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인 한국시선/서지월 전통서정시

[전통서정시]서지월 시-개밥그릇의 노래

아미산월 2008. 10. 2. 12:40

[전통서정시]서지월 시-개밥그릇의 노래

 

[시감상] 서지월 님의 <개밥그릇의 노래>를 읽고 ∵∵∵x-text/html; charset=x-windows-949" hidden=true src=http://poemtree21.net/music/minyoo/bdorajip.wma loop="-1" volume="0">∵∵

 

이 시를 말한다 - 서지월 시 <개밥그릇의 노래>

 

 

  유감스럽게도 사회적으로 시인이 깎듯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돈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은 그래서 늘 가난하고, 어쩌면 가난해야 시다운 시가 써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좋은 시 쓰는 훌륭한 시인이 마땅히 환영 받고, 그 격에 맞는 충분한 대우를 받는 그런 날은 과연 언제쯤 와 줄까? 그리고 어쩌다 의식의 눈이 번쩍 뜨이는 시를 만났을 때, '이런 시 쓰는 진정한 시인이 소음 같은 헛말만 허공에 남발하는, 소위 떠들썩한 일부 위정자(爲政者)들보다 참으로 존경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지 않는가.'하는 주제넘은 바람이 분수처럼 강하게 솟구치는 것이다.

  지난 한해 동안도 한 번 읽고 놓아버리기엔 아까운 몇 편의 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 커다한 수확이었다. 마치 장인 정신을 지닌 어느 옹기장이가 공들여 빚어낸 질그릇 중의 질그릇을 발견한 듯이.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아마 밥 안 먹어도 배부른 순간을 더러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개밥그릇의 노래>와 같이 잘 빚어진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배고픈 줄 모르고, 그만 넋을 잃고 빠져들어 오히려 밥 먹은 것보다 더 정신적 포만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철저히 유배당한 지상에서의 짝 잃은 고무신 누
가 뭐래도 웃지 않고 울지 않는다 한낮의 해와 부엉이 우는 밤
이 골짜기 둥근 달이 내 움푹 패인 겨드랑이 훑고 가도 퍼담을
수 있는 건 주인이 내어다 주는 음식찌꺼기 그것만으로도 흡족
한 나는 이내 속이 비어져 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당당히 낮과
밤의 시간을 함께 한다.
  너희들의 식사시간을 은근히 습관처럼 기다리지만 너희들이
수저 놓고 자리 뜰 때 분주한 건 나 아무렇게나 마당가에 놓여
져 나의 여윈 살과 뼈와 살까지 핥는 강아지들을 보라 얼마나
눈물겨운 만찬인가
  철저히 유배 온 이 지상에서 때론 빗물도 고여 마당 가득 채
워 주지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손길이라는 자부심에 넘
쳐 흐르며 꽃송아리를 헤는 아이마냥 해와 달을 셈하며 살아간다

서지월의 <개밥그릇의 노래> 全文

 

 -「문학사상」1997년 7월호

 

  가만 읽어 내려가 보면, 어디 한 군데 애써 말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목소리 또한 의도적으로 한 옥타브 높인 데 없이, 그래서 이렇다 할 빼어나게 묘사한 한 구절 가구(佳句)도 없이, 그저 혼잣말하듯 담담한 어조로 읊은 평범한 노래인 듯하다.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어 다시 읽어 내려가 보면, 마치 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부터 시원한 한 줄기 파도가 서서히 밀려와 마른 가슴을 철썩 때리는 듯 전신이 저릿한, 그야말로 절창 중의 절창이라는 느낌을 자못 떨칠 수 가 없다. 그것이 이 시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한 이유이다.

  마당가에 뒹구는 하찮은 개밥그릇 하나에, 이렇듯 신선하고 긍정적인 삶의 의미와 무게를 담아 슬며시 독자들 앞에 밀어내 놓고, 저만치 뒷짐지고 말없이 서 있는 시인의 그림자가 보지 않아도 본 것 이상으로 참으로 여유롭게 비쳐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비우지 않고선 아무나 쉽사리 따라 부를 수 없는, 진정 마음이 가난한 시인의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세상 욕심을 호주머니 속 먼지를 털어 내듯 툭툭 털어 버리고, 그 어떤 일에도 헤프게 웃거나 쓸데없이 눈물 보이지 않으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개밥그릇 그득 고인 빗물 속에 그대로 녹아 철철 넘쳐흐르고 있는 듯하다. 한낱 볼품 없는 개밥그릇을 화자(話者)로 하여, 자기 앞에 맞닥뜨린 궁색한 현실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수용하고, 도리어 달관한 자세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관조하듯이 집약해 놓은 능숙한 솜씨가 정말 놀랍고 부럽다. 하잘것없는 존재의 가치를 진지하게 일깨워 주는 묵시적인 교훈 같아 잠시 숙연해 진다. 한편 찌그러진 개밥그릇을 통하여 보여준 그 넉넉한 자족의 비결에 동화되어, 갈수록 험하고 살벌한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문득 살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무얼 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난해한 시의 시대에, 이 한 편의 시를 편안히 음미해 보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진수(珍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이고, 따라서 술술 읽히는 이 시의 감칠맛에 매료되어 새로운 활력이 불끈 솟아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밟히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일에 지칠 만큼 지쳐, 세기말 벼랑 위에 선 이런 때일수록 한 편의 시를 읽으며, '꽃송아리를 헤는 아이마냥 해와 달을 셈하며 살아가는' 마음의 순수와 여유를 되찾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제각기 철저히 이 지상에 유배 온 개밥그릇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 말이다.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서 있잖은가, 변함없는 우리의 것,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한 것......"

  시작(詩作)메모에서도 시인이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러한 잊혀져 가는 소재들을 찾아내어 그 특유의 뛰어난 서정적 필치로 노래한 시, <개밥그릇이 노래>는 인간과 우주를 넉넉히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오히려 우리들에게 영원성을 일깨워주는 큰 시인의 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98년「대구시인학교 교재」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