 맺는 것 이외에도 시는 개성을 드러내려는 언어 자체의 미적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욕망의 근원적 존재 방식은 무엇일까? 욕망은 존재의 결여를 메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대상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해도 궁극적인 결여를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주체가 그 욕망을 실현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나뉜다. 전자를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후자를 ‘욕망 외면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욕망을 억압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이 있는 이유는 욕망 실현의 불가능을 경험한 뒤의 캄캄한 심연을 주체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길항하는 두 가지 힘들의 작용이 시에 있기 때문에, 시는 씌어지면서 부정되는 것, 혹은 대상을 지향하면서 그 대상에 도달하지 않으려는 행위가 된다.

이 끝없는 부정과 억압 속에서의 씌어짐이 위에서 말했던 유보의 연유일 것이다. 서지월은 두 개의 근원을 시에 겹쳐 놓고 그것들의 상호적 교통을 노래한다. 교통을 노래할 때 시는 행복의 한 순간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은 그러나 무매개적인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오히려 결락된 것들의 확인과 함께 있는데, 서지월 시의 또한 주제가 여기에 있다.

 

2.

 

“가장 확실한 비밀을 가졌다는 어떤 사람 죽고/가장 확실한 비밀은 비밀로 남았네”(《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 17면)라는 말에서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존재 고유의 영역이 완강하게 고수되는 어떤 상태이다. 비밀은 타자에게 열리지 않은 어두운 세계이다. 어둠은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안온한 세계이기도 하며 그 이율배반성을 통해 생성으로 나아가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 생성의 원리를 알아채거나 독점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토록 비밀에 집착하는 것이다. 시의 한 구절을 빌면, “먼저 간 사람/비밀 캐기 위해 어두워지면서 다투어 등불 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 행위가 비밀을 남김없이 들추어 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비밀은 남겨짐으로써 비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존재들은 누구에게도 열어 놓을 수 없는 비밀로써 타자들과 영원히 분리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대상(시)을 욕망하면서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 이와 관련될 것이다. 타자를 지향하되 그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러므로 “누구에겐가 한 마디 건네고/영 입 다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확실한 비밀이 비밀로 남는 것’은 대상 욕망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아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자기 보존 행위이다.

 

그런데 비밀이 혼자 비밀일 수는 없다. 비밀은 누군가가 그 비밀을 지향해야만 비밀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이 실현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현되지 않아야 할 욕망이 이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과 욕망은 비록 그것을 캘 수 없고 실현할 수 없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운동할 수밖에 없는데, 이 변증적 상태가 미묘한 아포리를 불러온다. 〈어떤 비밀〉은 죽음을 통해서 비밀이 완성되지만 그 비밀이 산 자에게만 작동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이율배반성에 대해서는 시인도 어쩔 수 없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배리를 묵묵히 견디는 일이다. 일종의 존재론적 비의의 승낙이기도 하고 한도적 체념이기도 한 이 세계 인식이 시인으로 하여금 지속적 질문 형식의 시를 쓰도록 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에서 “시인의 삶이 ‘홀로 머나먼 길’임을 이쯤에 와 터득했다.”(自序)고 말하거나 시집의 표제시에서 “다른 도리가 없음을 이제는/조금 알 것 같다”라고 쓰는 것도 그 질문의 연속에 대한 시인의 답변이며, 〈그곳까지의 거리〉에서 진술의 모든 종결어미가 의문형으로 끝나는 것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의 현재 진행 상태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서지월의 시는 배리적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해 갖는 의문 자체의 구성 형식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항시
    그늘을 지어 보이면서 형체는 없지만
    뒤켠의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불러온다
    생각해보라 나무가 그림자를 만들고
    흙이 사람을 만들고 물방울이 모여
    구름을 만들 듯, 나는 항시
    내가 서 있는 곳이나 앉아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의 존재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생각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보면
    남들이 나를 생각하는 그 뒤켠의
    엉뚱한 것들까지 불러들임을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 같으나
    ― 〈내가 생각하는 것〉 전문

삶이 의식의 영역 속에서만 구성된다면 배리같은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의 실제적인 불가능성 때문에 절망이 온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주체는 그 일과 끝내 마주치는 수밖에 없다. 실은 근대적 주체론을 형이상학적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의식 외부의 영역을 의식의 영역의 평탄화하고 그 배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의식은 모든 비사유를 포괄하지 못한다. 사유와 비사유가 동시에 묶이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의식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는 비사유를 배제하면서 사유를 전체로 삼는 삶의 과정을 거쳐간다. 내 사유가 “엉뚱한 것까지 불러들임을/나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론이 바로 이런 코기토를 상정했고, 그래서 근대적 주체중심주의를 양산했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물론 생각과 실제는 다르다. 의식할 수 없었던 것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만 의미화(signification)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의 대표자로 충당될 수 있는 것이 ‘몸’이며 ‘무의식’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하겠고, 실제로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만 하더라도 몸과 정신분석학적 문제 설정 하에 수많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이것이 일종의 유행적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해도 나름대로의 필연성 또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몸과 무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이제는 무안한 일이 될 정도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사실 자체가 문학인들의 동의를 증거한다.

 

이때 그 경향의 핵심에 놓인 것이 곧 타자의 사유이다. 몸은 정신의 타자이며 무의식은 의식의 타자이고 그 타자는 근대적 동일자의 타자이다. 서지월은 그것을 많은 90년대 문학의 내면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강조하는 것은 그 비사유의 결과로써 나타난 현실이다. 현실이라는 말을 리얼리즘의 전유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실은 모든 문학(방법)이 제각각의 현실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누군가는 모사론적 재현에, 누군가는 심리적 표현에 강조점을 둘 수 있지만, 그것이 어느 경우든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는 문학이 삶에 직접 간접으로 묶이기 때문이다.

 

시에 자연 풍경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모사론적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시는 언제나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삶이 내 삶이 아닐 때 나타난다. 이른바 삶의 본원성(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이라고 여겨지는 상태가 파괴되고 비본래적 요인들에 의해 주체의 모든 시간이 지배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이 야기되는데, 그것이란 삶의 갑작스러운 낯설음이나 공포이기 십상이다.

 

알고보니 그 낯설음과 공포가 본래적 삶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그것은 주체의 것이 아니며 주체가 동일화할 수 없는 타자의 영역이다. 그런데, 시에 따르면, 비사유의 삶이란 내가 생각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생각하는 것 뒤에 있는 그림자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두 겹의 시선이 여기에 있다. 하나는 내가 아닌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아닌 것이다.

 

시의 “엉뚱한 것들”(→타자)이란 내 생각의 뒤켠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나를 생각하는 그 뒤켠에 있는 것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의 사유)는 동일성의 영역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것도 남의 비사유까지 포괄해야 하니까, 곱으로 그렇게 된다. 서지월은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형식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

 

서지월의 시가 90년대의 문학들과 구분된다는 것은 그의 진술들이 의도적으로 뒤틀리거나 해체되지 않고 서정시의 규범적 문법을 유지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이 규범성은 그가 미적 측면에 있어서 보수주의자이며 현실의 측면에서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이 서정의 한 모습이며 자아와 세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의 규범적 형식성은 서정의 이상성이다. 이 이상주의가 그의 시로 하여금 비사유의 대립적 영역을 넘어서서, 앞에서 말했듯이 결락된 것들을 포괄하면서 존재들의 교통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힘일 것이다. 〈바람 앞에서〉나 〈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와 같은 시가 그것을 노래한다. 이 미적 이상주의 속에서 “어제의 바람이었던 내가/오늘의 풀잎으로 느끼는 것은/내일의 피리구멍으로 살아남기 위함인가”라고 그는 쓰는 것이다.

 

3.

 

세계의 결락을 넘어서는 미적 이상주의가 분리되거나 대립되는 존재들의 교통을 불러온다고 했다.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에서 그 교통은 〈바람 앞에서〉와 같이 때로는 시간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시집의 ‘9부 내 나이 마흔넷의 시’에서처럼 때로는 공간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물론 공간 속에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시공간의 결합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서서 운동하는 존재들의 실체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실체를 탐구한다고 해서 시가 관념에 빠질 수는 없다. 오히려 서지월은 시의 옆자리에 ‘봄비’ ‘소쩍새 울음’ ‘느티나무 그늘’ ‘밤비 내리는 소리’ ‘피’ ‘가시덤불’ ‘칡넝쿨’ ‘흰 머리카락’ ‘발바닥’을 가져다 놓는다. 그것들이 시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환유적 구성체이다. 최근 한국시의 수사학이 삶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절망을 환유적 언어들로 표현한다는 점에 견줄 때 서지월 시의 규범성이 더욱 도드라지는데, 이는 ‘내 나이 마흔 넷의 시’를 보면 확연해진다.

 

그의 시는 환유이되 근원적 절망의 형식적 표현이 아니다. 그의 시는 오히려 존재들의 교통을 시적 대상의 치환을 통해 드러낸다. 시는 ‘봄비’이고 ‘소쩍새 울음소리’이며 ‘느티나무 그늘……’ 등을 거쳐 ‘발바닥’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이 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인이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나에겐 삶의 전부가 시였으며, 시가 내 삶의 전부였다”고 쓴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 모두가 시이며 시가 세상 전부라고 바꿔 이해할 수 있는 이 말은 시를 통해 세계와 교통하려는 시인의 심리를 드러낸다.

 

그에게 시는 미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교두보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의 환유는 비극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결락을 건너가는 행복의 언어이다. 그의 시적 대상 중에 주목할 만한 빈도수를 기록하는 것이 “꽃”인데, 꽃이 삶의 한 절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한 상징이다. 가령,

    구천(九泉)의 물소리가 저대로 흐르고 우리가 언젠가 이뤄야 할 믿음에 대한 확신보다도 더 아스라히 멀어져감에 부지런히 꽃은 떨어져 내리고 시간은 영 멈춰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지 몰라

    잉잉거리는 피의 순환처럼 아름답고 탐스런 꽃이여, 너를 불러 앉혀 인제 나는 무작정 쉬기로 한다
    ― 〈꽃의 시간〉 부분

라고 쓸 때 시인은 그 존재론적 절정에 머무르고자 하는 심리를 드러낸다. 그 머무름은 영원의 지향이면서 동시에 영원으로써 순환하는 세계(“피의 순환처럼 아름답고 탐스런 꽃”)의 다른 이름이다. 이 열망을 더 간절하게 하는 것이 ‘낙화(落花)’이다. 꽃이 떨어지는 것은 소멸하는 세계를 환기하지만 소멸하지 않아야 할 세계를 갈망하도록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는, 그것들이 대립하면서 서로 순환한다는 점에 있다. 이 순환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서지월의 시가 탠생하는 힘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무어라 중얼거리는 마음의 저편
    돌 속의 바다가 길을 내어,

    하나의 나뭇잎이 출렁일 때마다
    떨어지는 물방울
    이마에 솟아올라 떨어지는 물방울
    행방(行方)을 찾아가는 머나먼 길

    어느 날 샘물가에서
    목이 말라 퍼마시던 한 그릇의 물
    그 물을 되찾아 오기까지
    걸어서 헤매야 할 머나먼 길

    길 위의 나무 한 그루……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전문

길이란 시인이 도달해야 할 곳으로 연결된 통로이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시인이 갈망하는 세상과의 거리를 타진하는 시이다. 이 타진은 이해관계의 타진이 아니라 현실의 미적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타진인데, 여기에 바로 “길”이 있다. 이것이 “길”의 의미론이라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는 길의 존재론이다. 길은 있고 있기 때문에 시인이 “걸어서 헤매야 할 머나먼 길”이 된다.

 

그렇다면 그 길은 시가 탄생하는 길이 될 것이다. 시인은 시가 삶의 전부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길 위의 모든 것은 시로 통하고 시를 통해 순환하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서지월의 시는 이렇게 해서 존재들에 대한 노래를 넘어 존재들과 함께 있는 노래가 된다.

 

시집에 무수히 편재한 꽃들은 그 시의 상징이다. 꽃핌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야 할 머나먼 길, “그곳까지의 거리가 문제”이며 “그곳까지 가는 방향이 문제”라고 시인은 쓴다. 그곳에 꽃의 절정이 있을 것이고, 그 길에서 무수히 많은 헤맴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시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들의 끝없는 미끄러짐이 된다.

 

이 미끄러짐이 서지월의 시에서 결락의 영역과 통하는 것이며, 이 결락을 넘어서기 위해 길의 헤맴이 있다고 해야 한다. 서지월의 시편들은 이 헤맴의 환유적 구성물이다. 그리고 그 구성물은 독특하게, 최근의 시들처럼 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정시의 미적 규범을 이상으로 삼는 결과물이다.

 

서지월에게 이 보수적 형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분석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가 “그곳까지 가는 방향이 문제”라고 말하듯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

 

박수연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저서로 《문학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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