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9.장군총.광개토왕비를 가다
9. 장군총.광개토왕비를 가다
◇장군총을 찾아서
여름날 햇빛은 강렬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은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과거시간 속으로 가는 그 연속이다. 누가 이를 막으며 잠든 자들을 깨우랴. 「오회분 4호묘」에서 나온 찬란한 광채같은 흥분을 가라앉힐 길 없이 10여분 남짓 시골 농촌마을길을 접어들어간 곳에 「장군총」이 이었다. 만리장성을 두고 누가 그토록 큰 돌덩이를 옮겨다가 쌓았나 할 정도로 「장군총」이 그러했다. 한두개도 아닌 1600여개의 큰 돌덩이를 갖다가 쌓는데는 수백수천날이 걸렸음은 물론이거니와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을 연상해 보면 알 수 있듯 우리에게도 「장군총」이 있다는 건 이곳에 와서 보면 누구나 그 웅대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장군총」을 두고 중국인들은 「찬란한 동양의 금자탑」이라 부른다고 한다. 아쉬웠던 건 누가 여기에 묻혔느냐는 것인데 그게 알길이 없으니 답답한 것이다. 거대한 그 무덤속에 어느 분이 잠들었는 가가 오랜 세월이 지나간 후에는 알 길없이 돼버렸고 표석마저 없으니까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곳 집안땅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부터 광개토대왕까지 400여년간 집정한 제2의 도읍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건 분명한데 이 「장군총」을 두고 광개토왕릉이니 장수왕릉이니 하니 그 확실한 해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보고 들어보니 장수왕릉일거라고 유력하게 말하는 걸 들었으나 이 역시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장수왕은 도읍을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겼는데 왜 장수왕일까하는 이런 의문도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오색찬란한 벽화로 수놓인 「오회분 4호묘」 역시 주인없는 무덤으로 남았을 뿐만아니라 육신마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행방을 알 길 없으니 살아있을 때의 부귀가 죽어서 더욱 무상하니 이는 자손 만대로 영원하리라는 기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곳이라 볼 수 있다. 돌계단을 밟아 석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느낌은 이러했다. 장군총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 벽과 바닥 천장 모두 다듬어진 큰 돌로 짜맞추어 이뤄놓았는데 옛사람들의 지혜 가운데 하나 빠져있는게 있다면 돌침대같이 넓적한 돌을 바닥에 깔아 죽은 자를 안장했을 때 거기다가 칠성판처럼 돌바닥에나마 글을 새겨놓았더라면 누구의 무덤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것에 만큼은 착안해내지 못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절절하게 드는 것이었다. 잠시 후가 되면 찾아가는 「광개토대왕비」의 경우는 비록 땅속에 묻혔던 세월이 오래 되었으나 돌에 글을 새겨놓았기에 후대 우리들이 고대역사를 바로 아는 지름길이 되고 있는데 무덤마다 죽은자가 누웠던 그 큰 돌 바닥에라도 그 주인공의 글을 새겨 놓았더라면 오히려 육신보다 천년 만년 더 오래 갈게 아니냐는 말이다. 허무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육신은 어디로 가고 없다는게 이곳 「장군총」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1500년이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육신도 없는 무덤 안을 들여다 보며 할말을 잊을 뿐이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옛사람들의 지혜 가운데 하나인데 들어오는 무덤 안 입구에 9m 깊이의 우물이 있었으며 그 안에 사람을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장군총」에서는 돌계단으로 쌓아올린 웅장함에 비해 벽화 하나 없다는게 오히려 의아하게 여겨졌다. 「오회분 4회묘」의 경우는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것에 비해 장군총은 광개토왕이냐 장수왕이냐 말하고 있는데 벽화없는 무덤 그대로 이니까 말이다. 또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장군총」정상에 올랐을때다. 그리 높지는 않은 들판 한가운데 안치된 이 「장군총」이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뒤쪽과 좌우 양편을 둘러보니까 관계자의 설명과 같이 뒤쪽은 현무의 형상, 좌우로는 좌청룡 우백호로 삼면의 산능선이 「장군총」을 감싸고 있었으며 앞쪽에는 압록강이 바라보이며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건 또 압록강인데 강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보이고 흘러 나가는 것은 실제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명당이라는게 이곳에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압록강은 사실인 즉 이때만의 압록강이 아니었다. 고구려 이전 단군조선때부터 50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압록강이었던 것이다.
◇「광개토왕비」앞에 서다
광개토왕비는 「호태왕비」로 그렇게 부른다. 백두산을 중국측에서는 장백산으로 부르는 것과 다름아닌 것이다. 장수왕이 부왕인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1400년이나 되는 긴 세월동안 외롭게 잊혀진 채로 지내다가 환인현 사람들에 의해 현장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그것이 입증되어 1897년에 와서야 땅속에 파묻혀 있던 걸 찾아내서 말똥을 발라 태움으로써 비문에 새겨진 글씨를 판독하게 되었다한다. 조선왕조에서도 모르고 있는 걸 1882년 중국인으로 변장한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스파이인 당시 일본 육군 소위 사꼬에 의해 탁본되어 그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우리 한국측에서도 까맣게 모르고 지냈는데 일본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이 석비의 글씨조작사건까지 이뤄져 더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보면 그 내용이 바로 왜가 신라.백제를 신민으로 삼았으며 조공을 받쳤다는 억지주장의 내용으로 변조된 것이다. 지금도 그곳 심심산골에서 은거하며 지내는 최수남옹이 있는데 광개토대왕 석비에 새겨진 1775자 중에 1650자 정도는 판독하고 있는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한다. 그분이 이 세상을 뜨기 전에 우리 민족이 해야할 일은 최수남옹의 판독과 증언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관계자는 안타깝게 말해준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무얼하고 있느냐는게 중국측 조선족들의 답답한 심경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더욱 이글거리며 내리쬐었다. 씁쓸한 입맛은 광개토대왕비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공안국 안내원들의 감시가 이만저만 심한게 아니었다. 광개토대왕비 사진도 근접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며 모르고 찍더라도 발견되면 달려와서 물어뜯듯 카메라를 빼앗아 가버린다. 먼저 내가 비디오카메라로 찍다가 공안국 아가씨에게 들켰는데 모면했으나 어떤 한국인 관광객은 비디오 모양으로 생긴 카메라를 가지고 찍다가 적발되어 이제는 공안국 아줌마가 저쪽에서 뛰어와 달려들어 그 카메라를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곁에서 우리가 그건 비디오 카메라가 아니라고 말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어쩌랴.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의 것은 없는 만주땅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해답일 뿐이다. 자신이 살던 집이나 전답을 남에게 내어줘놓고 몇 십년이나 몇 백년, 몇 천년 뒤에 가서 주장해봤자 헛것이된다는 말이다. 다른 관광객들도 다 떠나고도 우리 일행은 늦게까지 남아있었지만 광개토대왕 비문마저 말이 없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없이 이곳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더위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기 위해 이곳 집안에서의 어젯밤 멱감던 압록강 그 강가로 우리는 대기해 놓은 차량으로 다시 찾아갔다.
◇집안의 압록강
이곳 만주땅에 와서 두번째로 만나게 된 압록강을 햇볕 쨍쨍한 환한 대낮에 마주하니 감회는 더 새로웠다. 강건너 저쪽은 아직도 갈 수 없는 북한땅이니 어딜 둘러보나 편칠않았다. 이게 역사이며 우리들이 짊어진 운명이란 말인가, 하느님도 무정하시지 안그런가. 압록강변에는 때이른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저 강물은 그냥 비켜갈 뿐 「너도 말이 없구나」하는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도 내 조국, 내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강에 어린애처럼 멱감아보고 물장구 쳐보는 것만으로도 다소 마음이 뿌듯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깨달은 것은 모든 역사는 과거시간 속으로 잠들어도 시간밖으로 나와 출렁이거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강물이나 산, 하늘의 구름, 꽃송이 같은 이런 것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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