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10. 통화라는 곳
10. 통화라는 곳
◇통화가는 길
정확히 말해 8월17일 집안시를 빠져나온게 오후1시40분이었다. 내가 놓치기 아쉬웠던 것이 바로 집안시 청사앞에 세워진 「피리부는 여인과 사슴상」이었다. 만주땅 어디를 가나 길거리나 건물앞에 세워져 있는 조각상을 보았을 때 남다른 감흥이 우러나왔음을 여기에서 밝혀둔다. 그것도 그 지역냄새가 물씬나는 고유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게 내 마음에 아주 흡족하게 다가온 것이다. 반면에 왜 우리 한국은 그렇지 못한가 하는게 나의 반항심이었다. 모든 가옥이나 건축디자인 또는 장식들이 서구화된 예술감각으로 도배되어 버렸기 때문이며 고유한 멋은 어디에서도 잘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묵살시켜 버리기 일쑤니까 이 기회에 이곳 만주땅의 정서와 비교해서 소개해 적어두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환인시가를 빙돌아흐르는 다리기둥을 비롯해서 보잘것없는 시골 그 어디를 보더라도 우리 한국과 같이 그저 둥글게 세우거나 모나게 세우거나해서 특색없이 다리난간을 떠받치는 기둥이 아니라는데 나는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하천이 나타나면 으례히 다리 기둥을 보게 되었는데 가는 데마다 하나같이 특징있게 아치형이라는 것과 아치형 사이로는 다시 원형기둥 모양의 둥근공간 미를 잘 살리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안가본 사람은 전혀 모르겠지만 이는 예사로 보이지 않았음을 또한 여기에서 밝혀두는 바이다. 그리고 움직이면서 급속히 지나가는 차창밖 풍경이라 일일이 다 카메라에 담지못한 아쉬움이 컸던만큼 환인시 혼강의 다리난간을 받치고 있는 풍경의 사진을 대신해서 소개한다. 집안에서 통화로 가는데는 2시간20분이 소요되었다. 부산식당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고 한 대의 승합차를 잡아타고서 우리 일행은 아쉽게도 집안시가지를 빠져나왔는데 이 길 위에서도 몇 개의 아치형 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가까운 거리는 아닌 도시와 도시를 바통받듯 이어가는 행로는 쉴틈이 없었다. 남아있는 일정을 향해 잠시도 긴장을 풀 수없었기 때문이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들어올때처럼 큰 강은 따라붙지 않았지만 우뚝 솟은 절경의 산이라든지 옛 모습을 한 중국 고유의 건물들이 눈에 띄었으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었다.
◇통화역에 오다
통화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마디로 황당했다. 우리 일행 6명 모두가 한국인일뿐 중년의 운전기사 중국인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우릴 내려놓기만 했을 뿐 다음의 대책을 어디에 물어볼데도 없었으니까 이곳에서도 버려진 몸이 되었다. 집안을 떠나오기 전 우리를 안내했던 최씨가 통화에 가면 험악한 곳이고 소매치기가 많으니 특별히 조심하라고 당부의 말 그것만 기억에 담고 있는 것뿐이었다. 어쩔수 없이 두리번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백을 가려면 일단은 이도백화로 가는 열차를 타야하는건 알아 먼저 열차표를 예매했는데 밤 9시9분발이니 남은 시간만해도 적은 막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다가 찾아들어간 곳이 「장백산 천지주점」이었다.
◇「장백산 천지주점」에서 만난 사람들
한국식으로 말하면 관광호텔인셈인데 그곳 로비로 들어가 일단 짐을 내려놓았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미모의 조선족 여인이 마담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었으며 흰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쇼파에 앉아있는 중년남자를 발견했는데 우리 일행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분은 한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미국으로 가 이제는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 통화에 와서 「장백산 천지주점」총경리직을 맡고 있었다. 본인은 건강상 이유로 휴양하러 이곳에 와 있다고 했는데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난 뒤에야 알았지만 알고보니 민주공화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성낙현씨였다. 어쨌던 반가웠다. 바로 이 분이 로비에 들어서는 사람을 불러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 앞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역시 알고보니 이곳 문인들이었다. 이제 막 「압록강」이라는 문예잡지 창간호를 낸 팀이었다. 통화시 조선족예술관 관장이며 통화시 조선족예술가협회 주석 겸 「압록강」주필인 조용호씨와 시인 리경수씨, 그리고 먼저 들어와 우리 일행과 통성명하며 한국의 문인들이 왔다고 더없이 반가워하면서 온정을 베풀어준 소설가 정창호씨를 잊을 수가 없다. 곧이어 나올 「압록강」제2호에서는 한국시인특집으로 나의 시 10편을 수록하겠다고 즉석에서 제의해와 승락하기도 했지만 압록강을 끼고 있는 집안도 아닌 통화에서 「압록강」이라는 문예잡지가 나왔다는게 나에게는 놀랍고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압록강」문예잡지 부주필겸 책임편집을 맡고 있는 정창호씨는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같은 성씨인 정이랑 시인을 두고는 오빠 동생하자고 했으며 특유의 언변과 순박한 유머감각에 정감이 듬뿍 들어 10년이상 알고지낸 사이같이 돼버렸다. 그곳에서의 저녁식사도 정창호씨에 의해 이뤄졌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갈길이 멀기에 우리 일행은 이미 밤 9시9분발 송강발 송강하로 가는 열차표를 예매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표를 잘못 예매하는 바람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인데 좌석표가 아닌 입석표임이 이제와서 확인되었던 것이다. 정창호씨가 사람을 시켜 바꿔보려고 했지만 이미 소용없이 돼 버렸기에 어쩔수 없었다. 기약에 없던 만남이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남긴 채 또다른 미지의 도시 송강하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성낙현씨와 정창호씨는 통화역 대합실 안까지 마중 나왔는데 한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같은 피의 진함을 피부로 느끼며 어둠속을 헤엄쳐가듯 우리 일행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몸이 되었다.
◇송강하 밤열차 안에서
밤 9시가 되었는데도 통화역 2층 대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발 디딜틈도 없었다. 한국으로 보면 명절때 북적대는 대합실과 다름없었다. 이 열차를 타면 송강하를 지나 이도백하에 이르게 되는데 백두산을 가려면 육로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바로 이차가 백두산 가는 길목까지 운행하는 교통수단인 것임을 알았다. 또한 하루에 한두번밖에 운행하지 않는게 대부분이어서 가는 곳마다 북적대지 않는 곳이 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열차에 올랐을 때에도 발디딜 틈이 없어서 여간 애를 먹은게 아니었다. 좌석표도 아닌 입석표를 가지고 타야하니 더욱 난감한데다 열차 칸칸마다 이미 만원이니 뚫고 들어가는데도 숨이 막혔었다. 안스러운것은 어린애들이 어른들 사이에서 푹 파묻혀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해 울어대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살아가는 것도 고생인데 잠시잠깐 차를 타고 오가는 것까지 고생이라면 이 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힘센자가 이긴다고 길을 내어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맨 앞에 선발대는 나였다. 어느 칸을 올라 들어서든 간에 일행은 내뒤를 따랐다. 승차하기 전에 그곳 통화에서 그들이 가르쳐준게 있었다. 즉 좌석이 없더라도 먼저 앉는자가 주인이니 양보하지 말라는 것. 그러다보면 중국인들은 아무말 못하니 대범하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하루 5시간을 가야하니 그들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중국땅은 위계질서가 확립되지 않아서 모든게 그대로 지켜지는게 없었으며 목소리 큰 자가 이기고 먼저 앉는자가 왕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동네임엔 분명했다. 뒤에 가서 다시 말하겠지만 되는 대로 움직이는 중국인들의 습성이라는걸 여러 군데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분명히 주황색 중앙선이 있는데도 지켜지는 것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했으니까. 중앙선이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추월선과 같을 뿐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먼저 질러간 자가 왕인 것이다. 또 하나를 보면 그들은 바쁜 것이없다. 바쁠리도 없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아래서 시키는대로 움직여나가면 되는 것이지 자본주의체제같이 바삐 움직여 더 열심히 하려는 의욕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가 낙후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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