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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길림에서의 첫날

아미산월 2008. 8. 10. 23:57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3.길림에서의 첫날

 

33.길림에서의 첫날

◇길림에서의 첫날밤

낯 1시 13분에 하얼삔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저녁 6시 50분이 되어서야 기림에 도착했다.

낯선 길림역에는 네온불빛이 빛나고 있었고 벌써 어둠도 내렸었다.

대책없는 이국땅이 그러하듯 우리 일행 여섯명은 하나씩의 집보따리를 길옆상점앞에 내려놓고 우리를 마중나온다는 사람을 기다렸다.


◀길림역 부근의 '미아리' 북한식당에서 고신일선생과 함께

쉬이 제시간과 맞지 않아 어느 정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얼음과자 하드를 사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설가 박월리씨가 주선한 분은 길림의 「도라지」문예잡지사의 고신일주간이었다.

고신일선생에 대해서는 만주땅을 출발하면서부터 박월리씨로 부터 많이 들어왔던 터이다.

드디어 고신일선생께서 마중을 나오셨는데 한 여자분이 같이 나왔다.

알고보니 같은 「도라지」문예잡지사의 김홍란씨였다.

우리 일행은 고신일 선생을 따라 그리 멀지 않은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4층인가 5층인가 거기가서 짐을 먼저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맞은편에 있는 북한식당이었다.

식당이름이 「미아리」였다.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된장국부터 음식을 시키는데 각별히 신경을 써 주문했다.

왜냐하면 음식의 맛이 맞질않아 곤혹을 더러 치렀기 때문이다.

고신일선생과 김홍란씨 그리고 우리 일행 6명은 술잔을 들어 첫만남의 반가운 브라보를 했는데, 오가며 심부름하는 아가씨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같이 동양적인 멋이라할까 한국 고유의 멋이라 하면 좋을까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단정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다른 북한식당(북한에서 경영하는 식당)에서와는 달리 한가지 빛깔의 의상이 아니라 아가씨들 각기 한복 빛깔이나 모양새가 달랐으니까 더욱 아롱져 보였다.

그 아가씨들은 북한에서 온 것임엔 틀림없었다.

우리 한국과 같이 식당에 가면 주고받는 대화도 잘 없고 그냥 얌전하게 심부름만 오가며 할 뿐이었다.

나는 기념으로 이 식당을 나오며 자연스럽게 그 아가씨들과 기념촬영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들이 문앞까지 마중을 나왔기에 다행한 일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여색(女色)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나의 경우 여자를 밝히는 스타일은 아닌데 간혹 오해받는 경우가 더러있다.


◀'미아리'북한식당에서 북한 종업원아가씨와 함께한 필자

내 성격이 좀 호방하다 보니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주변을 좋아하는 편이니 아마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것 같다.

요는 그런 말주변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진다기 보다 나하고 말 주고받는 경우가 생겨나고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감도 경험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나를 따르는 여자들이 잘 없는건 내 인생경험에서 내가 잘 아는 일.

그런데 사람들은 여자가 많이 따르는 걸로 더러 읽고 보면 그랬으면 그것도 복이라 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은 부정하는 편이다.

호감을 사는 경우도 있는데 본데, 그건 어디서 오는건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어딜 가거나 여자들은 있더라는 것이며 이렇게 가벼운 기념촬영같은 분위기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뤄지는 이런 경우는 남다르다고 보면 될까.

어떤 이들은 보면 시인이랍시고 시쓴답시고 호감 사려고 여자 밝히는 모습 역력하게 보이는 역겨움을 많이 보아왔던 터라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내 스타일과 기준에서 해 본 말에 불과하다.

장거리 여행이라 늘 피곤함은 겹쳐있기 마련이었다.

고신일선생도 내일 오겠다며 우리 일생을 다시 호텔로 안내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또다시 우리들만의 밤이 되었다.

호텔방은 2인 1실로 1인용 침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만주땅 어딜가나 한국처럼 더블침대 하나씩 놓여있는 건 아예 보질 못했고, 두개 이상씩이어서 이것마저도 이색적이었다.

길림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도라지」문예잡지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호텔에서 주는 식사를 거르고 말아서 아쉬움이 컸다.


◀'도라지'문예잡지와 '은하수'잡지

왜냐하면 일부러 음식점을 찾아가 사먹는다는 것 자체가 경비절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아침식사를 어디에 가서 때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후 우리 일행이 찾아간 곳은 「도라지」문예잡지사였다.

대로변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큰 문을 통해 들어가 그 안쪽에서 다시 건물의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도라지」잡지사는 4층에 있었다.

역시 오래된 건물 안이라 분위기는 침침했다.

조그맣게 붙어있는 「도라지」잡지사의 안내판은 한자 표기가 신기했다.

우리말로 하면 「도라지」인데 한자표기로 「道拉吉」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고신일선생이 주편(주간)이고 김홍란씨가 부주편 즉 부주필로 이 문예잡지는 두 분이 끌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앞에서 「미아리 북한식당」에서 한복입은 아가씨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고 적은 바 있는데, 역시 이곳에서는 「도라지」라는 이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고신일선생은 잡지이름을 바꿀까도 생각했다 하시기에 나는 이 보다 더 좋은 문예잡지 이름이 어디 있느냐고 고수하시라고 당부드리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만주땅에 온 것은, 와서 보고 느낀 것은 일련의 이러한 민족적인 것 내지는 전통적인 것의 재발견에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면 우리의 민족성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민족정신이란 무엇인가.


◀'도라지'문예잡지에 들러 이별리 고신일 김홍란 서지월 정이랑 이채운 이상월씨

민족정기 및 민족정서가 아니겠는가.

이것 없으면 빈 밥그릇이며 빈 숟갈이며 빈 장독이며 빈 집이며 빈 마음 아니겠는가.

만주땅에는 이러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었으며 그 실체가 그대로 있다는 걸 내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비록, 아직까지 만주땅에서 나오는 우리 민족이 꾸리는 문예잡지가 출판문화가 덜 발달되어 좀 낙후되어 보이긴 하나 그게 또 우리의 참얼굴이라면 누가 침을 뱉겠는가.

하여튼 나에게는 정겨워 보이는 이름의 「도라지」문예잡지를 손에 들어 펼쳐보이는 순간 찌릿한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

이런 구전민요도 있지만 백도라지도 좋고 보라색 도라지도 좋다.

우리들의 시골에 가면 아직도 색색의 도라지꽃이 어울러 피는 것을 흔히 볼수 있는데 그게 우리의 민족성이라면 누가 부인하겠는가.

나는 이런 아픔을 가진 길림의 「도라지」문예잡지사에 와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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