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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영길현 아라디마을

아미산월 2008. 8. 10. 23:58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4. 영길현 아라디마을

 

34. 영길현 아라디마을

◇아라디 마을을 찾아서

길림에서의 이튿날 우리 일행은 또다시 바삐 움직여야 했다. 하루만에 둘러봐야할 곳을 보고 저녁에는 심양으로 떠나야 하는 빡빡한 일정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영길현이라는 시골의 아라디마을을 찾아보기로 했다. 소설가 박월리씨가 소설가답게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아라디 지명이 이름인 아라디는 「알라」 즉 언덕이라는 뜻으로 크게 순우리말로 토착하게 되었으며 원래는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던 땅이었는데 1932년부터 우리민족인 조선사람들이 개간해 해방후 집단 거주하게 된 연유라 한다.


◀'아라디조선족중심학교'에서 이상월 이채운 서지월 김규삼 남동성 노진용 고신일 박월링 정이랑씨



이런 순조선족 집단지역이라는데 박월리씨는 매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피부로 느껴보자고 했던것 같다. 600여 가호에 2600여명 정도가 농사짓고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도라지」 집지사를 나와 영길현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였다.

그곳에도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고 관공서가 있었고 상점 학교들이 시골티 그대로 건재해 있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어느 건물이었는데 기억이 아슴하다. 관공서같기는 한데 복지회관 같은 성격을 띤 곳인 것 같은데 나이 많으신 분들이 계셨다. 「영길현 아라디 관리위원회」회의실같은데 들어가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박월리씨가 주선한 모양인데 주로 그들의 삶에 대한 화제였다.

마침 「도라지」 잡지사에 근무하는 김홍란씨가 이곳 영길출신으로 김홍란씨의 부친께서도 우리가 함께한 자리에 계셨던 것이다.

노용진옹(69)은 경남 거제도 문동 출생으로 15세때 만주땅 이곳으로 왔다 한다. 거제도에서 부친을 <KERN=7>따라 배를 타고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 압록강 하류인 신의주 맞은편 중국 항구도시인 단동(옛이름 안동)을 거쳐 길림으로 길림시에서는 걸어서 들어왔는데 3일 걸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 세상을 뜨고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가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남동성옹(64)은 고향이 울진이며 김규삼옹(64)은 이곳 소학교에 도서관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따님이 소설가 김홍란씨인 것이다.


◀영길현 '아라디조선족중심학교'앞에서 서지월시인

길림은 160만 인구에 조선사람이 17만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90% 이상이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영길현의 경우는 그 집단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점심도 그 어르신들과 함께 나누고 또 그분들이 안내하는 「아라디 조선족중심학교」도 둘러보았는데 한여름이라도 이곳에도 사루비아 분꽃들이 교정에 피어 있어 우리의 시골학교와 꼭같은 느낌을 주었다.

개학을 일찍하기에 학생들이 뛰어노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 역시 목격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주로 자유분방한 체육복(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어린 한 여학생이 노랑저고리 초록치마를 입고 있어 그걸 사진으로 찍으려고 몇번이고 애를 써 보았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는게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왜냐하면 찍으려고 하면 수줍어서 피하고 해서 그걸 노려서 계속 카메라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으나 결국 학교 정문을 나올때도 달아나버려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길림에서도 한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조선족 집단마을에 아직도 우리의 정서가 그 한복입은 여학생을 보니까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말이다.

우리의 것을 잊어버리면 언제 다시 우리의 것을 찾는다는 말인가. 나중가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돼버리고 말 것이니까.

백두산(장백산) 아래 장백현에서는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은 소학교 여학생을 많이 발견했고 함께 사진도 찍고 그 흔적을 남겨놓기도 해서 퍽 다행스러웠는데 이곳에 와서는 유독 한복입은 한 여학생을 보았는데 아무리 말해도 가까이 오지 않고 수줍어 피하다가 교문을 나서서는 영 달아나 버렸으니까,.


◀구획정리된 아라디 집단마을 풍경

아라디조선족중심학교를 둘러보고 나온 우리 일행은 이곳 그들이 사는 마을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중국 만주땅 어디를 가나 눈에 띄며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획일화된 집들의 구조였다.

똑같은 벽돌색깔의 기왓장, 벽돌집으로 어느 집이나 그 모양이 같다는 말이다. 사실 마당이라는게 없다고 해야 옳을것 같은데 텃밭이 조그맣게 마련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도 꼭 같은 형편이었다.

우리 한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날 성행했던 국민주택에 견주어 보면 될 것 같다. 특히 이곳 아라디마을은 가옥구조 도시계획같이 골목마다 직선으로 구획정리되어 있다는 것이 특이했었다. 그게 우리의 국민주택같이 수십채의 집들이 미리 바둑판같이 구획정리된 그 위에 집들을 집단으로 지어놓고 살고있는게 현저했다.

그 집들을 둘러보는데 길거리마다 아직 포장이 되지 않아 인력거나 자동차(택시)가 다니면 먼지를 일으키고 있어 시골같으면서 시골같지 않은 느낌도 주었다.

요는 우리 민족이 만주땅 가는 곳마다 군데군데 그 뿌리를 두고 살고있다는 것,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문명이 덜 발달되고 개화가 덜 되어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건 전혀 아니지만 옛 우리의 땅이었다는 입증을 그들이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많은 민족 가운데 그 대표적인 민족을 꼽으라면 나의 경우 당연코 우리 민족을 꼽는데 오천년 역사속에 우리끼리 물어뜯고 싸우고 해 온 것이 아직 그치지 않고 있으며 잃어버린 땅도 찾을 길 없으니까 하는 말이다.


◀영길현 아라디망을 주민들과의 대화장면

역사란 늘 그래왔듯이 힘없는 백성에게 어두운 그림자는 오래 남아 씻을 수 없는 한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게 운명적 삶처럼 돼버렸으니까, 어디가서 호소한들 누가 들어주며 알아주겠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미 큰 자국을 남기고 지나가버렸는데.

아라디 마을을 뒤로 하고 다시 길림시로 돌아오는 먼 들판의 풍경은 평화로워보이는게 아니라 뙤약볕에 목말라 보였다. 어디갈 수도 없으며 어디 갈 곳도 없는 우리 민족이 주권없는 남의 나라 남의 호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실상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잠시나마 만나고 온 그 어른들은 모두 60고개를 넘으신 분들이지만 할 말이 오죽 많겠는가. 그러나 그분들은 이미 몸속에 삭인 듯 회한 따위는 표내지 않았다. 단지 일그러진 주름살이 말해주는 듯 했다.

나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호의호식이 무엇인가, 아니면 산다는게 무얼 의미하는가 따위에 마음이 떠나질 않는데, 되도록 한(恨)없이 살아가는게 다복한 삶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으니까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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