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14.탑산공원에 오르다
14.탑산공원에 오르다
◇발해탑 옆에서
북한의 혜산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탑산공원」에 올랐을 때 마음은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의주와 마주 바라보이는 단동에서 가장 넓은 강폭을 가진 압록강을 처음 대했고 다시 고구려 제2의 도읍지인 집안에서의 압록강은 그런대로 유유했었는데, 바로 이곳 장백에서 바라보이는 압록강은 강폭이 가장 좁아 시골마을 냇물을 연상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단동에서는 압록강 강상 위의 유람선을 타고 마음놓고 유람했었고 집안에서는 압록강으로 나가 목욕까지 했는데, 이곳에 오니 압록강이 지척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강가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황영성씨의 말에 의하면, 중국과 국경지대로 너무나 가까웁게 마주보고 있기로 만약의 일에 대비해 아예 삼엄한 곳이라 한다. 그리고 이곳 장백과 혜산과 교역을 하던 저 다리마저 지금은 건너가고 오는 이 없는 휴교(休橋)가 되어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바라만 보아야 할 그리운 내 동포의 땅인 것을 어쩌랴. 「영화루(英華樓)」라는 전망대에 올랐을 때도 돈을 내고서 망원경으로 북한땅을 맘대로 볼 수 있어도 사진 찍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좀더 거슬러 올라간 「령광탑」 옆에서 북한의 혜산시를 훔쳐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탑산공원」에 오를 때부터 충격적이었던 것은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여인상이었다. 이는 집안시 청사 앞에 세워진 피리부는 여인상과 사슴의 조화가 그러했고 환인 시가지 삼거리에 우뚝 솟아있는 오녀상 동상과 그 벽면의 사슴 조각상이 그러했듯 이곳 「탑산공원」에서도 사슴조각상과 어우러진 여인상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이며 또 하나는 천진한 아기를 안아 세우고 있는 여인상이 또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감히 말하느니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상징으로 탑을 세우는 것을 즐겨하고 있다는 생각이 곳곳에서 확인되었으며, 꼭 그것이 민족성을 풍기고 있는 것들로 조각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또 보면, 주로 대리석 같은 흰 빛깔 그대로를 살려내고 있어 더욱 자연미가 돋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우리 한국으로 볼 것 같으면, 물론 서구의 물결이 물밀듯이 밀려와 급격한 산업화의 발달로 우리의 것과는 전혀 무관한 빌딩이나 집들의 구조뿐만 아니라 조각상들이 현대미술 기법에 의한 세련미에 초점을 둔 나머지 우리 것의 냄새가 전혀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원에 세워진 탑이나 조각상도 말 할 것 없거니와 들어서는 관문조차 우리의 양식이 아닌 세계 어느 선진국에서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구조로 이뤄졌음을 보았을 때 크게 비교가 되니까 말이다. 몇해전, 장강삼협을 둘러보았을 때도 중국은 자기 나라 고유의 문양을 그대로 잘 살려낸 문화유산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참으로 부럽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게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고 덜 문명된 것같이 느껴져도 자기의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는데 더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필자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비(詩碑)나 기념비의 경우도 보면 그대로의 고유한 양식으로 보여주어야지 거기에 현대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새롭게 한다고 하면 그건 이미 탈색된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면서 「탑산공원」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는데도 조금도 손색없는 자연미와 그 나름의 고유미가 풍겨져 나왔음은 두말 할 나위 없었다. 「탑산공원」 정상쯤 되는 「영화루」까지 오르는 중간 관문이 「송운정(松雲亭)」인데 송운정 역시 언제 누가 어떻게 여기 올라 저 굽이치는 압록강을 유유자적하게 내려다 보며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 보내었는지는 몰라도 「서강월(西江月)」이라는 붉은 한문글씨의 시가 새겨져 있는 현판과 함께 지난 과거와 현재 시간을 잇는 듯하여 더욱 운치가 있어 보였다. 「영화루」를 지나면 산 정상 길옆에 말없이 세워져 있는 오래된 모습의 탑이 나타나는데 이름하여 「령광탑」이다. 고구려 첫 도읍을 정한 「오녀산성」이라는 이름도 옛 문헌에는 「홀승골성」으로 우리 민족의 이름이었던 것이 중국역사의 이름인 「오녀산성」으로 바뀌어 버렸듯이, 역시 이 「령광탑」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상징화 돼버린 것이었다. 즉 우리 한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발해탑」인 것이다. 발해시대(698년~926년)에 이곳 해발 869m의 산꼭대기에 쌓은 이 탑은 누각모양으로 이루어진 벽돌탑으로 맨 아래층 처마밑 네 면의 가운데에 네모난 창살 창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탑은 발해시대의 문화와 건축물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장백의 정서
장백조선자치현 제2실험소학교 미술교사이며 시와 소설 평론 칼럼까지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한몸에 지니고 오직 예술적 삶에 목숨을 걸어 온몸을 투신한다는 강한 열정을 토로했을 때 나는 그의 예술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테니까. 내가 만난 사람중에 보기드문 열정을 가진 시인예술가는 몇 안되었으니까 만주땅에 와서 나와 같은 집념의 사나이를 만났다는 것은 어찌보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독신으로 살고 있는데 독신의 삶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밝혀 주었다.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등돌리고 가 지금은 북경인가 상해인가에 가 있다고 했다. 그 상처도 그에겐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예술적 삶에는 뿌리를 뽑겠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는데, 역시 북한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음은 배제할 수 없었음이 군데군데 밝혀져서 못내 안타까웠다. 이념투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조심스럽게 내 뜻은 다 비쳤지만 그는 해질녘까지 「탑산공원」의 「령광탑」 옆 벤치에서 웅변을 하듯 북한 김일성 사상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두 손을 치켜들고 격분하면서 때론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북한을 고립시킨 중국과 한국 미국에 대해서도 따가운 시선을 던져주었다. 앞으로 북한이 가장 위대하며 부유한 강대국이 되리라고 확신한다는 그였다. 우리 일행은 같은 문학을 한다는 의미에서 동포애로써 그를 대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온 우리들에겐 아주 친절했으며 그렇게 잔정이 우러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보면, 어둠이 내리 깔리는 「탑산공원」을 내려와서 주점에 들러 저녁을 들고 숙소인 호텔로 들어와서도 자정이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튿날 아침, 백두산을 가기 위하여 연길로 떠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기까지 우리는 아쉬운 이별앞에 한참을 서성이기도 했던 마음들이었다. 그래도 조선족에 대한 자긍심은 강한 그였다. 장백현은 유일한 조선족자치현으로 간판 글씨가 모두 한글 우선이라는데 우리 일행은 깜짝 놀랐다. 보아하니 실제로 그러했다. 어느 입간판이나 유리창에도 한글이 위에 쓰여져 있었고 중국의 글인 한자는 아래에 쓰여져 있었다. 이만한 민족 자긍심을 가진 곳이 장백현이라는 것이었고 사실 장백현이 그러했다. 아마도, 이번 여행 가운데 가장 깊숙이 들어온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장백은 이렇듯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땅같이 인식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형제들이 자치현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는데 새로 발견한 그 무엇에 대한 기쁨같이 여겨졌으며 한편으로 서로 다른 운명의 선으로 갈라져 모르고 각기 살아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아니면 가련해보이기까지 한 이곳에서 느낀 정서라 할까.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두 동강 세 동강으로 갈라져 밥상을 따로 하거나 남의 밥상 앞에서 살아가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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