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마지막 하얼삔
◇그곳 사람들의 정서
흑룡강신문사의 브리핑을 듣고 난 우리 일행은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낮 1시 13분발 열차로 길림으로 남하하는 시각이 앞을 다투고 있었고, 출발하기 전 흑룡강신문사 문화부(문체부)에서 멀리 고국(한국)에서 오셨으니 점심대접을 하겠다는 고마운 주선이 있었기에 하얼삔시내 다른 곳은 거리상 갈 수 없어 택한 곳이 「공자사당」이었다.
전혀 방향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친히 나와 가이드해 주신 분이 역시 흑룡강 신문사의 리태복기자 였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직장일을 제쳐두고 손님을 맞아 안내하며 따라준다는게 요즘 세상에는 쉽지않은 인심인데, 만주땅 어디를 가도 옛날 인심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또한 우리 한국에서 살아가는것 보다 생활수준이나 문화환경이 못하는데도 고국에서 왔다니 환영해 주며 식사대접까지 가는 곳마다 빈번히 받았는데는 심히 느끼게 하는 바가 많았었다.
◀'공자사당'에 들어가는 '덕배천지'문
아직은 황무지랄까, 개발이 전혀 안된곳도 많으며 특히 도심의 경우 경제성장은 덜 되었는데도 개방물결에 의해 많은 물류들이 시장경제를 형성하고는 있으나 생활수준이 낮고 그들의 수입형편은 박봉이었다. 물가가 낮다고하나 그만큼 수입도 저소득이 대부분이라 사는 형편이 우리 한국과는 월등히 차이가 나는 것은 잘 아는 일이다.
어쨋던, 흑룡강신문사와의 인연은 이번 기회 이외에도 두번째 만주기행때에도 더욱 깊게 되는데, 지금 이글에서는 만주땅 찾아가서 처음의 기회인 것이다.
◇공자사당을 찾아
「공자사당」시내에 있었다. 중국 어디를 가나 가볼만한 곳은 중국전통양식 그대로 잘 꾸며진 것임에는 이곳 「공자사당」에 와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도 벽돌이나 세맨트로 칠한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날아갈듯한 처마, 처마위의 기왓장,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고전미의 색채를 잘 조화되게 띠고 있었으며 바닥이나 계단도 돌로 조각된 것들로 정성들여 만들어 놓았다.
◀공자사당 기념품점에서 들러 만난 '신선도'
또 중국의 공자의 나라답게 이곳 하얼삔「공자사당」역시 위엄이 있어 보였다. <덕배천지>라 현판이 붙어있는 문을 비롯해서 통과하는 문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공자행교상>이었으며 사당 안에는 공자 초상화가 살아있는 듯 했다.
기념품점도 있어 들렀더니 내가 좋아하는 인물화들이 많아서 몇 점 구입하게 되었는데 이름있는 화백이 그렸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몰라도 그 필치가 날렵하고 색상이 신선해서 좋았다.
그 가운데 <홍라어여> 등을 비롯한 미인화가 마음에 이끌렸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으며 신선화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취향과 꼭 들어맞았다.
◀미인도
중국이라는 나라의 향취라고 할까, 특히 화폭에서 많이 배어나옴을 직감할 수 있는데, 그들의 유유자적함이라든가 음풍영월 즉 풍월가인적 낭만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서서 그림을 감상하고 사지 못한 것들은 사진에 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기념촬영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갈길을 재촉하는 시간이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헤어짐의 점심식사
「공자사당」으로 향했을 때는 조그만 합승버스를 타고 갔으나 돌아올 때는 급기야 택시를 두 대로 나누어 타고 다시, 흑룡강신문사 앞으로 왔다.
이곳에서 흑룡강신문사 문화부팀들과 만나 점심식사하러 가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뒷골목을 따라서 간 식당은 내 취향에는 딱 맞는 시골식당같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일곱여덟명이 둘러앉은 상도 둥근 것이어서 내 어릴적 온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먹으며 자란 그런 상과 같았다.
만주땅에는 아직 이런 체취가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를 환대해준 흑룡강신문사 측에 매우 고마운 것은 나 그리고 친구인 소설가 박명호씨를 제외하고는 정이랑, 이채운, 이별리, 이상월 모두가 30대 초반 젊은 나이이고 그분들은 우리보다 연륜이 높은 분들인데, 한편으론 윗사람들이니까 마음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심성도 따랐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공자행교상 앞에서 필자
어쨌든, 식사의 메뉴는 다양하게 많이 나왔는데 음식 모두가 접시에 담아져 나온 그 개수만큼 값을 치른다는 것이다.
별로 중국음식 특유의 냄새가 덜해 먹기에는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요는 떠나야 하는 시간이 임박해 오는 만큼 아쉬움이 컸다는 것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돌아서야 된다는 그것이 마음에 찡하게 와 닿았다.
하얼삔의 많은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우리 민족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들도 이곳이라고 없을 수 있겠는가 싶었으나 그 머나먼 여정인데도 불구하고 급급히 지나와야 하는 것이 목메인다고 할까.
한 번 지나쳐 오면 언제 다시 밟아서 찾아가 볼지는 인생사의 미지수일 뿐만아니라 불투명한 일이어서 더욱 가슴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만주제국때 생체실험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관동군 731부대 말하자면 이런 애환서린 곳마저 둘러보지 못하고 하행열차를 타야 하는 마음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아 하얼삔, 내 가슴속의 하얼삔, 하얼삔 너는, 이쁜 러시아여인의 멋도 가지고 있으면서, 향기로운 유방 드러낸 중국여인의 가슴이기도 하며, 한국 남성의 심벌이기도 하나니, 내가 정녕코 너를 노래 부르는 것은, 너가 한..중.러의 모습을, 모두 갖춘데 있어, 너를 생각하면 잠이 안 와, 내가 그곳에서 살았다면, 너는 나의 애인이 되어, 내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을, ….
나는 이글을 회상하여 쓰는 순간 즉흥시를 지어 보았다.
시제목은 <아아 하얼삔>으로 달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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