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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松江河, 만주족 집에서

아미산월 2008. 8. 10. 23:26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 11. 松江河, 만주족 집에서

 

11. 松江河, 만주족 집에서

◇밤열차 안에서

 

5시간의 지루한 밤열차임을 직감한 나는 소설가인 내 친구 박월리씨와 함께 식당칸으로 가
서 아예 거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을 했다. 우리 일행은 남자 셋, 여자 셋인데 소설가 박
월리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구시인학교의 내 제자들일 뿐만 아니라 미혼이다. 입석표를 가
지고 승차했기에 빈 좌석이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제자 아가씨들이 우선 좌석을 먼저
차고 앉았고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식당칸으로 연락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식당칸에 계속 있는 것도 지루할 때는 우리들 짐이 실려있는 객실을 오가고 하면서
말이다. 얼마 안 되어 연락이 왔다. 누군가가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어서 박월리 이상월씨
가 객실 안으로 가고 나만 혼자 남아서 깊어가는 밤의 이국땅인 바깥 풍경을 보려했으나 깜
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잠시잠깐씩 열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했으나 어
디인지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이런 걸 유랑이라 하는지 방랑이라 하는지는 몰라도 난생처음 만주땅에 와서 겪는 무대책의
전진이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그런 시간의 흐름쯤에서 이별리씨가 내게로 와서 전언하는 것
이었다. "선생님, 가 보아요. 어린 여학생인데 아주 맹랑하고 똑똑해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어요. 중국 소학교 어린이인데 노래도 잘 부르고 생긋 웃기도 잘해요" 는 거였다.

안그래도 심심하고해서 또는 객실 안 분위기가 어떤가 하고 심심하던 차에 이별리씨를 먼저 돌려보낸 나는 맥주와 시켜놓은 두 접시의 안주를 그대로 두고 객실로 돌아와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노랑나비같이 노랑색깔의 옷을 이쁘게 차려입은 중국인 소학교 어린이를 모
두 귀여워하며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 애의 부모들과 친척도 동행한 모양이
어서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떠들어대며 사진도 찍어대곤 했었다. 나에게는
이 중국애만한 딸냄이가 있어 더욱 마음이 쏠리기도 했지만 중학교 시절 문인이 되기를 처
음 꿈꾸던 시절 강소천같은 아동문학가가 되는게 소원이었으며 그래서 나중에 아동문학가까
지 된 자신이고 보면 어린 것에 대한 애정이 늘 내 마음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나
도 한몫 끼어들어 그 애와 놀아주게 되었다.

먼저 나는 한국돈 1만원짜리를 한 장 건네주었는데 보아하니 벌써 그 애는 1000원짜리 한국
지폐를 먼저 받아들고 있었다. 왜 내가 어린애에게 1만원짜리를 주었는가 하면 이것도 인연
이라 내 딸냄이를 사랑하는 마음같이 무얼 하나를 사더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애에게 내 여행수첩을 내밀어 주소와 이름을 써서 받게 되었는데 중국어인 한자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는게 여간 또 대견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통화시 중국인 소학교 3학
년으로 이름은 '유효우'이다. 나이는 열살로 아버지가 통화시 철도공무원인 모양인데 송강하
역 부근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집으로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가는 중이었다. 일행은 유
효우양의 부모,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오빠, 외삼촌 등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유효우양의 아버지였다. 우리 일행과 같이 앉아 있
었으며 마주 보며 앉아있는 이들도 가족 일행들이었다. 통로 이쪽 좌석에는 나이드신 어른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이 분이 바로 요녕성 조선 소학교 교사를 지낸 분으로 정년퇴직
하고 아들 가족들과 백두산 관광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일행과 유효우양 가족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해 주셨던 것이다. 언어가 달라 영 대화가 안 되기에 한국말과 중국말을 통용하며
의사전달을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유효우양과 조영제선생과도 기념촬영을 하
며 복잡한 객실안이었으나 무려 5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송강하까지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추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 일행들의 여행
은 바로 고급관광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갖는 여행인 만큼 인간미까지 흠뻑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주족집에서의 1박

 

몇 시간 되지 않지만 정든 만큼 우리 일행은 유효우양가족과 함께 송강하역에 내렸는데 시
각이 밤 2시였다.

주위는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갈 데도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언어도 통하지 않
는다. 이걸 어떻한담? 무작정 내렸는데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손 흔들어보이는 그게 전부였다.

이때였다. 유효우양 어머니가 무어라고 말은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때 유효우양
아버지가 두 손을 모아 한쪽 뺨에 갖다대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잠자는 시늉을 해보이
는 거였다. 이걸 벌떡 알아차린 나는 '아, 함께 가자는 것이구나!', '잠 잘 곳을 마련해 주겠
다는 것이구나!'로 판단하고 나 역시 응답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따라가겠다는 전진의
손짓을 해 보이고는 어둠속을 따라 걸어갔다. 남들같이 역사를 통과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로변을 따라 어느 정도 걸어 가니까 어두운 나무판자로 막은 울타리 사이 골목이 펼쳐졌 으며 대문이 눈앞에 보였다. 곧장 따라 들어가니 철도관사였다.

낯선 중국인 집에 들어서니 불이 환하게 켜지고 기다렸다는 듯 유효우양의 외삼촌 되는 사
람이 반가이 맞아주었는데 자기들끼리 우리 일행이 왔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금도 불편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술을 마시자는 것과 저쪽 방에 짐을 풀어라는 것과 다 함께 이 관사에서 투숙할 수 없으니
남자들은 이웃에 있는 집으로 가서 잠을 청하라는 것은 눈짓 손짓으로 다 알아차릴 수 있었
으니까 말이다.

우리 한국의 시골과 다름없이 한밤중인데도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는데 유효우양의 외할머
니였다.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우리 일행은 다 알아차렸던 것이다. 유효우양의 외삼촌이
그 외할머니의 맏아들이며 유효우양의 아버지가 둘째아들로 보였다는 것과 여러 정황들이
느낌으로 와 닿았다.

이건 우리가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지만 유효우양의 외할머니도 아주 신기한 모양이었다.
난데없는 한국인 6명을 데리고 들어왔으니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 한밤중의 홍두깨
가 여기 적용된 것은 그 할머니의 입장에서 더욱 그러했으리라. 있잖은가, 시골 할머니들,
사람들이 찾아오면 무조건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시골인심 그와 같았다. 신기한 듯 자꾸만
바라보았을 뿐만아니라 편하게 쉬어라는 뜻으로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겉옷
을 벗고 잠자리에 들라는 뜻 같았다.

우리 일행중 남자 셋이 취침하러 옮겨간 곳은 전통적인 만주족 집이었다. 대문을 지나고 마
당을 거쳐 들어가 보니 방안에 침대같이 생긴 온돌과 이불이 개어져 있었으며 서랍 식탁등
이 방안, 즉 한 공간 안에 있었다. 온돌방이 아닌 온돌이 한쪽 벽면 옆에 침대처럼 만들어져
있었으며, 자연히 신발은 안에서 벗고 침대에 오르듯 잠자리 들 때 신발을 벗어놓고 온돌로
오르면 되는 그게 만주족의 전통가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순전히 상상을 초
월한 어느 날 문득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주족집에서의 아침

 

곤하게 떨어져 잠을 자고서 내가 먼저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였다. 좀더 잠을 청하
고 나니 8시 정도 되었을까. 문밖 마당에는 벌써 일어나서 찾아온 유효우양과 그녀의 외할
머니 아버지 어머니 외삼촌이 와 있었다.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인기척과 함께 예감이 들어
일어나 보니 더욱 확연하게 눈에 띄는 전형적인 만주족 시골집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마당
에 마련해 준 장독의 물과 물바가지로 물을 세숫대야에 퍼담아 일제히 세수를 하고 나니 수
건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장독뿐만 아니라 빨래줄이 쳐져 있었으며 뭇 꽃들이 피
어있는 꽃밭과 저 앞쪽으로는 텃밭이 보였고 오른쪽 포도넝쿨을 지나서는 화장실이 중국 재
래식 그대로 나타났는데 밑이 없었다. 한국의 전형적인 시골집과 다름 없었는데, 친근감이
드는게 이러한 시골정취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며 어찌 보면 우리의 생활풍습과
별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유효우양 아버지가 아침식사 하러 가자는 손짓을 알아 차리고 식사하러 갔는데 지난 밤 도
착해서 처음 짐을 푼 관사와 골목 하나를 두고 이집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 관사는 깨끗하
게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꽃사과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빨간 꽃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식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먹는 풍습이었는데 남자들이 먼저 식
사하고 나서 여자들 일행이 먹게 되었다. 역시 그들은 아침부터 술을 꺼내와 반주로 드는
거였다. 귀한 뱀술을 가져왔기에 나도 한잔 하고 나니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유효우양 아버지는 꽃사과를 따고 유효우양은 그걸 받아 조그만 바가지
에 담고 해서 모인 꽃사과를 맛있다고 먹으라 권하기도 했으며, 다시 할머니집으로 나온 우
리에게 무엇이라도 대접하려고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유효우양은 나의 손을
끌어 그녀 어머니를 따라 갔는데 텃밭에는 참외와 자두나무의 자두 또한 주렁주렁 달려 있
었다. 그걸 또 한 소쿠리 따와서 먹으라고 우리 일행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유효우양은 상냥하고 발랄했으며 대화가 되지 않는데도 늘 싱글벙글했다. 내 곁에 다시 오
더니 코스모스 꽃잎을 여러 개 따와서는 내 옷 단추구멍마다 끼워주는 애교도 보여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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