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4.환인조선족학교와 양걸무 춤사위
4. 환인조선족학교와 양걸무 춤사위
◇환인 조선족학교를 찾아
김안영 선생댁에서 나와 혼강가로 더위를 식히러 가기전에 우리는 조선족 중화요리 식당에 가서 쫄깃쫄깃한 냉국수를 한 그릇씩 시켜 먹었는데, 한국에서의 맛과 흡사하여 먹을만했다. 이곳 환인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시게 된 분들도 다같이 교편을 잡고 계시기에 먼저 간 곳은 환인 조선족학교였다.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종합학교로 마침 정문을 들어서려는데 그 소학교의 조봉철 교장선생님(54)을 만나게 되어 함께 기념촬영을 하게 되었다. 환인 조선족학교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환인만주족자치현 조선족학교」다. 그러니까 이곳은 2000년전에 주몽이 나라를 세운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으나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만주족들로 구성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조선족의 인구수는 800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학교가 있어 우리말을 배우며 우리의 민족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는건 다행한 일이 아닐 수없다. 이곳 조선족학교의 초중 2.3학년, 고중 1학년「조선어문」교과서에 김소월의 <접동> <새> <초혼><진달래꽃>,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폭풍을 기다리는 마음>등과 시조는 <장백산에 기를 꽂고> <한산섬 달밝은 밤에> <태산이 높다하되> <가마귀검다 말고>를 비롯해서 윤선도의 <오우가>, 남이장군의 시조가 실렸으며 <관동별곡> <청산별곡> <성산별곡> <농가월령가> <춘향전> <양반전> <규장전>등 고전문학, 조명희의 <낙동강>, 최해서의 <탈출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등이 조선문학 파트에 실려있다는 말을 듣고 그나마 마음이 따뜻하게 울려왔다. 올 9월부터 새로 개편되는 고중 1학년 교과서에는 <단군신화> <구운몽>이 수록된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들과는 달리 중국문학도 필수로 다루고 있는 현실인 것을 어쩌랴.
◇오녀동상 앞에서의 춤사위
혼강가에서 해지도록 앉았다가 일제히 일어나 걸어 나오는 저만큼한 거리의 삼각로터리에 밤불빛과 함께 우뚝 솟아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더위도 잊은 채 많은 사람들이 나와 신나게 춤을 추며 빙빙 돌고 있었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 흥겨운 잔치마당 같았다. 그게 차들이 다니는 도로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왔기에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이곳 환인이라는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춤사위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구경꾼이 되어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조선족인 김안영 선생과 일행인 정이랑 시인마저도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친목적인 분위기였다. 하도 신기해 물어본 즉, 이곳 동북성에서 유행하는 「양걸무」라는 동북성 한족춤으로 흥과 건강을 함께 복돋우는 집단춤이라한다. 저녁밥을 먹고나서 부채를 손에 들고 색색의 휘장을 두르고서 흥겹게 빙빙돌며 양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운동삼아 땀흘리는게 이 춤의 성격인 것이다. 보아하니 주로 40∼50대 아주머니들로 춤추는 사람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누구든 어울리면 된다. 악기를 타는 두 노인도 예순쯤 되어 보이는데 아주 신나게 열심히 문질러 대고 두들겨대는 그곳 또한 흥에 겨워 있었으며 열심이었다. 이런 걸 보니, 우리로 말할것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 잔디밭이나 공설운동장에 나가 춤추는 서구화된 에어로빅일진데, 이들은 이들 특유의 고유의 악기소리에 맞춰 고유의상으로 흔들어대는 것이 왠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다성 여자가 팔 벌리고 높다랗게 높이 솟아 있는 불을 밝히고 있는 동상옆에서. 또한 겨울에 목발을 짚고 목발위에 올라가 춤을 춘다고 하니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환인에서 하룻밤
환인에서의 하룻밤은 늦게 찾아왔다. 혼강과 오녀동상 삼거리에서의 춤사위, 그리고 우리 풍토와는 전혀 달라 늦은 저녁식사를 드는 둥 마는 둥 곤혹스런 음식냄새를 뒤로 하고 밤거리를 다시 나왔을때는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일은 새벽부터 「오녀산성」을 비롯해 둘러봐야 할 곳을 서둘러야 한다는 책무같은 무게감도 있었지만 낯선 땅에서의 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남자 셋 여자 셋이므로 좁은 한 아파트에 모두 거처할 수 없으므로 남자 셋은 감안영 선생댁 아파트에, 여자셋은 박태근씨 아파트로 나누어 취침하기로 했다. 아마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지 몰라 잠도 잘 오지 않았는데 마침 김안영 선생 남편께서 옆방에서 나오셔서 또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분들이 이곳에 발딛고 살게된 근원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남편 박정호씨(55)는 조부때 울산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제때 이전이라고 한다. 현재 사회보험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김안영 선생은 일제때인 부친이 9세의 나이로 평북 관산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딸 둘은 출가했으며 딸 하나는 대련시에 있는 요령사범대학 역사과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발령 대기중에 있다고 한다. 막내인 아들은 하얼빈 이공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아들딸 구별없이 하나밖에 낳을 수 없는 중국 한족사회에서는 그나마 소수민족에게는 자녀를 둘까지 두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만 김안영 선생가족의 경우는 넷이 되므로 산아제한법에 의해 단단히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우리의 행군에 함께 참여한 조선족 여인이 한 사람 더 있게 되었는데, 바로 박태근씨의 부인 리영숙씨다. 아직 30세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로 남편인 박태근씨와는 동갑이면서 이곳 조선족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이곳 한인현 출신이라 한다. 박태근씨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있는 신빈현 출신으로 아주 보기 좋은 한쌍의 부부였다. 환인 조선족중학교 교사로 있는 박태근씨의 말에 의하면 만주땅 동북삼성에서 쌀농사가 제일 처음 시작되고 보급된 곳이 이곳 환인땅이라는 것이다. 중국 한족이 벼를 가장 먼저 심었다고 하나 사실은 입쌀밥은 조선족들에 의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인데, 이게 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령일보사의 요령조선문보에 논문을 기고, 발표까지 했으며, 이곳 조선족사회에서는 이를 잊지않고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한다. 이 입쌀밥이 만주땅에 널리 분포되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중국이구나 하는 것은 환인의 거리에서 먼저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보신탕이라는 개고기집이 즐비해 있다는 것과 그 냄새가 특유의 다른 냄새와 함께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하고 다른게 뭐냐하면 한국의 경우는 그냥 보신탕집에 가서 먹으면 그만인데 이들의 경우를 보니까, 털 다 뽑은 개 한마리를 통째로 보여주고 있는것 보니 꼭 마네킹 같아 보였으며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앞으로의 일정에서도 가는 곳마다 많이 나타나는「견육점」이라는 입간판이 보신탕집인 건 틀림없는 사실로 역시 만주땅의 대명사는 개고기가 아닌가 싶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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