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인 제1차 만주기행]36.길림에서 심양까지
36. 길림에서 심양까지 ◇길림역을 향해 그러니까 도라지잡지사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저녁 7시정도였다. 저녁 8시36분 기차출발시각에 비하여 1시간30분정도 남았으니 넉넉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그걸 카운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1시간이 그새 지나가 버렸다. 나는 그때 일어나야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인솔해 만주땅으로 온 소설가 박월리씨에게 말했으나 아직 좀더 있어도 된다는 말이 선뜻 고집세울 수도 없는 형편이라서 그대로 두고 말았는데 20분가까운 시간이 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나는 일어나 출발하자고 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길림역까지 10분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 할지라도 택시 기다려 타는 시간, 짐을 내려 대합실을 지나 승강장까지 가기는 조금이라도 여유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그때서야 일행 모두는 일어나 무거운 짐 한 보따리씩 둘러매고 끙끙거리며 밖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는데도 두대를 잡아 가야하기에 금방 택시가 와 서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한몫에 두대를 잡아 타는데 5분이상이 걸렸음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러구러 길림역에 도착해 다시 무거운 짐보따리를 둘러메고 양손에 쥔 채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생긴 하나의 문제는 일행중 통과하는 장치에 짐이 걸려버렸다. 2층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않아 내려다보니 짐보따리 검색중이었다. 말도 안통하고 안타까이 기다리고 있던 차 마중나오신 고신일선생이 또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이 별 문제는 없어 다시 흩어놓은 짐보따리 챙기고 올라오는 일행과 함께 승강구로 가기에 바빴다. 생각밖에 시간이 자꾸 소요되니까 이제부터는 뛰지 않을 수 없었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신일선생을 따라 일제히 짐보따리 둘러메고 오른쪽 큰 2층대합실로 들어갔는데 한국의 명절때처럼 왠 사람이 많은지 빽빽했다. 그 인파들을 뚫고 지나가 승강구를 나가려는데 보니 심양으로 가는 승강구가 없었다. 조급한 나머지 돌아나와 고신일선생이 이끄는 대로 얼마나 뛰었는지 숨가쁜게 문제가 아니라 양다리가 제말을 듣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말로 하면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다시 나와선 왼편 승강구로 뛰었다. 복도같은 2층 승강구가 굽이져 있는데 길기는 왜 또 그리 긴지 합해서 7명이 정신없이 뛰었다. 이는 뒤에서 누가 잡으러 오는데 붙잡히기만 하면 목숨과 인생이 끝나는 급박한 순간의 초조같았다. 나중에 모두 회고한 일이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숨막히고 사생결단으로 뛰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또한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 보름이상 지나오며 팽팽할 때로 팽팽해진 배낭과 양손에 또 나누어 든 백들, 연세가 높으신 고신일선생께서도 무거운 짐하나를 맡아 뛰었으니 말이다. 요행이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열차가 떠나려 하는 걸 잡아탔기 망정이지, 이시각으로 말하면 1~2분이 늦어도 놓치고 말았을 정도로 급박한 순간이었다. 우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신 고신일선생이 더없이 고마웠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마음 조렸었겠는가. ◇심양행 열차에 올라 만일에 이 열차를 놓쳤다면 우리일행은 길림에 하루 더 머물러야 한다. 한국처럼 먼 거리가 아닌 경우 하루에도 수시로 열차가 떠나고 하지만, 이런 대벌판 만주땅의 경우 출발이나 도착시각이 하루에 한번뿐인게 다반사이니 거기다가 심양으로 해서 단동으로 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 또한 조금의 틈도 없었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경우 감기몸살이 더욱 심해 열차에 오르자마자 약을 먹고 드러눕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시다시피 한여름의 감기몸살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다. 이때 시각이 저녁 8시 36분발 심양행 열차였으니 우리는 침대칸을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침대칸이라 해봐야 역시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했고 3층으로 된 침대가 말이 침대지 편할리가 없었다. 나는 얼른 3층 침대위로 올라가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모포를 덮어쓰고 끙끙앓으며 아침 열차가 심양에 도착하기까지 정신없이 잤다. 나중에는 완전히 잠에 빠져 의식을 잃었으나 처음 침대로 올라가 모포 덮어쓰고 땀뻘뻘 흘리고 있는데 우리 일행이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아야기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 청년이 우리 일행과 통성명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사업차 이곳 만주땅으로 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청년이 일러주는 말인 즉, 이야기하면서도 늘 시선은 자신의 짐보따리를 주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누가 들고 가버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만큼 살벌하다는 거였다. 이것도 중국땅 여행중 좋은 배움이 되었다. 이 청년은 우리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는 다른 칸으로 갔는데 이 열차안에 비디오방이 설치되어있어 어느 조선족 여자하고 짝하여 잤다 한다. 길림역에서 열차 오르기 전 식당에서 만난 여자인데 식당주인이 이 여자를 좀 안내해 주라고 했다 한다. 즉 돈벌이를 위해 어디론가 떠나야 해 마침 같은 심양행 열차를 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인데, 그 조선족 여자도 순순하고 해 함께 비디오방에 갔다 한다. 돈이면 무엇인지 가능하다는 중국물결에 휩싸인 만주땅도 예외는 아니라는 소문을 더러 듣기는 했는데 남과 여 관계도 쉽게 돈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그예가 되는지는 몰라도 못 살아서 돈벌기 위해서 스스로 가출하는 조선족여자도 참 많다고들 한다.
◇심양역에 내려 어찌되었던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었다. 심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6시15분 그러니까 부연 새벽이었다. 밤새 약 먹고 끙끙 앓은 보람이 있는지, 감기몸살이 거의 다 나은 것 같았다. 일행은 다시 무거운 짐보따리를 하나씩 둘러메고 양손에 든 채 심양역을 빠져 나왔는데 정말로 심양시는 넓고 커 보였다. 한국으로 보면 서울시 버금간다고 할 정도로 고층빌딩은 즐비해 있었으며 다른 도시와 달리 차들의 행렬도 줄을 이어 번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알고보니 넓은 대륙의 나라 중국 3대 도시 가운데 하나라니 그럴만 했다. 중국 3대 도시가운데 또한 만주땅에는 제1의 도시가 이곳 심양이라니 놀랄만 했다. 우리 일행이 가야하는 곳은 심양시에 서도 널리 알려진 서탑사거리, 어느 다방을 하나 정해 그곳에 가있으면 심양의 요녕신문사 기자가 나오기로 돼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어디가서 식사부터 하기로 한 우리 일행은 서탑사거리 뒷편에 있는 조선족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우리 취향에 맞는 음식을 고르느라 쏘다니다가 보니 한국식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서탑사거리로 걸어나왔다. 걸아나오는데 「경회루」라는 큰 호화식당 빌딩이 크게 눈앞에 들어왔는데 이 식당건물은 한국인이 직접 경영하는데 심양에서도 알아주는 큰 식당이라 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와서 큰 돈을 벌고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길은 나오는데 조각상이 하나 보여 나는 반갑게 기념촬영을 했는데, 나는 그런게 반가웠다. 왜냐하면 삭막한 도시의 예술작품이라는 것과, 또 만주땅에는 한국과는 달리 어느 도시를 가나 순한국적 조각상들이 많이 눈에 띄어 반갑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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