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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백현으로 가다

아미산월 2008. 8. 10. 23:28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 12. 장백현으로 가다

 

12. 장백현으로 가다

◇송강하역에서

 

만주족 집에서 일제히 기념촬영을 하는데 유효우양의 외할머니도 함께 참여했다. 유효우양
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별이 못내 아쉬운지 우리 일행을 다시 붙드는 것이었다. 좀더 있다
가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는 거였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과 표정으로 충분히 읽
을 수 있었다.

짐을 꾸려 짊어지고 생각에 없던 인연을 뒤로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유효우양과 그녀의 어
머니가 송강하역까지 따라 나왔다. 송강하역으로 나오는데 어젯밤에 못보았던 코스모스를
비롯해 나팔꽃 등 여러 빛깔의 꽃들이 길가에 피어 있었다. 우리네 한국정서와 다름 없었다.


◀송강하역앞에서 필자의 민족서정시집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를 펼쳐보이고 있는 만주족소학교 3학년 유효우양

 

우리 일행을 따라 나오던 유효우양은 언제 발견했는지 송강하역 철길 앞에서 나팔꽃을 따서 들고 오더니 다시 내 옷 단추구멍에 꽂아주며 "이쁘다!"하는 표정으로 좋아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동심은 똑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어른들이다. 어른들이 역사를 만들고 비극을 만 들고 갈라서고 돌아서고... 그렇게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 왔으니 그게 이제와서 보면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법이 달라 서로 오가고 정을 나누는데도 국경이라는 무서운 룰때문에 상봉하지 못하고 늙어가는 신세들이 얼마나 많은가.

몇 천년 전을 거슬러 돌라가 보면 족속은 달랐다지만 피가 섞이고 섞여온게 수천년이니 따
지고 보면 같은 피의 동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단지 호적을 달리해 왔을 뿐인 것을.
특히 만주땅이나 한반도의 경우는 동질과 이질의 민족들이 함께 수천년을 공유해 왔으니까
말인데 다 같은 친족, 조상이라 해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백제만 해도 그러했듯
이 신라나 저 바다 건너 일본의 경우는 고대 중국 서불(徐佛)이라는 사람이 선남선녀를 거
느리고 가서 거기 토착했고 백제 이민들까지 건너간 것이고 보면 그들도 어찌보면 같은 피
의 조상을 가졌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국가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게 아닌 듯 각 나라마다 서로 잘난 듯 뻐기면서 지내니
까 동질이 아니라 이질의 독립된 민족인 것처럼 행세해 온 게 역사이고 보면 그것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속해 있는 그 나라 국민들이다.

만주족이라는 레테를 달고 있고 우리 일행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레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그 만주족 집에서 그들과 우리 일행이 하룻밤 기거하며 함께 했다는 것은 오랜만에 멀
리서 찾아온 친척과 같은 인정 다름아닌 것이다. 오랜동안 언어와 풍습을 달리해서 언어소
통은 안 되었지만 의사소통은 전혀 무리없이 이루어진 것만 봐도 동질이라고 감히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평소에도 내 역사의식은 늘 단군왕검때부터 뻗어내려 온 것에
대해 특히 주변국들을 생각하면 한통속의 피가 섞여 있음에 조금에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
기 때문이다.

유효우양의 어머니는 송강하역 밖으로 나와서도 장백현으로 떠나야 하는 우리 일행을 위해
7인승 승합차를 교섭해 불러오는 등 마음씀을 아끼지 않았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우
리가 나서서 교섭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무쏘는 아니데 꼭 무쏘같이 생긴 승
합차를 유효우양 어머니가 교섭해 와 우린 그걸 타고 떠나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유효
우양에게 내 시집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를 한 권 한자로 싸인해서 건네주었느네
그녀는 내 시집을 받아들고는 여기저기를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장백가는 길

 

유효우양과 그녀의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역시 난생처음의 길 위에 들어서서 장백현
으로 향했다. 그때 시각이 오전9시40분이었다. 장백이라는 생각 속에는 백두산이 중국땅에서
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니까 그 이름의 장백이다. 또한 백두산에서 압록강물이 발원하
여 내려오는 첫번째 도시쯤 되는 걸 미루어 짐작하고 있기도 하기에 그 장백으로 우리는 가
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지나간다. 이도백하에서 장백으로 들어가는 길, 백두산으로 가는
길, 연길로 가는 길 세갈래로 갈라지는 것도 그곳에 가서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은 이
도백하를 지나서 장백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장백은 유일하게 조선족자치현이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으며, 가장 강폭이 좁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
로 한국에서도 TV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많이 들어왔던 터이다. 압록강 하류의 북한쪽 신
의주와 중국쪽 단동과 철교가 연결되어 서로 오가고 하듯이 장백도 북한쪽 혜산과 다리 하
나를 두고 오고갔던 곳이다.

장백현까지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였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림이 펼쳐져 있는 것은 이번 기
행에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가다가 어느 맑은 개울가에 좀 쉬기로 했다. 경치
가 수려하고 창밖에는 산림을 뚫고 흘러내리는 물이 여간 맑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가다가 보니까 '長白山'이라고 쓴 시멘트벽으로된 입간판이 나타났다. 이 깊은 산중에
오가는 차량은 버스를 합해서 몇 대 되지 않았다.

우리 일생은 중국인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조금 쉬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알아차린 듯 차를 세웠으며 우리가 냇물에 가 발을 담그고 준비해 온 김밥을 꺼내 먹고 휴
식을 취하는 동안 그 중국인 운전사는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냇물에 발을 담그는데,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차거운지 1분도 참지못할 정
도였다. 참으로 깊은 산골임을 체득할 수 있었다. 이런 삼림과 냇물이 아직도 있다는 생각이
신비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윽고 오후1시50분이 되어서야 우리 일행을 실은 승합차는 장백현에 도착했다. 시가지를
들어서는데 압록강이 바로 눈앞에 보였으며 강건너 북한의 혜산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었다. 우리가 '아!'하고 기다렸다는 듯 반가움이 앞섰다.

이곳에서는 황영성이라는 조선족교사를 만나기로 사전연락이 되어있어 황영성씨가 근무하는
소학교로 찾아갔다. 우리네 어릴적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이지만)와 다름없는 초라한 단
층건물 그대로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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