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3,4월호)<월간시평>서지월-'모국어의 수난 속에서'
◆공영구 시 <징검다리>
◆이태수 시 <물거품>
◆정훈 시 <兩水에 서서>
◆황태면 시 <이 새의 동성로>
◆윤경희 시 <만월(萬月)>
문학작품은 언어 즉 우리말, 한글을 갈고 닦아 빛나게 하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말을 하고 언어를 쓸 수 있으나 그것이 시대나 국가, 역사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잘 알다시피 정제된 언어여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지난 『 대구문학』(2010. 1,2월호)에서 공영구시인의 시 <징검다리>, 이태수 시 <물거품>, 정훈 시 <兩水에 서서>, 황태면 시 <이 새의 동성로>, 윤경희 시 <만월(萬月)>이 돋보였다. (서지월시인)
모국어의 수난 속에서
서 지 월 (시인)
문학작품은 언어 즉 우리말, 한글을 갈고 닦아 빛나게 하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말을 하고 언어를 쓸 수 있으나 그것이 시대나 국가, 역사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무단방출이라 할 수 있는 마구잡이 시인등단이 그러하며 마구 써서 버젓이 <시(詩)>라고 내놓는 것이 그러하다.
잘 알다시피 정제된 언어여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사람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면 지탄받듯이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자격미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더러 무에 그리 잘나서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할지 몰라도 이는 잘나고 못나고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소양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몇년전인가 신문사의 문학담당 기자가 전화로 내게 자주 일러준 말이 생각난다. 대구문단을 대표하며 「시의 도시」라 불리우는 대구의 대표적인 문인단체에서 펴내는『 대구문학』을 펴보았는데 30여명의 시인들이 발표한 시를 보니 한 편도 시다운 시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허망하는 것이었다. 물론 안목과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그 단체의 잘못이라기 보다 시인 각자의 책임소재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대게 보면 시가 정제되지 않았거나 시인으로 등단하는데 각고의 고충을 통과하지 않고 쉽게 시인렛델을 따다 보니 우리말이 혹사당하는 건 물론 아래위를 모르고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문단을 시끄럽게 하는 경우 종종 있어왔는데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과의 싸움에 치열하지 남의 이야기나 행위에 시비를 걸거나 뚜왈랄라 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맞춤법이 엉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행이 나는 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도 좀 해봤고 40년을 날마다 밤마다 이 땅을 시를 놓치지 않고 읽고 또 읽어왔기에 띄어쓰기와 맞춤법, 그리고 해서는 안되는 반복법 등등을 익혀왔는데 중요한 건 국어교사를 했거나 국문과를 나왔기에 맞춤법이 옳아야 되고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틀려도 괜찮다는게 아니잖은가 말이다.
'사과를 깎는다'라 했을 때 아직도 '깍는다'로 잘못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시를 전혀 모르는 식당아줌마는 틀려도 된다면(이것도 안되지만) 적어도 문학을 하며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시인은 위대하지 않는가? 우리 모국어를 갈고 닦아 정신의 세계에 올려놓는 존재이니!) 허용되지 않는다는 나의 견해다. 비단, '깍는다' 뿐이겠는가. 물론 띄어쓰기나 맞춤법에 있어서 애매모호한 경우 있으나 기본적으로 틑려서는 안되는 경우를 지적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구시내 버스정류소이나 버스 안에 보면 시가 한 편씩 아크릴판에 새겨져 전시되고 있는데 나는 유심히 쳐다본다. 시를 잘 썼고 못썼고의 기준은 일단 뒤로 하고 기본적인 한글표기에 있어서 무식한가 그렇지 않는가를 먼저 보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의 시인일 경우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아니다 다를까 '짐을 묶다' 했을 때 '묵다' 로 '꽃을 꺾다'를 '꺽다'로 표기했으니 말이다.
또, 한 예를 들면, 한 편의 시속에서 제목이 <진달래꽃>이면 본문에서도 '진달래꽃'('진달래'로 해도 안됨)라는 단어로 통일해야 되는데 '참꽃'으로 표기 하기도 하며 '진달래'로 바꾸기도 하며 범벅이다. 범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편의 시속에서 2인칭을 <너>로 설정했으면 본문 끝날때까지 '너'로 표기해야 옳을진데 '그대'로 썼다가 '당신'이라고 썼다가 하는 등 혼용되어 사용한다. 즉 범벅을 넘어서서 이제는 뒤범벅이다. 한 편의 시속에서 말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현재와 과거 미래시제도 잘 설정이 돼야 하지만 역시 한 편의 시속에서 앞부분에 <비가 옵니다>라 썼으면 끝까지 존대어(ㅂ니다)로 표기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뒤에 가서는 '바람이 분다', 또는 '아이가 걸어오네'로 해버리니 난간하기 짝이 없다. 시에서 부호도 하나의 글자로 인식하고 써먹어야 하는데 마구 쉼표를 찍어 토막내어서 단어나 문장을 부스러기로 만드는가 하면 더욱 의문을 가져보라고 강요하듯 물음표를, 더욱 감탄하라고 인위적으로 느낌표를 비 오듯 넣는다든지 하는 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리라.
문장구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문장이 되어야 하며 문장구성이 제대로 잘 앉혀지고 나서 온전한 시문장 되든 소설문장이 되든 수필문장이 될 것이다. 이제는 등단이라는 렛델을 딴 문인일수록 열심히 더욱 공부해해야 될 줄 안다. 우리의 과거 교육풍토를 보면 대학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시절 밤 지세우며 공부했다가 대학을 가고 나면 그만 노는데 치중하듯 했는데, 문단풍토도 보면 시인으로 등단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쏘다니며 배우다간 시인이 되고나면 자신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활보만 할게 아니라 이때가 더욱 중요하니 등단전처럼 배워야 하리라. 그래야 자신이 똑바른 시인으로 정립된 모습이 되리라 본다.
통일된 언어개념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여려 결과라 보는데 솔직히 이런 경우 시를 쓰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 자신이 하는 사업이나 설겆이나 빨래하는데 좀더 신경 쓰면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리라 본다. 물론 젊은 날부터 시를 쓰지 않고 늦깎기로 시인이 되어보겠다 해서 시를 쓰고 시인이 되는 건 축하해 줄 일이나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 모국어가 수난을 당해서는 안되리라. 적어도 시인이라면 가수라면 농부라면 그 덕목에 준하는 어느 정도의 소양과 지식을 겸비해야 하리라. 그게 이 사회를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데 한 몫하는 일 아니겠는가.
◆공영구 시 <징검다리>
지난 『 대구문학』(2010. 1,2월호)에서는 대구문학상 특집 관계로 시가 그리 많이 수록되지는 않았던 걸로 생각되는데 적은 분량이었지만 찬찬히 읽어보았다.
먼저 공영구시인의 시 <징검다리>가 돋보였다.
그곳에 가면
야릇한 소리가 난다
새파랗게 언 손 비비며
잘난 체 걷던 걸음걸이
돌덩이 하나에 머뭇거린다
가로질러 가고도 싶고
두 칸 건너 뛰고 싶어도
허락 안하던 엄마처럼
언제나 제자리 지키는 침묵의 소리
벌거벗은 나신 앞에
벌어진 다리 애써 감싸는 강물
이끼 낀 여울의 묵 쉰 소리
시건방진 년놈들아
벗은 다리만 보면 왜 모두 허등대나
ㅡ공영구 시 「징검다리」전문.
이 시를 면밀히 보면 그냥 쓰여진 향수의 시가 아님을 알수 있다. 징검다리를 통해 본 유연시절이 라기 보다 '이끼 낀 여울의 묵 쉰 소리'가 그것인데 징검다리에 대한 비유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읽힌다. 시인에게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징검다리가 '엄마처럼' 그리워지지는 대상인지 모른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징검다를 두고 '야릇한 소리가 난다'고 했으며, 엄마에 대한 향수를 징검다리에 비유해 '가로질러 가고도 싶고 / 두 칸 건너 뛰고 싶어도 / 허락 안하던 엄마처럼 / 언제나 제자리 지키는 침묵의 소리'로 의미있게 구가했다. '잘난 체 걷던 걸음걸이 / 돌덩이 하나에 머뭇거린다' , '가로질러 가고도 싶고 / 두 칸 건너 뛰고 싶'은 것이 어린날 시인의 자화상으로 얼비친다.
◆이태수 시 <물거품>
이태수시인의 시 <물거품>도 주목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파도가 더딘 걸음으로 밀려온다
저물녁의 바다,
어선들이 드리웠던 그물들을 다 끌어올렸는지
수평선 위의 노을을 뒤집어쓰고 돌아온다.
괭이갈매기들도 해종일의 길들을 모두
거둬들였는지, 다 놓아버리고 말았는지,
날개 접고 등대 앞 바위섬에서 노닐고 있다.
ㅡ이태수 시 「물거품」에서.
이 모두가 굽이진 인생노정에서 돌아온 세계라할 수 있는 한 폭 수채화가 아니겠는가. 저녁바다의 풍경이 비록 쓸쓸키도 하지만 넓은 가슴으로 안겨오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연에서 구체화 되어 나타나는데 '난바다를 떠돌다 여기까지 떠밀려온 마음은 / 바위에 부딪혀 허옇게 부서지는 물거품'으로 삶에 대한 무상함이 배어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끌어당길 수 없듯이 '수평선 너머 아득한 외딴섬 / 제홀로 푸르러지는 / 한 그루 소나무'는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정신적 정점인지도 모른다.
◆정훈 시 <兩水에 서서>
정훈시인의 시 <兩水에 서서> 역시 인간이 살아온 인정노정 그 끝간데쯤 다와 있는 것 같다.
흘러온 강물의 끝자락 휘돌아 바다로
가는 양수에 서서
우리, 부초의 나날을 더듬어 보네
나 오늘 박토에 뿌리 내린
바람과 맞서 온 나무라 여겼음도
강기슭에 매인 작은 거룻배의 위안도
걷잡을 수 없는 萬化의 바다
노도의 파편 앞엔
가랑잎같은 편주임을 눈내리니 알겠네
정 훈 시 「兩水에 서서」에서.
이처럼 명징하게 다가온다. 그것도 배경설정이 돋보이는데 눈이 내리고 있는 날인 것이다. 일찍이 나의 스승이신 고 박재삼시인은 시를 쓸 때 언어를 적재적소(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시인이 눈 내리는 날 땅끝마을에 갔기 때문에 눈이 내리고 있는 날이 자연스럽게 나왔는지는 몰라도 한 편의 시가 갖는 매력이나 울림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눈 내리는 날이 아니라 비내리는 날이라면 어떨까, 나름대로의 맛은 나겠지만 인생사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서정주 시 <푸르른 날>에 잘 나타나 있음) 눈이 내리고 있는 날이 더욱 효과적이이라. 비 내리고 있는 날이라면 삶에 대한 무상쪽 보다는 슬픔, 연민쪽에 가까우리라. 살아온 삶의 두께 만큼 시인의 사상성도 깊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시는 풀어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러나 전혀 문장이 풀리지 않는 마력을 지닌 것 같다. 그 예가 '바람과 맞서 온 나무라 여겼음도', 그리고 '눈내리니 알겠네'이다. 산문에 가까우면서도 산문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나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구가된 문장이다. 어떤 이는 서정주의 시 <신부>를 두고도 아직도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하는데 산문문장과 시적인 문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시인은 '돌아서 가라 / 땅끈 물끝 돌아서 가라'고 희구하고 있으나 인생사가 참 많이 멀어온 길임엔 어쩌랴.
◆황태면 시 <이 새의 동성로>
대구문단에서는 생소한 이름 같은데 황태면시인의 시 <이 새의 동성로>가 의미있게 읽혔다.
이 시대의 동성로
후미진 길의 판자집, 안에는
땀 흘리는 사내와
땀 받는 여자가, 신천에는 낙엽들이 뒹글고 있다
얼어붙은 크레믈린궁에는 수많은 음모들
서로 찌르고 찔리고
벗겨지는 음모로
사내의 눈은 충혈에 젖는다.
세월이 지난 이 시대
동성로에는 아직도 예전의 즐거움이 남아있다. 사내는
여자는 남국을 꿈꾸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ㅡ황태면 시 <이 새의 동성로> 에서.
지금은 잊혀져 가는 동성로의 옛 풍정을 끌여내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젊은 날의 혈기가 대구의 중심지 동성로를 풍미했던 것 같다. 지금도 '동성로돼지불고기'는 그 이름을 뽐내고 있는데 이처럼 '땀 흘리는 사내와 / 땀 받는 여자'로 잘 대비시키고 있는데, '사내의 눈은 충혈에 젖'고, '여자는 남국을 꿈꾸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동성로 판자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고 없는 날들은 감미로기만 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도 '이 시대의 동성로 / 후미진 길의 판자집이 있다'고 강조 하고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가고 없는 젊은 날의 감미로운 시간이 그리운 것이리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리라.
◆윤경희 시 <만월(萬月)>
여성시인으로는 윤경희시인의 시 <만월(萬月)>이 돋보였다.
저 男子! 도둑같은 저 男子
바람도
다 재워두고
불 꺼진 창문 너머
커튼 다 들추고선
넌지시 훔쳐 보고 있는 이 봄날의 저 환장할 놈.
ㅡ윤경희 시 <만월(萬月)>전문.
왜서(연변 말투), 남자를 도둑같다고 했으며 거기다가 환장할 놈이라 했을까. 저주의 대상이란 말인가. 아니면 숱한 남자들로부터 주목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온 터라 넘쳐나서 이제는 꼴 보기 싫다는 건가? 아니지 아니란 말야.
이 시를 잘 보면 고도한 상징성을 띄고 있는게 아주 돋보이는데 역설적 의미가 그것이다. 보름달이 말야 충만한 얼굴로 조금도 빈 구석 없는 완벽한 남자로 보였던 거야. 원래 여자는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는 것에 탄복해 다 좋게 보이지 뭐. 나중에 가서는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될지라도. 하여튼 이러한 보름달이 혼자 사는(작품속의 분위기를 볼라치면) 여자의 창문 밖에서 혼자 자려다가 잠 안오는 여자의 잠옷차림으로 누워 있는 걸 지금 훔쳐보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문제는 홈쳐보고 있다는게 날강도가 아니라 신비스런 우주의 달이니, 그것도 그냥 달이 아니리 꽉 차서 탱탱한 만월이니 훔쳐본다 해서 무서울게 없고 기분 나쁠게 하나도 없지. 그걸 시인은 역설적으로 저주의 대상이 아니면서 은근히 저주의 대상처럼 설정해서 도둑같은 남자느니 환장할 놈이라 했을거다 이 말이다. 이 심정을 저 만월이 알고 있을까나.
또한 봄은 여자의 계절이며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통념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면, 이 시가 비록 가을날 달밤에 쓰여졌다 하더라도 '이 봄날의 저 환장할 놈' 같이 봄날의 달밤이 더윽 효과적인 작용을 하리라 보는 필자의 견해인 것을 어쩔 수 없다. 앞에서 정훈시인의 시 <兩水에 서서>에서 '가랑잎같은 편주임을 눈 내리니 알겠네'라고, '비 내리니'가 아닌 '눈 내리니'가 되었으니 훨씬 더 시적 분위기와 합일될 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안성마춤으로 고조되듯이 말이다.
또한 만일에 이 시가 밤하늘의 만월, 즉 보름달이니까 다행이지 보름달이 아닌 조각달, 반달이었다면 감동이 덜 할 뿐만 아니라 그냥 훔쳐보는 걸로 그쳤을 것이다. 조각달이나 반달이었다면 시의 구조는 바뀌어 시인 자신의 허허로움이나 외로움을 조각달에 비유하는 수법으로 몰고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박재삼시인은 일찍이 시를 쓸 때 언어를 적재적소(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2010년 3월 11일 오전 8시 7분, 시산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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