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40. 다시 단동으로
40. 다시 단동으로
심양역에서 오후 4시 6분에 출발한 열차가 저녁 8시 10분에 단동역에 도착했다. 그러나까 4시간 소요된 셈인데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 한국의 실정을 보면 대구에서 서울이 3시간 남짓, 부산에서 서울이 4시간 남짓, 그러니까 가장 먼 도시와 도시를 잇는 시간이 서너시간인데 이걸 가지고도 우리는 먼 거리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해 왔고 보면, 중국의 경우 아니 만주땅만 보더라도 보통 도시와 도시를 잇는 시간이 서너시간이니 개념이 다른 것이라 말 할수 있다. 대구를 기준으로 경주나 안동 상주를 잇는 보편적 거리가 만주땅에서는 한두 시간이 아닌 서너시간 그러니까 대구나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거리의 사간만큼 넓다는 의미인 것이다.
단동으로 오는 열차안은 역시 시끌벅적 하였다. 만주땅 열차안의 인파도 꽉차서 발디딜틈이 없다는 것과 한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명절때 분위기 같다고 할까. 또 하루에 한두번 왕래밖에 없는 열차시간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열차안에는 칸칸마다 뜨거운 보온물병을 늘 준비해 승객들에게 여름이나 겨울이나 뜨거운물을 제공한다는게 이색적 풍경이었다. 그들에겐 어느 호텔 어느 장소를 가나 잎차를 즐겨 마셔온 관습인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단동역에 내리니까 어둠은 벌써 내려와 있었다. 다시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 분은 소설가 조정호씨였다. 단동시 공안국에 근무하는 조정호씨는 우리 일행이 처음 중국 만주땅 초입이라 할 수 있는 단동에 도착했을때 안내해 주신 분으로 다시 그 분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어 일행인 소설가 박월리씨가 연락해 놓았던 것이다.
숙소를 미리 정해놓고 그곳으로 우리 일행이 택시를 잡아타고 갔는데 숙소가 마땅찮아 옮겨온 것이 신의주가 바라보이는 압록강을 마주한 강빈호텔이었다. 이곳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실내분위기가 온화해서 책을 보거나 면상을 하는데 그런데로 좋았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나온 일행은 피곤하여 그대로 모두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밖을 나가 압록강 밤풍경을 즐길 사람은 꼭 혼자 나가지 말것, 그리고 너무 오래 있지 말것 이런 것을 지키기로 했다. ◇단동에서의 이튿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 보니, 밖은 왼통 빗줄기였다. 얼마나 심하게 내리는지 천둥번개를 동반해 비가 죽죽 내리기 시작하는데, 오히려 우리 일행이 만주기행을 16~7일에 걸쳐 거의 다 하고 난 뒤여서 마음은 놓였다. 그런데 이곳이 어디인가. 처음에 말했다시피 6.25 한국전쟁때 미군에 의해 파괴된 압록강 철교가 끊어져 반만 남은채로 그대로 남아있다는 상흔과 지금부터 500여년전 구려말기 이성계가 말머리를 돌려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계기가 된 위화도가 이곳 압록강 하류 강상에 떠서 비맞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탄식을 해 보면서 내 인생의 한 시대를 열었던 나의 「1만리 만주대장정」이 마지막 무대를 흠뻑적시면서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순간이 지금인 것이다. 내일 인천으로 가는 「동방명주호」출발시간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 더 이곳 단동에서 묶어야 하는 신세가 돼 버렸는데 이렇게 내리는 비가 하루종일 뿌려댔다.
압록강을 내리는 빗줄기를 이고 하염없이 서해로 흘러가고 있을 따름, 강에게는 아무 말이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수천년 몸과 마음을 담았던 그 하류 강어귀에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그분들은 모두 가 버렸다. 오천년 역사의 압록강에 흔적을 남기고 서책이나 남아 있을 뿐 그들의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강상을 따라 올라가면 고구려 제2의 도읍이며 거기 고구려 제2대 유리왕부터 19대 광개토대왕까지 400여년간 통치했던 대고구려 현장인 집안땅이 나오지만 다 사람은 가고 없는 것, 세상무정이나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도 될 것이다. 기대일 기둥마저 없는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갈뿐, 잡고 잡히는 것이 없는게 역사이고 세월이 아닌가. 스스로 탄식해 보는 것이다.
◇「진달래」 책자를 보며
출발 전날밤, 단동의 문인들을 연락해 저녁만찬의 시간을 가졌는데 바쁜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 참석지 못해 아쉬웠다. 게다가 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 밤 「압록강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일행무두가 가요방으로 갔을때 나와 함께 부르스를 추었던 조옥자씨가 나오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더없이 쓸쓸했다.
왜냐하면 못 보고 한국으로 떠날 것 같았으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 먼 중국땅을 다시 온다면 몇번이나 다시 오겠는가. 생각하면 아득한 일로 느껴졌다. 그리고 단동에서 특별한 문예지가 아직 나온게 없었다. 앞으로 이분들이 「등대」라는 제호의 책을 낸다고 하나 마음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 한다. 그래도 요행이 식당에서 「진달래」라는 이곳 시장정보책자를 구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문예잡지는 아니지만 시장정보잡지인데도 책제목이 「진달래」이니 마음이 따스하게 느껴지고 끌리니까 말이다. 역시 중국 만주땅에는 어딜가나 민족정서가 깃든 일련의 이런 제목들이 참으로 따뜻하게 울려와 좋았다. 이직 그들에게는 외래어가 필요없는 시대여서 더욱 좋아 보였다. 조선족들에게는 이런 정신들이 베여 있었던 것이다. 「진달래」「도라지」「은하수」「장백산(백두산)」「천지」「송화강」「압록강」「흑룡강 신문」「아리랑」「해란강」「두견」이 모두 우리 고유명사들이 아닌가. 나는 그들에게 향수를 느끼고 그들에게 민족성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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