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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에 적합한 한국서정시 모음입니다.

아미산월 2010. 1. 23. 05:30

##낭송에 적합한 한국서정시 모음입니다.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http://cafe.daum.net/?t__nil_head_right=cafe'낭송시 모음'에서)

 

꽃이 핍니다

 

서 지 월

 

우리가 아롱다롱 살아가면서
죄짓고는 못 산다고 꽃이 핍니다

 

검은 마음 검은 꽃은 없어도
전생에 노랑저고리였던 개나리
다홍치마였던 진달래꽃에 이어
보랏빛 머리칼이었던 라일락에 이르기까지
산에서 들에서 골목에서 집안에서
피어나는 꽃, 꽃들

 

저대로는 참한 얼굴들 하고
가릴 것 없이 숨길 것 없이
부귀도 공명도 자존도 엄포도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너 나 할 것없이 복되게 살자고
햇빛하고 친구 되고 바람하고 친구 되어
맑은 향기로 술 담그며
푹 젖어옵니다

흐르는 구름 내버려두고
굽이치는 江물 내버려두고
죄짓고는 못 산다고 죄짓고는 못 산다고
과욕일랑 바다 멀리 밀어내어버리고


오직 한 마디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열번을 속삭여도 침마르지 않는
꽃이 핍니다

 

+++++

 

 

둥근 밥그릇의 노래

서 지 월


우리가 오천년을 먹어온 밥그릇 앞에
지금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늘도 따뜻한 밥 한그릇 받고 있으면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보리밭 길을 가아자......」
겨울을 나는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동구밖에서 들려오고

늘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 먹고 자란 둥근 밥그릇 위에
먼 산이 다가서 비치고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날아와 깃을 칩니다.
또다시 푸짐한 밥 한 그릇 받고 있으면
「해야해야 나오너라 김치국에 밥 말아먹고
장구치고 나오너라......」
더운 여름날이면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골목에서 들려오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들이 실컷
먹어온 밥그릇 주위를 빙빙 돌며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밤낮 할것없이 사시장철 우리들을 두루 비추어 온
해와 달 그리고 별
둥근 하늘아래, 북 장구 꽹과리 징 상모
그 어느 것 하나 둥글지 않은 것이 없듯이

우리가 오천년을 먹어온 둥근 밥그릇 속에 김이 오르고
길을 가는 소달구지는 팔조령 재를 넘었습니다.

 

+++++

 

 

바지랑대 옆에서

서 지 월


천년이란 세월을
바람으로 이고 선
굳굳한 나무가 있습니다.


죽어 죽지 않고
나무꾼의 등짐같은 뜨거운
땀의 범벅이 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민들레 꽃밭에서
해종일 뛰놀듯
파아란 도화지 한 장 같은 하늘 위
날으던 정령들이
여기 앉아 쉬곤 합니다.


이승과 저승 두 갈림길의
끝이랴 싶은 두 가지 사이로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하늘을
받치고 있습니다.


멸망할 듯 멸망하지 않는 사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상의 빨래들이 무수히
그 줄 위에 얹혔다 사라집니다.
해와 달 비 구름 별들도 그 줄을
넘나듭니다


줄이 늘어지는 무게보다
당겨지는 침묵이 생명을 지탱합니다.
아무래도 바지랑대 보다 높은
우리의 천국은 없을 겁니다.


습기 묻은 바람이 한두 차례 지나가고 나면
온몸을 도사리고 빨래들도 걷힙니다.
아득히 먼 하늘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목청이
남새밭 너머 푸른 산이마에서 들릴 때면
어느새 산그늘이 내려와
이불처럼 우리의 일상을 덮습니다.


별들도 내려와 뒷산 숲에서
지상의 아름다운 꿈을 깹니다.
천년이란 세월을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마당을 딛고 선
굳굳한 나무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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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좋은 날

 

서 지 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땐들 우리가 한 식구 한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 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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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서 지 월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달뜨는 마을을 달려와 내가 먼저 손 내밀면
너는 수줍어 은쟁반같은 얼굴로
나뭇가지 뒤에 숨어버리고
너와 나의 살을 건드리는 남풍의 하늘은
속절없이 빤히 내려다 보고만 있으니

바둑이는 어디 갔느냐
엄마따라 방앗간에 밀 빻으러 갔는가.
그리고, 내 어릴적 검정고무신의
피라미떼들은 큰 강물따라 흘러갔는가.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타는 아지랑이 풀밭에 주저앉아
삐삐 뽑으며 숨찬 나를 불러내어
이 언덕위에 세워놓고서
저만치 눈웃음 흘리며 사라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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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서 지 월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강으로 나와 흐르는
물살 바라보든가, 아니면
모여있는 수많은 돌멩이들
제각기의 모습처럼
놓인 대로 근심걱정 없이
물소리에 귀 씻고 살면 되는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강 건너 언젠가는 만나도질
사람 그리워 하며 거닐다가
주저앉아 풀꽃으로 피어나면 되는 것을


말은 못해도 몸짓으로
흔들리면 되는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혼자이면 어떤가
떠나는 물살 앞에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 것을


모습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모두가 우리의 분신인 것을

 

산다는게 뭐 별것 있는가
하늘 아래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목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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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이의 홍시

 

미당 서정주

 

대구의 시인 서지월(徐芝月)이가
"자셔 보이소" 하며
저희 집에서 딴 감을 가져왔기에
보니 거기엔
山까치가
그 부리로 쪼아먹은
흔적이 있는 것도 보여서
나는 그걸 골라 먹으며
이런 논아 먹음이
너무나 좋아
웃어 자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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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月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서 지 월

 

하이네도 좋고 릴케도 좋고
바이런도 좋고 구르몽도 좋지만
우리의 산에서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우리와 같이 눈물 흘리며 핍박 받아오던 시대의
素月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붉은 목젖의 피어 헝클어진 진달래꽃 다발 안고
북녘 어느 소년은 南으로 南으로
내려오고 있는가

흰옷 입고 자라고 흰 창호지빛 문틈으로 세상 엿보고
동여맨 흰수건 튼튼한 쇠가죽북 울리며
예까지 흘러왔건만
소월의 산새는 지금 어디쯤 날아간 묘지 위에서
점점이 멀어져간 돌다리와 짚신과 물레방아와
자주댕기 얼레빗......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섬돌밑에 잠드는가

그리운 백도라지 뿌리 깊이 내리여
천길 땅속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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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의 노래

 

서 지 월

 

우리가 먼 길 가는 바람 앞에서
늘 배웅하는 자세로 흔들린다면
흐르는 시냇물도 제 갈 길 따라 가겠지만
가서는 오지 않는 이름들이 가슴에 남아
밤이면 무수한 별들의 재잘거림으로 높이 떠서
이마 위에서 빛날 일 아니겠는가

 

심지어 때아닌 먹구름장 겹겹이 몰려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위협할 때도
땅에 뿌리박고 사는 죄 하나로
흠뻑 비 맞고 놀라 번뇌의 세상 굳굳하게 견뎌낸다지만
표석처럼 지키고 선 이 땅의 이름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먼 길 재촉하는 구름이나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귓전에 사무쳐 오지만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며 스스로의 잠언을 풀어내는
몸짓 하나로 남아서
모두가 떠나도 떠나지 않고
푸른 손 휘저으며 여기 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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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레바퀴는 굴러가서는 돌아오지 않는가

 

서 지 월

 

왜 수레바퀴는 굴러가서는 돌아오지 않는가
한참을 생각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두 송이의 꽃과 두 개의 찻잔을 마주하고
내다보는 창밖 눈은 내리고
기별없이 눈 내리는 소리


지금 어디메쯤 언 땅을 딛고
내 마음 천년 수레바퀴는 포로의 강을 지나
어느 잡목숲을 굴러가고 있는가


비운 찻잔을 놓고
마주앉은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본다
바람이 분다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라지만 난로가 없고
저 유리문이 없다면
들짐승과 다름없다는 생각에
왜 굴러간 수레바퀴는 시간의 기름을 치고
돌아오지 않는지


옷깃을 세우고 우리가 일어날 즈음
눈은 멎고 깜깜한 하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두 힘의 수레바퀴는 지금
한짐 가득 눈뭉치를 싣고 더욱
미끄럽게 미끄럽게 이 세상 끝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도 그처럼 가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미끄러운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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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작으로 사랑하려면

 

서 지 월

 

산다는 것은 어찌보면 아침이슬과 같다
발가벗은 채 영롱히 빛나더니만
어디론가 흔적없이 사라져

옷가지 하나 남김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머금은 조약돌처럼이야
매양 지낼 순 없다 해도

찬란히 틔어보이는 햇빛이나 꽃처럼 살 수 없을까
날 흐리고 비 퍼부면 자취없이 숨어버리는
새들이나 그리운 이의 옷자락처럼
살아 무엇한단 말인가

우리가 정작으로 사랑하려면
개울바닥에서도 옷 다 벗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오래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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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韓國의 새날 새아침의 詩

서 지 월


지금도 먼 시간의 새벽녘에는
흰눈 밟고 물 길어오는
코고무신 소리 들려오고 있으리.

눈 덮인 싸리재 너머
사푼사푼 걸어오시는 임의 치마자락 스치는 소리
靑솔가지 꺾어들고
벌써 대문간에 와 있으리.

하늘에서는 오천년만에 처음 열리는 하늘에서는
무우청같이 싱싱한 닭울음소리
지네기와집 용마루를 넘어오고

새로 태어난 아기들
이 나라 이 땅의 새로 태어난 아기들
번져나오는 웃음소리
아침상 은수저 위에 빛날 때

우리는 다시 길을 가야 하리
저마다 쇠방울을 단 牛車를 끌고
동무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푸른 보리밭길을 따라서,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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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푸른 솔

서 지 월


달이 밝은 밤이면
하나인 달밤에 너를 생각한다
지금 이 땅은 말발굽 대신
군화발자국, 깨어진 명경 들여다 보듯
너는 하나이고 둘이구나.

우리가 우리 마음같은 커다란
범종을 울릴 때 아니면
우리 튼튼한 뱃가죽같은
북을 울릴 때
하나인 것은 하나의 소리로 울려퍼지고
江을 끼고 누운 달빛마저 하나인 것을
너는 알겠구나.

바람을 깨우쳐 눈 뜨게 하고
펄럭이는 풀잎을 일으켜 꽃피게 해도
상처난 살점 도려내듯
흰 피 붉은 피
철철 넘쳐흐르는 달빛아,

별들도 말없는 밤이면
밤새는 울어쌓는데
잠 못드는 산아 강물아
댓돌 위의 어머니 코고무신
코고무신을 에워싼 적막이
모래소리를 내는구나.

하늘은 하나이지만 총칼로
나뉘어진 가슴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무성하구나

내가 나의 아내와 어린아이와 숨찬 언덕에 올라
보여줄 것이라고는 너의 얼굴
생채기난 푸른 얼굴
무엇이 더 필요하랴,

우리의 밥과 물과 흙이
숨쉬는 이 땅 위에
늙어서 더욱 청정한 너를 보면
이마에 땀이 솟고 나는
먼길 속에 갇혀 누이를 부르며
너와 놀던 오월 단오날의 그네
그네 위의 玉色 치마물결
눈물겹게 그리노라.

눈물이 반쯤 마르면
상한 옆구리 사이로
상한 고기비늘 퍼득이는
솔숲 사이 강물을 보고
밥그릇도 포개어져 주인 없는 시렁 위에
빈 날개의 안개만 뗏목처럼 밀려올 뿐,
오늘도 무성한 피의 들꽃이
소리없이 피는구나.

아,
동동동 발 구르는 산아 언덕아
배고픔도 피맺힘도 고개 너머 아리랑
너의 이마 위에 숯검정 묻은
달이 솟는구나, 솟는구나.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이며, 한국시인협회 선정 달성군 출신시인으로 비슬산자연휴양림에 시비「비슬산참꽃」이 세워졌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서정시인인 서지월시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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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 한 다발

 

서 지 월

 

그대가 건네준
장미꽃 한 다발
가만히 세어보니 열 송이
송이마다 향기 품었네

 

지금은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홀로 주무시고 계시겠지만
뿜어대는 장미의 향기
나는 잠이 안 와ㅡ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얼굴, 눈동자, 눈썹, 귀, 코, 입.....
가늘은 손목 죄어주던
그대 손목시계의 초침소리

 

인생이란 그런 거야
꽃다발을 선사 하고 선사 받고
훌쩍 떠나버려 공허하고 더욱 외로운
그런 거라고 누가 일러주겠지

 

그대가 내게 건네준
빨간 장미꽃 한 다발
세어 보니 열 송이
다 똑같이 그대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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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눈발

 

서 지 월

 

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평안한 우차에
실려가고 있다

 

아침 상 받으면
풋풋한 생채나물
그 미각을 더불어
어린 날의 서당골 물푸레나무
결 고운 길을 따라
잠 덜 깬 포대기 속 아이의
꿈결같이 굴러가고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예지의 나라
순은의 밀알들,
바다와 강이 놋요강처럼 놓이고
능은 풀잎처럼 잠든다

 

문경새재에 눈이 내리면
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속을
조심조심
미끄러져 가고 있다

 

아침 신문 유액 위 '조선통사'가 빛나고
한술의 배고픔보다 천근의 무게로 울려올
우리의 풍악소리.....
몇 백년쯤의 뒷날을 다시 생각노니,

 

지금 나는
세계의 가장 평안한 우차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간다


*출전/ [한국문학]1986년 8월호, 신인작품상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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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똥나무숲의 노래

 

서 지 월

 

쥐똥나무는 그들이 모여 사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터전을 이룬 듯 주렁주렁 쥐똥같은 열매를
매달고 소리나지 않는 숲을 흔드네

 

쥐똥나무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건
냄새 풍기지 않으면서 까만 열매를 매달아서
더러는 쉬어가게 하는 벗이 되고
되돌아 오는 메아리의 和答이 되네

 

쥐똥나무는 그들이 보람으로 삼으면서도
그게 쥐똥인지 아니면 누가 붙인 이름인지
전혀 모르면서 산다는 것이 어찌보면
우리보다 휠씬 앞서 가서 숲을 이룬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이 밤에도 들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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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사랑의 바다

 

서 지 월

 

그곳에는 당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늙지 않은 백사장과 하얀 물보라가
입맞춤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백사장은 알몸으로 드러누웠고
햐얀 물보라는 그 위를
쉬임없이 덮치는 거였습니다

 

백년을 살지 못하는 우리가
천년을 그대로 사랑하며 사는 그들
어찌 닮을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는 당신의 발자국도
지워지고 없었습니다

 

나 그대로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돌아왔습니다 끝내 백사장은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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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조령에서의 별 보기

서 지 월


우리는 팔조령에 별을 보러 갔지요.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별을 보러 갔지요.


두 발 동동 구르며 쳐다보는 밤하늘
어둠 속에 소풍 나온 바람과 함께 별을 보러 갔지요.


모여서 사는 것이 더 아름다운 거라고
별들은 우릴 내려다보며 노랠 불렀지요.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불빛과
밤 이슥해도 꺼질 줄 모르는 저들만의 눈짓이
우리가 모르는 골짜기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닭 울음소리 담을 뭉개는 새벽녘이면
또 어디로 쉬임없이 흘러갈지 몰라도
무시로 저무는 별을 봤지요.


어깨 겯은 나무들이 둥둥 떠오를 즈음
밤은 먼발치의 길을 덮고 언덕을 덮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우리는
얼굴 하나로 꼿꼿이 서서 별을 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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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달빛

서 지 월


쟁반 위에 놓여져
床을 받치고
더러는 바람부는 청솔가지 솔잎 사이로
물소리 흩뿌리는 수작을 걸면서
억겹 산을 넘어
지름길로 오는구나.

玉돌이야 갈고 닦아 서슬이 푸른 밤
싸늘한 바위 속 어둠 밝히며
쟁쟁쟁 울려오는 은쟁반 소리
은쟁반 위의 거문고, 바람이 흉내내는
나의 파도소리…….

옛날엔 이런 밤 홀로 걸었노라.
걸어서 거뜬히 몇 십리도 갔노라
짚세기 신고 돌담길 세 번쯤 돌아
모시적삼 남끝동 임을 만나고
수줍어 돌아서는 강물도 보고
손 포개고 눈 포개고 달빛 또한 포갰노라.

창망히 멀어져 간 수틀 위 꽃밭과
애달피 구슬꿰는 피리소리가
시렁 위에 얹혀서 돌아올 때면
쑥국쑥국 쑥국새는 숲에서 울고
칭얼칭얼 어린것은 엄마품에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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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蘭江은 흐른다

서 지 월

말이 없어 입 다물고
입이 없어 말 못하는가
접시 위에 놓인 세월의
뿔뿔이 흩어져 숨진 돌멩이
오늘도 강언덕 내달리던 말발굽 소리 들리건만
해란강 너는 그늘진 시대의 수심깊은 골짜기 타고 내려
사슴처럼 긴 육신으로 누웠구나.

피의 산맥 뜯긴 살점의
아파도 말 못하던 그날의 祖國은
싸늘한 너의 얼굴 할퀴고
너는 묵묵히 때론 빈집
홀로 남은 아이와 같이 울어도
몇 됫박의 눈물 더하였겠는가.

벌판을 떠나는 저 기러기떼의 군단
휘어진 날개편에 祖國의 社稷 실어보지만 그건
까마득한 天空의 海溢,
마주보는 산언덕 강허리 끊긴 길 위엔
우거진 잡초들의 낮은 음성 뿐
들리느냐 백두산 천지의 물소리가
부르느냐 一松亭 푸른 솔의 바람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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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떠가는 기러기처럼

서 지 월

갈 길이 멀어도
투정부리지 않고 낮게 낮게만 흐르는 강물처럼
하늘이 높아도 높게 높게 떠가는 기러기처럼
숨차지 않게,
저기 저 땅콩 파는 곰보딱지 아가씨도 좋고
씬냉이나물 다듬어 파는 손톱 붉은 아줌마도 좋으며
갓끈 졸라매고 예식장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도 좋다


어제는 산비탈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듯이
오늘은 골목마다 아니면 마을마다 집집마다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갖은 빛깔의 꽃들이
우리 마음 데우듯 저마다의 가슴속에
꽃 한 송이씩 피울 것,


흐르는 강물처럼 떠가는 기러기처럼
가면 또 오는 기쁨처럼 시간과 세월
아까워 하지 말고 오늘의 땀으로 빚은
햇빛들 다 데리고 바람 앞세워 나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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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냇물처럼 하늘 보고 누운 돌처럼

서 지 월


우리가 흐르는 냇물처럼 사이좋을 순 없지만
냇물바닥에 하늘 보고 누운 돌처럼
정다울 순 없지만
바람이 불어와 ꡐ너 잘 있었니?ꡑ인사하는 것처럼
반갑게 맞을 순 없지만 길을 가다가
다시 돌아오다가 멈춰서서
구름 보다가 아니면 눈을 감다가
낮달 하나 나처럼 말없는 것 다시
보다가 주저앉아 버릴 때
꼬리 긴 열차가 은행잎 같은 창문을 달고
못 본 채 지나갈 때 그냥은 아니고
소리 지르며 앞만 보며 지나갈 때
나는 거기 있었노라고 말 할 수 없을 때
공중에서 땅위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흐르는 냇물처럼 사이좋을 순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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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눈 속 절 한 채

서 지 월


흰눈 속에 절 한 채
겨울 잠에 들었다
다람쥐 오소리 자벌레들도
땅속에 들어가 긴 겨울잠에 들었다

산까치 멧새들만
머리 위를 스치우며
자신들의 세상인 양
허공을 가르며 날으고 있었다

대웅전 추녀끝에는
물고기 한 마리 춥지도 않은 듯
댕그렁 댕그렁
헤엄을 치고 있었다

목탁소리는 들려왔으나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와 함께
흰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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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변 옥수숫대

서 지 월


두만강변에는 지금
옥수숫대가 하늘 치솟아
옥수수알 배어 통통하겠다
누굴 기다리는지 멀뚱하게
줄지어 서서 푸른 의상 바람에 날리며
흘러가는 두만강 바라보겠다

두만강변에는 지금
바람이 전해주는 말과
구름이 떠서 서성이는 심사
옥수숫대 저들은 알아
허리끈 불끈 졸라매고
옥수수알 단단히 키우겠다

두만강변에는 지금
옥수숫대들이 줄지어 서서
수 천 수 만 독립군들
이름없이 숨져갔듯이
옥수수알 단단히 키워내어
세상에 내보내는 일
그것으로 마음 달래며
흘러가는 두만강 바라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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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절을 업고
               
서 지 월

 

산은 절을 업고
새를 풀어놓고
구름을 풀어놓고
아무 말 없네

 

눈보라가 산을 뒤덮어도
비바람이 산은 엄습해도
절은 나무를 풀어놓고
다람쥐를 풀어좋고
아무 말 없네

 

물은 징검돌 업고 
지나가는 사람들
발자국 비추이고
아무 말 없네

 

산을 절을 업고
온갖 나무의
잎새를 풀어놓고
온갖 빛깔의
꽃들을 풀어놓고
아무 말 없네

 

엄마 등에 업혀 잠든 아기
그 아기 어느새 커서
바릿대 하나 들고
징검돌 건너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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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山川

 

서 지 월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百姓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
李太白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꽃물 들였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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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의 추억

서 지 월

은사시나무 숲속에 가보았네.
일상의 그대가 내게 비워준 한 공간을
보기 위하여
밥 거르고 눈물 거르고 커피타임 거르고
오랜 은사시나무 숲 속에 가 보았네.

그대는 보이지 않고
은사시나무 즐비해 있었네.
나는 서성거렸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대의 하얀 입김 찾으려고ㅡ

그대가 대신 보내준 혼령의 새들만
울고 있었네.
그것도 괜찮았네.
은사시나무 가녀린 등살 너머로
은사시나무 긴 그림자 널리고
은사시나무 그저 서 있을 뿐
아무 인기척도 없었네.
그렇게 우리도 아무 말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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