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 만주기행 시편/서지월 만주기행 에세이

[주말에세이] 압록강에 멱을 감다 /서지월

아미산월 2008. 11. 12. 03:13

[주말에세이] 압록강에 멱을 감다 /서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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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압록강에 멱을 감다
  내가 만주땅을 처음 밟게된 것은 1998년 여름이었다. 인천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시속 30킬로미터의 ’동방명주’호에 몸을 싣고 무려 10시간에 걸쳐 서해를 밤새도록 거슬러 올라가 도착한 곳은 단동이었다.

  단동은 압록강 최하류에 위치한 중국 항구도시로 강 건너 마주 바라보이는 도시가 바로 북한의 신의주였다. 강가에 나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북한 풍경의 전부였다. 처음 밟은 땅인 만큼 강변로를 산책하다 보니 섬이 하나 평원처럼 떠 있었는데 위화도라는 말을 듣고 묘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곳 단동에서 다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6시간에 걸쳐 도착한 땅이 환인이었다. 산굽이 물굽이를 수십 번 돌고돌아 마지막 산굽이를 넘어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을 때, 차창으로 시가지 한복판을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등어의 푸른 등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혼강, 바로 비류수였다. 비류수라면 고주몽이 남하하여 정착한 곳으로 우리 민족 고대 역사의 강으로 각인된 이름 아니던가. 시가지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그 비류수 너머로 웅대한 산봉우리 하나 병풍처럼 솟아 올랐는데, 알고 보니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도읍인 오녀산성, 즉 홀승골성 서성산이었다.

  해가 기울어 산정(山頂) 오르는 것은 이튿날로 미루고 비류수 강가에 앉아서 어둑어둑할 때까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강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난간 위로 초승달이 배시시 웃으며 낯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역사에서 배운 비류수와 주몽과 고구려가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잡초 무성한 이 땅이라니.... 훈훈한 땅의 기운이 남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튿날 오녀산성을 올랐다. 창검과 북소리 말발굽소리 대신 이름모를 바람결만 잎새를 흔들고 있었다.

  오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비류수의 풍치 또한 절경이었다. 끝없는 만주벌판과 발 아래 어깨 겯은 산맥들이 줄달음쳐 와 멎어있는 풍경은 이 오녀산의 위용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검은 까마귀들만이 1천600년전 고분벽화에서 다시 살아나와 빈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대고구려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성을 내려오는 데도 푸석한 잔돌들만 무심한 발길과 마주칠 뿐이었다.  

  이곳 환인에서 다시 3시간 남짓 택시를 타고 비류수를 따라가 보았는데, 이 길 또한 예사의 길이 아니었다.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를 우리에서 꺼내다 그만 놓쳐버려 그 생돼지가 도망쳐 간 길을 뒤따라가 멈춘 곳, 바로 집안땅이라 했다.

  환인에 비해 땅이 비옥하고 평야지대였으며 앞쪽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생돼지를  잡으러 왔다가 발견한 그 명당으로 고구려 유리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었다.

  3시간에 걸쳐 2천년 전 그 생돼지가 도망쳐 달아간 길을 따라가니 ’국내성’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때서야 이곳이 고구려 제2의 도읍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얼른 여관에 짐만 내려놓고 멱 감으러 강가로 나갔는데 어느새 어둠이 사방을 엄습하고 있었다.

  나는 걸친 옷 홀랑 다 벗고 강물에 온몸 담구어 멱을 감았다. 지난밤 비류수 강물 위로 떠올랐던 그 초승달이 찾아와 다시 압록강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워 내 팔둑을 손톱으로 꼬집어 보았다.

  머나먼 압록강에 와서 내가 멱을 감고 있다니.... 실감나지 않는 현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줄곧 들어만 왔던 상상의 강물 속에, 역사의 강줄기에 내가 온몸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었다. 대구에서 온 가난한 시인의 몸을 받아준 압록강. 역시 우리 민족의 강이었다.

서지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