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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서지월시인>국보급 시인 미당 서정주 문병기

아미산월 2009. 2. 5. 17:51

ㅁ[특별기고]<서지월시인>국보급 시인 미당 서정주 문병기

 

서지월 시인 특별기고


 

◇국보급 시인 미당 서정주 문병기 
 

11월 6일 월요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서는 이날짜에도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한 기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걸 미리 대하기 전에 「찾아 뵈야지」하고 날짜를 맞추고 맞추다가 이날을 택해놓고 상경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는데 어디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미당선생님 병문안 가신다 해놓고 아직 안 일어나셨느냐?」고.

나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 보니 낮 12시, 시계바늘은 정오에 와 멎어 있었다.

 


◀지난 9월 4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 마을 미당댁을 방문했을때의 미당과 서지월 시인.


 

헐레벌떡 짐을 챙겨들고 마당을 나오는데 마당가에 내가 심은 화분에는 샛노란 국화꽃이 한창 정연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 있었다.


 

나는 순간 노환으로 누워 계시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을 떠올렸고 샛노란 국화화분 곁에는 지난 9월 미당댁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온 질항아리가 낯설지 않은 듯 놓여 있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화꽃을 피우는 정성으로 한국인의 숨결을 시로 송두리째 노래해 온 대가시인 서정주 선생님께서 86세의 고령으로 병원에 실려가 누워 계시니, 이 얼마나 허망한 가을인가.


 

게다가 평생을 소꿉놀이 친구처럼 노닥거리듯 지내 온 부인인 방옥숙 사모님께서 지난 10월 82세로 타계했으니 노시인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쓸쓸함은 굳건한 시정신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잎은 다 떨어지고 붉은 감들만 올망졸망 달려있는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게 사람으로 치면 노후의 모습이구나!」 이런 생각도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구의 詩人 徐芝月이

“자셔 보이소”하며

저희 집에서 딴 홍시를 가져왔기에

보니 거기엔

山까치가

그 부리로 쪼아먹은

흔적이 있는 것도 보여서

나는 그걸 골라 먹으며

이런 논아먹음이

너무나 좋아

웃어자치고 있었다.


 

-미당 시 「徐芝月이의 홍시」 전문


 

언제였던가. 홍시를 좋아하시던 내 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떴고 미당선생님께 갖다드리는 도리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추운 겨울 어느날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 미당 서정주 선생님댁을 직접 찾아가 드렸더니, 한달 후이던가 「한국일보 시단」에 시로 써서 미당선생님은 발표하신 것이다.


 

또한 중앙일보에서 이경철 기자는 이 시는 미당의 달관된 경지를 보여주는 최상의 「논아먹음」 그것이야말로 미물과의 조화, 우주와의 조화 즉 화친(和親)을 의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앙상한 감나무 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맑고 푸른 가을하늘이었다. 한국인의 자랑이라 할 수 있으며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돈 안들이고 뽐내어 온 「한국의 가을하늘」 그 티없이 푸르고 아름답다고 하는 가을하늘이 내 살아온 이곳 수미산(首眉山)의 감투봉 위로 펼쳐진 것이다.


 

먼산에는 단풍이 울긋불긋 들어서 온갖 잔치마당을 벌여놓은 것처럼 형형색색이 어제같지 않은데, 나는 이런 풍경 속에서 또 생각나는 미당의 시가 있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이처럼 미당의 시가 우리의 온 하늘을 지배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날따라 왠지 쓸쓸하고 눈물겹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골목을 빠져나와 냇가 방천둑에 주차해 놓은 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앞 유리를 투과해 들어오는 가을햇빛 역시 유난히 눈부시다. 일단 주유를 하고 육중한 차를 몰아 내 사는 동네를 빠져나왔다.


 

강변도로를 따라 북으로 향해 가야 서울로 가는 것이다. 연이어 신천대로를 만나고 북대구I.C를 통과해야 경부고속도로에 내 몸과 마음을 얹는 것이 된다. 어쨌든 이래저래 달리고 밀리고 하다보니 서울 강남성모병원까지 도착하는데 그때 시각은 저녁 7시무렵이었다.


 

서울I.C를 지나 곧장 가다가 사당으로 빠져들어 「예술의 전당」 앞에서 우회전해 곧장 뻗히면 강남성모병원 정문이 나온다. 벌써 가로등은 불을 다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하루가 어느새 다한 밤이 바다 끝에 와 서있는 것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양지예, 임해 시인과 동행했는데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은림 시인과 최별희 시인은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미당선생님께서 입원하고 계시는 곳은 6층이에요.』

『그래 빨리 가자. 윗분을 찾아 뵙는데 너무 늦었군. 면회가 될지 안될지는 몰라도 우리가 일단은 가 보는 거야.』


 

이렇게 밀어붙인 내 뱃심이 작용했는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단 6층으로 올라갔다.

6009호실이 동병동에 있어 동병동 복도를 향해 가니 6009호 문패가 나타났다.

가슴이 잠시 뛰었다.


 

「미당선생님, 대구의 서지월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알아차리실 거고 간호하는 미당선생님의 큰자부님이나 곁에서 지키고 계신다는 김송희 시인도 나를 받아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갔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문 손잡이 위엔 「면회사절」이라는 방(榜)이 붙어 있었다.

순간 아찔한 기분이었다. 이 나라 제일가는 높으신 어른께서 몸져 누워 계시는데 「면회사절」이라는 말은 내게 사형선고같이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힘이 된다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지간(父子之間)같이 지내온 터라는 인연의 고리를 잡고 나는 드디어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을 두르려도 응답이 없었다. 순간 나는 문을 안에서 잠궈 놓았나 싶어 손잡이를 잡으니까 문이 열렸고 안에서는 사전에 기별이라도 간 것처럼 미당선생님의 큰자부님과 김송희 시인께서 빙긋이 웃어주시며 「잘 오셨어요」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왔는지 모른다. 마침 큰자부님께서는 미당선생님을 반쯤 일으켜 세우시고 숟갈로 죽을 먹여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에 다시 가루약을 물에 타서 먹여드리는 거였다.


 

이 일이 끝난 건 불과 2, 3분 나는 스스럼없이 미당선생님 앞으로 다가갔다.

오른손에는 염주를 들고 계셨고 왼손에는 엄지와 검지끝으로 무언가 잡고 계셨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응, 서지월이가 왔어!」하시는 것이었다. 미당선생님께서 나를 알아본 것이다. 다행이었다. 게다가 평소 반가워서 짓던 웃음을 병중에서도 얼굴 전체로 웃어보이시는 「아, 이 감흥!」 어디에 비길까?


 

그렇게 미당선생님은 평소와 같이 정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일 거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나는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이 가며 잡아 드렸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흐뭇했다.


 

평소에도 그러했지만 원래 야윈 체질로 미당선생님의 손 마디마디가 이제는 이파리 다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물론 미당선생님의 손에선 체온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의 혈(血)로 데워 온 아궁이 같은 뜨거운 가슴은 아직 살아 이 가을날 마을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이 세상 어딜 가나 국화꽃을 피우게 하셨고, 저 인적끊인 산마을 구석구석까지도 붉은 감이 매달려 있게 하여 대낮에도 한국의 가을하늘을 환하게 밝히게 하신 대시인 서정주 선생님이 아니신가.


 

지금은 잠시 몸져 누워 휴식을 취하고 계실 뿐이라는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당선생님께서는 갑작스레 「지금 가려고?」 하셨다.


 

『아닙니다, 선생님. 여기 선생님곁에 있을 겁니다.』

더러 사람들이 수인사만 하고 오가고 해서 불안해서인지 물으시는 말에 선생님을 안정시켜 드렸다.


 

나의 수제자일 뿐만 아니라 평소 나와 더불어 미당선생님께서 얼굴만 봐도 이름까지 기억하는 유일한 이은림 시인을 미당선생님 앞에 불러세우니 「은림이가 왔어!」하고 역시 기억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감개무량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니까 평소의 기억을 다 갖고 계시어 제자된 입장에서 마음이 든든하고 참 좋았다.


 

내 제자중 내가 필명까지 아주 이쁘게 지어준, 청주로 시집간 최별희 시인도 함께 했는데 다섯 살 난 딸냄이를 데리고 와서 누워 계시는 미당선생님 앞에 노래 불러보라고 시키니까 처음엔 수줍어 잘 못하다가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를 부르다 그쳤으나 미당선생님께서는 오히려 계속 따라 부르시며 즐거워 하시는 이 천진성 앞에는 당해 낼 사람 누가 있을까 싶었다.


 

누가 말했던가. 「한국시의 긍지를 세계시의 명예 위에 끌어올린 대가시인 서정주! 아아, 서정주는 위대한 시, 위대한 시혼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고 한 장엄한 말이 떠올랐다.


 

오천년 한민족 역사에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고운 최치원, 고려시대는 이규보, 조선시대에는 서거정, 그리고 근세이후 지금까지는 미당 서정주 시인을 최고로 쳐오며, 오천년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시인으로 미당이 자리매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세계적인 시인으로 중국의 시선 이태백을 능가하는 시인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한다.


 

미당의 큰자부님의 극진한 간호와 한때 미당의 따님으로까지 귀여움을 받았다는 김송희 시인이 병석의 미당 옆에 자리 지키고 있는 것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안타까운 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미당의 성격이라 일체의 외부인 면회사절과 언론기관과의 면담도 허용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 11월 찾아뵈었을 땐 흰 무명옷을 가지런하게 차려 입으셨는데, 올 봄에는 잠옷차림이었으며, 지난 9월에 가 찾아뵈오니 내의차림으로 숨가빠하시는 모습이었는데, 편찮으신데는 없다며 맥주는 음료수같이 그냥 드셨던 미당선생님이셨다.


 

사전 준비없이 미당선생님을 찾아 뵈었던 터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병실문을 나와야 하는 무거운 발걸음은 천근 같았다. 혹여 찾으시면 어쩌나 염려도 되었다.


 

며칠 후 짐 싸들고 와 선생님곁에 좀 머물러 있어야겠다는 각오로 대낮같이 환한 불을 밝힌 동병동을 빠져나왔다.


 

평소에 찾아가 뵈면, 「오, 왔구나 왔어! 대구에서 왔어…」하시며 양 팔을 벌려 껴안으시듯 시늉하며 반가워하시던 미당선생님이셨고, 「나도 대구사람이야. 내 성씨의 본이 달성(達成)이잖은가. 서거정 어른 형님의 자손이거든. 또 우리 할망구는 울산사람이니 다아 경상도야 경상도!…」 그러고는 한바탕 「웃어자치는 것」이었으며, 곁에서 사모님은 평생을 그렇게 말은 않고 웃으시기만을 해 온 것처럼 천연히 웃으시던 모습이 이제는 그리울 따름이다.


 

-徐芝月/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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