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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흑룡강 신문사와 민족정신

아미산월 2008. 8. 10. 23:53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0. 흑룡강 신문사와 민족정신

 

30. 흑룡강 신문사와 민족정신


◇초대소 곁의 시장풍경

우리 일행은 초대소 옆에 있는 조선족 한식당으로 가 아침밥을 구수한 된장국과 함께 먹었다.

그 식당 앞에는 「환영」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비녀 찌르고 한복입은 여인의 그림이 들어서는 문짝 하나로 붙어져 있었다.


◀흑룡강신문사 초대소옆 조선족식당앞에서(한춘시인과 필자)

큰길가에 있는 흑룡강신문사 골목안은 온통 시장바닥이어서 서민들의 먹거리가 즐비해 있었다.

우리의 재례식 시장과 다름없었는데 나로서는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같은 만두라도 이름은 같지만 맛은 다르니까.

특히 돼지고기같은 것도 보니까 같은 돼지고기지만 삶거나 요리해 놓은 빛깔과 냄새가 달랐다.

과일도 보면 이름은 우리의 것과 같지만 모양이 달랐다.

또 저 얇고 누른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두부피라 한다.

우리는 두꺼운 두부를 먹는데 그들은 얇은 껍질모양의 두부를 만들어서는 먹는 모양이다.

밀가루빵은 보기에는 좋아도 먹어보니까 질기고 간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억수로 신기한 것이 있었는데 지난 밤의 일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는데 젊은 청년들이 시장이 파한 이 길가에서 종이에 불을 사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꾸 종이를 태워 없애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종이를 불살라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

분명히 그건 휴지를 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알아 본 즉슨 소원을 빌기 위해 종이를 태운다는 것이다.

그 종이는 얇고 누른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길거리나 상점 가는 곳마다 꼭 김을 팔듯 종이띠로 묶어놓고 팔고 있는걸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불을 사루는 것이다.

길바닥에다 놓고 그대로 태우는 것이었다.

우리의 풍습에 의하면 촛불에 곱게 접은 한지를 태워 하늘로 올려보내거나 아니면 계곡의 바위밑에 촛불 켜놓고 소원을 비는 것에 비해 이들은 대부분 인파들이 파한 어두운 길바닥에 놓고 종이 태워 소원을 빈다는 것이다.


◇흑룡강신문사 방문

오늘의 일정 역시 빡빡한 관계로 서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낮 1시13분발 열차로 길림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얼삔을 정점으로 이제부터 한바퀴 돌아내려가는 셈인데 남하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흑룡강신문사로 향했다.

흑룡강 신문사의 김충일부총편(고급편집인)이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맞이해 브리핑을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흑룡강신문사 대회의실에서 김충일 부총편(부사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있다.(좌로부터 백월리 김충일 필자 한춘시인)

10층인지 기억이 삼삼하지만 신문사 회의실 벽에는 「기념건당 78년 당원대회」라고 붉은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려있었으며 창문가 TV위에는 좌우 나란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깃발이 나란히 달려 있었다.

바로 내가 간 이 땅은 중국주권의 땅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흑룡강신문사 사람들은 조선족 그러니까 우리 한민족이지만 남의 땅 남의 나라에 그들은 살고 있는 나는 우리의 땅이 아닌 남의 나라의 땅에 잠시 와 있는 것이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일행은 소설과 박월리씨, 그리고 나하고 정이랑, 이채운, 이별리, 이상월, 여섯사람.

흑룡강 신문사측에서는 김충일부총편 한춘시인(흑룡강신문사 문체부 편집담당)이 참석했다.

아는 이미 만주땅에 발을 디뎠을 때 특히 우리 한국과는 달리 조선족들이 각 지역마다 책을 펴내고 왜 문학을 하는가는 알고 있었다.

이곳 하얼삔의 흑룡강신문사가 왜 존립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는 브리핑을 듣고 알았으며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나 그저 취미로 생활이나 반영하고 뉴스를 전달하는 그런 매체가 아니라 이곳 만주땅은 나라잃은 그들이 민족정신 고취라는 큰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한국 언론과 조금은 다르다고 할까.

흑룡강신문은 1961년 10월1일 창간되었으며 전신은 1957년 3월1일에 창간된 목단강일보로 1983년에 와서 성급신문사로 독립했으며 급수가 제일 높은 신문이 되었다고 한다.

흑룡강신문이 「서울 신문특집」을 내게 된 것도 이례적이며 획기적이었다 한다.

그리고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에 서울지국을 두었으며 임직원은 180여명 모두가 조선족이며 조선족뉴스를 많이 다뤄왔다고 한다.


◀1999년 6월15일자 흑룡강신문

한국특집을 다룰 때는 주로 경제문제를 발췌해서 다루며 아울로 평양조식조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남북화해와 대외활동을 추진해 왔으며 아시아동계행사때는 남북기자들을 한자리 모아 남북화해정책을 모색했으며 조선족이 한족에게 억울함을 당했을 때 정부에 건의해 처리토록 하는 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조선족과 해외동포와의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데 교량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 사건은 상호 불리한 일은 회피하되 남북통일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꼭 기자를 파견해서 보도하며 다른 신문은 폐간해도 조선족신문은 폐간할 수 없다는 긍지를 가지고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한다.

하얼삔시가 조선족자치현은 없지만 다른 점은 준정부역할을 한다는 것.

1994년부터는 신문문예공모를 실시했으며 송화강 홍수때는 많은 지원이 되게 보도한 것이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출생문제였다.

조선족은 2명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이 없거나 현 중계제도에 의한 1명 정도 가지고는 민족의 생존문제가 걸려있는 것인 만큼 그 땅에 뿌리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야 된다는 것과 고향을 지켜야 된다는 것, 그렇지 않고는 조선족이 대대로 지켜나갈 땅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우려의 말이었다.

이는 지금 현실의 문제로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현재 추세로는 농촌의 젊은 인구가 도시로 몰리는 현상이며 거기다가 한국바람이 불어서 이동현상이 드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하며 누가 고향을 지키며 살려고 하겠는가.

이런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가 조선족들에게 잘 인식되게 해 나가는게 이 신문의 역할 가운데 하나라는 것에 그냥 넘길말이 아님을 실감했던 것이다.

김충일부총편(부사장)은 초대 한국특파원 제13대 한국특파원으로 한국에 와 거주한 바가 있으며 한춘(본명 임국웅) 선생의 경우도 흑룡강신문 서울특파원으로 근무한 바가 있는데 북한의 평양신문과는 자매결연을 맺어 잘 되고 있는데 한국의 한국일보 세계일보와의 자매결연은 현재 흐지부지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이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라는 것이다.

한춘선생의 말에 의하면 「서울찬가」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게 어쩌면 「경박호찬가」와 꼭 같은지 신기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곡은 같은데 가사를 바꾸어 그 지역성을 살려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만주땅이 살기좋은 곳이라 해서 「만주남도」라는 말이 있듯이 대중가요에도 보면 「복리만리」라는 노래가 있는데 만주를 찬양하는 노래로 되어있다는게 한춘선생의 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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