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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화제 ○○
서지월시인, 35년만에 모교 초청 '나와 대륜, 그리고 민족정서' 문학강연 개최

◇ 민족서정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서지월시인은 오는 8월 28일(금) 오전 9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대구 대륜고등학교 대강당에서 대륜고 학생 1200명 대상으로 이뤄지는「서지월시인 초청 '나와 대륜, 그리고 민족정서' 문학강연 및 시인과의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서지월시인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5년만에 모교에서 문학강연회 가지는 뜻있는 자리로 대륜고등학교는 일제치하때 '광야'의 이육사시인이 그 출신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시인이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으며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시인이 교장을 역임한 민족숨결이 강하게 배어있는 대구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강연요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서지월시인은 평생을 전업시인으로 시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시인으로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인이 되기를 꿈꾸어 왔으며 40년 세월 하룻밤도 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한국시인으로서는 유일하다시피 중국 만주대륙을 9차례나 밟으며 웅혼한 민족기상을 시로 승화시켜왔는데 그 열정과 저력을 이번 강연에서 샅샅이 밝혀줄 예정이다, 중국 동북공정에 의해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홀승골성 서성산이 광개토대왕비에도 새겨져 있는데 중국 역사현장 표기로 오녀산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오천년 우리 민족 젖줄의 강인 비류수마저도 중국표기로 혼강으로 바뀌어져 있는데 대한 통탄의 심사를 피력한다. 서시인이 무더운 여름날 저녁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세운 만주 환인땅 비류수에서 초승달을 바라보며 느낀 역사비극에 대한 감회라든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땅 압록강에서 멱을 감았던 추억담 등을 들려준다.
또한, 서지월시인은, 시인의 사명이란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이 투철해야 올바른 그 나라의 모국어 시인이라는 것이다. 외래문화가 난무하고 고유한 것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시대 시인으로서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소신도 밝히고 읽는데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며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라 한다.
<삼족오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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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월시인,대륜고등학교 문학강연 자료]
나와 대륜,그리고 민족정서
서 지 월
내가 대륜학교를 다닐 때가 지금부터 35년전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전교조례시간 교장선생님께서 오히려 다른 학교의 교훈을 소개하시면서 <순간적인 감정에 살지 말고 큰 흐름의 나를 찾아라>가 그것이었으며, 중학교 2학년때 영어시간이었는데 영어선생님께서 칠판에 미당 서정주 시 <동천>을 써놓으시고는 혼자 중얼거리시고는 지워버리시는 거였다. 그 당시는 그게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었다. 또 하나는 과거 대륜학교 한솔 이효상 교장선생님께서 국회의장이 되어 서울에 가 있으면서도 <그대 대륜아, 잘 있는가>라는 시를 남겼다는 것이었는데 시인이 되고자 갈망했던 나에겐 굉장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평생을 문학해 나가는 내게 지대한 정신적인 자양이 되었다.
내가 시인이 되고나서 안 일이지만 1930년대 시인 백석은 당시 평안북도 오산중학교를 다녔는데 오산중학 선배가 김소월이라는 시인이라는 걸 알고서 시인이 되고자 꿈꾸었다 한다. 김소월은 다 아는 바와 같이 가장 널리 시가 애송되는 한국시인이지만 백석은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대표적인 북한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제치하 우리 민족의 북방 유랑정서를 가장 잘 살려낸 시로 <남신의주 유동박씨봉방>이 있는데 신의주로 가서 8.15 해방 이후 만주로 갔다 하나 행방불명이 되어 작고한 것으로 매김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북한에 남아있다가 아오지탄광으로 유배가서 수십년을 집단농장 생활을 하다가 1995년 83세에 작고했다는 신문보도가 나와서 문단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나는 대륜즁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시단에서 시인이 되어 활동하다가 35년만에 서지월이라는 필명으로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 앞에 선 것인데 이 보다 더한 감개무량이 어딨겠는가. 반면.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께서는 한 분도 아니 계시고 한두 분이 고령의 나이로 계실 뿐 거의 대부분 세상을 떠신 걸로 아는데 참으로 인생무상을 느낀다.
어쨌든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5년이 되었으니 강산도 여러 번 변했고 나도 늙어가고 있다 하겠다. 나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인이 되어야 겠다는 꿈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는데 방과후면 도서관에 가서 많은 시집을 읽곤했으며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더욱 열심히 문학에 열성을 가지되었는데 바로 그때 김소월같은 시인이 되겠다고 열망했던 것이다.
내 본명이 서석행인데 그래서 필명도 김소월(金素月) 비슷한 서지월(徐芝月)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이야 바꿀 수 없잖은가 말이다. 그 이후 시인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내 필명 서지월에 대해 이러러한 말을 화제로 많이 퍼내기도 했는데 내가 바라는게 민족서정시인이 되는 꿈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김소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사랑시를 주로 썼는데 그러한 대표적인 사랑시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내 사랑
서 지 월
길을 가다가도 문득 하늘을 보다가도 문득
지금은 안 보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이 하늘 아래 꽃잎 접고 우두커니 서 있는 꽃나무처럼
내 생각의 나뭇가지는 서(西)으로 뻗어 해지는 산능선쯤에 와 있지만
밥을 먹다가도 문득 다른 길로 가다가도 문득
안 보면 그뿐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이 시는 서울특별시가 주관한 <시가 흐르는 서울>에 선정되어 서울 신림역 지하철에 붙여져 있다 한다. 길손들에게 음미해 보라는 듯 말이다.
특히, 나는 어릴적부터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대륜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통학을 했는데 자연이나 토속정서를 주로한 서정시가 내 시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토속서정시를 주로 써왔는데 이제와서 사람들은 이런 한국적인 토속정서 내지는 전통정서를 노래하는 시인이 잘 없고 보면 나를 한국시단에서는 마지막 서정시인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2001년 4월 4일 중앙일보에 소개 된 시가 한 편 있는데 그게 한국시인협회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노래한 시인으로 나를 선정했는데 달성군 비슬산자연휴양림에는 그 시 <비슬산 참꽃>이 시비로 세워져 있기도 하다.
더 나아가면 어느날인가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릴적부터 늘 흠모하고 그리던 압록강 위 만주땅을 밟게 되었는데 감회가 깊었던 것은 두말 할 나위없다. 만주땅을 9차례 다녀왔는데 맨 처음 친구따라 강남 간 것이 1999년의 일이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신의주 맞은 편 중국 항구도시 단동에 내렸는데 그때 나는 압록강을 처음 만났으며 고려말 이성계가 말발굽을 돌려 조선을 건국한 계기가 되었다는 압록강상 위 위화도를 보고 왠지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역사의 현장을 살아있는 듯 목격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단동에서 허룻밤 자고 이튿날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무려 6시간 10분에 걸쳐 압록강을 거스르며 산 넘고 물 건너 당도한 곳이 바로 환인이라는 도시였다. 난생 처음 꿈속을 찾아온 듯 했는데 싱싱한 고등어등어리 같은 짙푸른 강물이 도시를 휘감고 흐르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게 우리민족 고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비류수였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그 강가에에서 해지도록 앉아있었는데 초승달이 하나 떠오는 것이다. 이 초승달은 한국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는데 나는 그 초승달을 보는 순간 대고구려의 혼이 내가 왔다고 반기는 것 같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쓴 시가 바로 첫 만주기행시로 <비류수에 와서>이다.
비류수에 와서
서 지 월
주몽이시여 그대 꿈결의 초승달 하나 그대 2천년 꿈의 머리맡 돌아 비춰오시니 어찌하오리까 벌써, 다 먹어버린 밥그릇처럼 이 땅은 남의 것이 되었으며 이 강 역시 우리의 말(馬)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었음을 아시오니까 2천년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시매 누가 이를 증명하며 부싯돌에 칼을 갈아 저 천공에 번쩍이오리까 주몽이시여, 머리부분 빼앗기고 허리마저 동강나 그 동강난 두 다리 이끌고 천만리 길 마다하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왔건만 조금만 쉬어가라며 이 땅의 새 주인은 비자만 한 장 달랑 손에 쥐어 주더이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흐르는 눈물 닦을만한 손수건도 없이 저 달이 차오르는 것마저 몇날 며칠 지켜보지 못한 채 어디로 저를 가라 하는지 아아, 주몽이시여, 어찌하오리까!
바로 그 강가에 병풍처럼 두른 우똑 솟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우람하기 그지없고 장엄하기가 천하일품이었다. 말하자면 바로 고주몽이 대구려를 건국한 산정 오녀산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는데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곳이 이곳에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오녀산 정상을 오르 남아있는 것이라곤 맷돌 하나밖에 없고 소나무와 풀들이 돋아 아우치고 있을 뿐이었다.
오녀산마저도 중국역사의 유래에 대한 표기로 바뀌었다는 것을 뒤에 알게 되었는데. 집안땅의 광개토대왕비에는 엄연히 우리민족의 강으로 홀승골성 서성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중국 역사왜곡에는 분통이 터진다. 위의 5천년 우리 민족의 젖줄의 강인 비류수도 중국표기로 혼강으로 바뀌어져 있다.
나는 1955년 은5월 5일 단오날 태어났는데 시를 열심히 써 오다 보니 대고려를 건국한 고주몽도 연개소문도 다 나하고 같은 날 태어난 것을 알게됐다. 그래서 내가 문학뿐만 아니라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로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민족과 역사 앞에 문학이 존재하며 시인의 사명은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이 투철해야 올바른 그 나라의 모국어 시인이라는 것이다. 일제시대 대륜학교(교남학교)를 다녔다는 이육사의 시 <광야>나, 대륜학교(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이상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보라. 우리 대륜의 자랑이며 우리 민족의 긍지가 아닌가.
나는 전업시인의 운명으로 살아왔는데 참으로 많은 시를 써왔으며 수많은 만주기행시를 남겼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숨결 그리고 벋어나아가는 대한민국의 역사 앞에 시인이 남길 것이라곤 웅혼한 민족기상과 전통의 뿌리를 시로 승화시켜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민족정신과 전통사상은 불변의 진리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늘 휘돌고있으니 말이다.
끝으로, 즉 우리민족이 살아온 삶을 노래한 그러면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한국의 달빛>이라는 시를 한 편 소개한다.
한국의 달빛
서 지 월
쟁반 위에 놓여져 床을 받치고 더러는 바람부는 청솔가지 솔잎 사이로 물소리 흩뿌리는 수작을 걸면서 억겹 산을 넘어 지름길로 오는구나.
玉돌이야 갈고 닦아 서슬이 푸른 밤 싸늘한 바위 속 어둠 밝히며 쟁쟁쟁 울려오는 은쟁반 소리 은쟁반 위의 거문고, 바람이 흉내내는 나의 파도소리…….
옛날엔 이런 밤 홀로 걸었노라. 걸어서 거뜬히 몇 십리도 갔노라 짚세기 신고 돌담길 세 번쯤 돌아 모시적삼 남끝동 임을 만나고 수줍어 돌아서는 강물도 보고 손 포개고 눈 포개고 달빛 또한 포갰노라.
창망히 멀어져 간 수틀 위 꽃밭과 애달피 구슬꿰는 피리소리가 시렁 위에 얹혀서 돌아올 때면 쑥국쑥국 쑥국새는 숲에서 울고 칭얼칭얼 어린것은 엄마품에 잠든다.
이 시는 과거 우리 어머니들이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대청마루에 나와 달빛이 난무한 속에서 밖을 내다보는 기다림의 정서를 읊은 작품이다.
덧붙이자면 나의 생활신조는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며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다. 가훈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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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시인 약력]
• 1955년, 고주몽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371번지에서 태어남. 본명 서석행(徐錫幸), 아명 건식(巾湜). • 가창초등학교,대륜중 고등학교를 거쳐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 1985년 10월, 제2회「전국교원학예술상」문예부문에 시 <꽃잎이여>로 大賞에 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 1985년 12월, 고 박목월시인이 창간한 시전문지『심상』신인상에 시 <겨울 信號燈>외 3편 당선. • 1986년 6월,『아동문예』신인문학상 동시 <바람에 귀대이면> 외 4편 당선. • 1986년 8월,『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시 <朝鮮의 눈발> 당선. • 1993년, 제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 1998년, 제1회「한하운문학상」본상 수상. • 1999년,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수혜시인에 선정됨. • 2000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주관「正文文學賞」수상. • 2002년, 한국시인협회 주관 중국 서안-돈황 '실크로드 아시아시인대회' 참가. •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 • 2003년, 중국 연길 한국정지용시인 국제세미나 참가 등 9차례에 걸쳐 만주땅 전역을 답사함 . • 2005년, 일본 최대 詩잡지「지구」詩 초청으로 도쿄 아시아환태평양시인대회 참가. • 2006년, 시 <건들바위>, <울릉도 섬말나리꽃>, <영양고추> 등이 창예술가곡으로 작곡 되어 불리워짐. • 2006년, 대구 MBC 문화방송 노래 <달구벌의 빛과 소리>가 가곡으로 작곡됨. • 2006년, 한국전원생활운동본부 주관, 詩碑「신 귀거래사」가 영천 보현산자연수련원에 세워짐. • 200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50주년기념 향토적인 삶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인으로 선정됨. • 2007년, 달성군 주관, 한국시인협회 MBC KBS 등 후원으로 詩碑「비슬산 참꽃」이 비슬산 자연휴양림에 세워짐. • 중앙일보「한국을 움직인 인물들」,조선일보「국내 주요인사 인물정보 BD」,문화일보「문화예술인 BD」,연합뉴스「한국 주요인물」에 선정됨. 불교TV방송국『불교인명대사전』에 수록됨.『韓國詩大事典』에 수록됨. • 국제펜클럽·한국문인협회·한국시인협회 회원(중앙위원)·한국아동문학인협회·한국동시문학회 ·아동문예작가회 회원.대구문인협회(외국문학 분과위원장) 및 대구시인협회 회원. <낭만시> 동인으로 활동. • 현재, 한중공동 시전문지『해란강』한국측 편집 주필. 만주사랑문화인협회 상임고문. 한중문예대학 및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시집■
¤『꽃이 되었나 별이 되었나』(1988, 나남출판사) ¤『江물과 빨랫줄』(1989, 문학사상사) ¤『가난한 꽃』(1993, 도서출판 전망).대구시인협회상 수상시집.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1994, 시와 시학사) ¤『팔조령에서의 별보기』(1996, 도서출판 중문),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우수시집으로 선정됨. ¤『백도라지꽃의 노래』(2002, 중국 요녕민족출판사),(중국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2003,천년의 시작),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시집으로 선정됨. ¤동시집『휘파람나무』(1987, 아동문예사. 공저). ¤『한국아동문학선집.권42』에 동시가 수록됨(계몽사).
[연락처]
(우)711-860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78, 시산방 내, 徐芝月(시인) ¤전화:(053)767-5526 011-505-0095 ¤이메일: poemmoon55@hanmail.net ¤홈페이지: http://poemtree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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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만주땅에서 배운 것

[주말에세이] 만주땅에서 배운 것

서 지 월 (시인)
남북 합친 한국땅의 여섯배나 되는 만주땅에서 아직도 오천년 역사의 멎은 말발굽 흔적이 남아있다. 인걸은 간데 없어도 산천은 그대로라는 말 다름아닌 것이다.그곳에 가면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뿐만 아니라 목단강 그리고 만주땅 최북단으로 러시아땅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7천리 흑룡강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1600년이란 세월을 묻어 지내다가 일본인에 의해 먼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대한 광개토대왕비가 그러하거니와 우리 대구가 본향인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의 서예가로 알려진 서동(徐同)의 붓글씨도 조선민족 문화단체.출판사.언론기관의 입간판으로 웅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구려가 고려로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을 지칭하는 코리아로 자리매김된 만큼 만주땅은 고대 단군조선 이래로 우리 민족의 본거지라는 건 익히 다아는 사실이다.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받들어온 것과 무관하지 않으나 중국측에서는 지명상으로도 장백산으로 불리우는 한낱 하나의 관광지로 여기는게 그들일 따름이다압록강 하류인 신의주 맞은편 중국 항구도시인 단동에서 시외버스로 산넘고 물건너 거듭거듭 여섯시간 정도 점심마저 거르고 가다보면 환인이라는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푸른 강물이 쪽빛 옥양목을 펼쳐놓은 듯 일렁이는 눈부신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 강이 삼국유사에 보이는 비류수라는 걸 뒤늦게서야 알고 그만 까무라칠뻔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너머 병풍처럼 우뚝 솟은 깎아지른 절벽 그 산정(山頂)의 위용은 어디에 비길까. 바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역사는 변천을 거듭하여 중국인민 다섯 여장군이 그 성을 사수하다 장렬한 죽음을 감행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알고보면 주몽이 북부여땅(지금의 길림)을 탈출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수를 따라서 정착하여 22세때 세운 고구려 도읍이 평지가 아닌 깎아지른 그 산정인데 천년풍우에 흔적없이 씻겨간 듯 이제는 늠름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현장으로 뒤바뀌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집안땅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시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홀승골성 서성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도 똑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걸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세계적 명칭인 코리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더 거슬러 오르면 고구려 그 발생근원지이고 보면 그게 남의 땅이 돼버렸으니 우리의 고향을 잃어버린 셈이 되며 족보마저 뒤바뀐 경우가 그것이다.
일찌기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는 신령스런 산이기도 하거니와 한 핏줄인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땅인 고구려 도읍지가 잊혀져 가고 있다는 사실 말고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백두산만을 가지고 노래해 왔는가 하면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제사에 쓸 돼지가 그만 달아나는 바람에 그 돼지 잡으러 뒤따라가다 만난 집안땅이 비옥하다고 해 도읍을 다시 옮긴 집안땅만 밟고 관광지처럼 여겨오는 오늘날의 현실이고 보면 씁쓸한 입맛 더해지니까 말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아직은 우리의 것을 되찾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항용 담아두어야 할 일이거늘, 지명은 중국식인 오녀산성으로 굳어져 왔지만 비류수(지금의 혼강)와 함께 우리 민족 코리아의 발상지라는 것쯤 알고 지나가는 것이 덜 쓸쓸하지 않을는지!
온 만주땅을 굽어보며 대호령하듯 우뚝 솟아있는 오녀산성이야말로 백두산보다 더 위풍당당하게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더라는 것이다.
- 2001년 06월 09일 -
[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압록강에 멱을 감다

[주말에세이] 압록강에 멱을 감다

서 지 월 (시인)
내가 만주땅을 처음 밟게된 것은 1998년 여름이었다. 인천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시속 30킬로미터의 ’동방명주’호에 몸을 싣고 무려 10시간에 걸쳐 서해를 밤새도록 거슬러 올라가 도착한 곳은 단동이었다. 단동은 압록강 최하류에 위치한 중국 항구도시로 강 건너 마주 바라보이는 도시가 바로 북한의 신의주였다. 강가에 나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북한 풍경의 전부였다. 처음 밟은 땅인 만큼 강변로를 산책하다 보니 섬이 하나 평원처럼 떠 있었는데 위화도라는 말을 듣고 묘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곳 단동에서 다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6시간에 걸쳐 도착한 땅이 환인이었다. 산굽이 물굽이를 수십 번 돌고돌아 마지막 산굽이를 넘어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을 때, 차창으로 시가지 한복판을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등어의 푸른 등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혼강, 바로 비류수였다. 비류수라면 고주몽이 남하하여 정착한 곳으로 우리 민족 고대 역사의 강으로 각인된 이름 아니던가. 시가지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그 비류수 너머로 웅대한 산봉우리 하나 병풍처럼 솟아 올랐는데, 알고 보니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도읍인 오녀산성, 즉 홀승골성 서성산이었다.
해가 기울어 산정(山頂) 오르는 것은 이튿날로 미루고 비류수 강가에 앉아서 어둑어둑할 때까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강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난간 위로 초승달이 배시시 웃으며 낯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역사에서 배운 비류수와 주몽과 고구려가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잡초 무성한 이 땅이라니.... 훈훈한 땅의 기운이 남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튿날 오녀산성을 올랐다. 창검과 북소리 말발굽소리 대신 이름모를 바람결만 잎새를 흔들고 있었다.
오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비류수의 풍치 또한 절경이었다. 끝없는 만주벌판과 발 아래 어깨 겯은 산맥들이 줄달음쳐 와 멎어있는 풍경은 이 오녀산의 위용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검은 까마귀들만이 1천600년전 고분벽화에서 다시 살아나와 빈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대고구려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성을 내려오는 데도 푸석한 잔돌들만 무심한 발길과 마주칠 뿐이었다.
이곳 환인에서 다시 3시간 남짓 택시를 타고 비류수를 따라가 보았는데, 이 길 또한 예사의 길이 아니었다.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를 우리에서 꺼내다 그만 놓쳐버려 그 생돼지가 도망쳐 간 길을 뒤따라가 멈춘 곳, 바로 집안땅이라 했다.
환인에 비해 땅이 비옥하고 평야지대였으며 앞쪽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생돼지를 잡으러 왔다가 발견한 그 명당으로 고구려 유리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었다.
3시간에 걸쳐 2천년 전 그 생돼지가 도망쳐 달아간 길을 따라가니 ’국내성’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때서야 이곳이 고구려 제2의 도읍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얼른 여관에 짐만 내려놓고 멱 감으러 강가로 나갔는데 어느새 어둠이 사방을 엄습하고 있었다.
나는 걸친 옷 홀랑 다 벗고 강물에 온몸 담구어 멱을 감았다. 지난밤 비류수 강물 위로 떠올랐던 그 초승달이 찾아와 다시 압록강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워 내 팔둑을 손톱으로 꼬집어 보았다.
머나먼 압록강에 와서 내가 멱을 감고 있다니.... 실감나지 않는 현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줄곧 들어만 왔던 상상의 강물 속에, 역사의 강줄기에 내가 온몸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었다. 대구에서 온 가난한 시인의 몸을 받아준 압록강. 역시 우리 민족의 강이었다. - 2006년 0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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