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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5.장군묘와 상고성. 하고성지를 가다

아미산월 2008. 8. 10. 23:07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5.장군묘와 상고성. 하고성지를 가다

 

5. 장군묘와 상고성. 하고성지를 가다

◇장군묘 가는 길

 

각기 따로 자고나온 우리 일행은 부연 새벽에 다시 합류했다. 다음 일정의 시간대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7시 한 대의 여행사 소형버스에 몸을 싣고 맨먼저 찾아간 곳은 장군묘
였다. 30분 정도 넘게 소요되는 이 길은 전형적인 농촌풍경과 농촌집들이 즐비해 있으며 우
리의 옛 시골풍경을 그대로 연상케 했다.

닭이나 소 거위들이 많이 눈에 뛰었으며 특히 우마차(소달구지)보다는 노새가 끄는 시골농 가 달구지가 이색적이었다. 또 집집마다 마당은 넓지않은 같은 지붕모양의 집들이었으나 마 당 대신 집앞 채마밭은 대개가 울타리를 쳐놓은 게 인상적이었는데, 나무가 많은 북쪽지역 이라서 그런지 목재를 쓰는데 남은 송판쪼가리들로 둘러세운 울타리들이었다. 이는 넓디넓 은 만주일대 어디를 가나 시골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이런 풍경중에 하나 놓칠 수 없는 풍경이 또 농가의 집집마다 있었는데 시골 농가 한켠에 다락 아니면 원두막 같이 나무로 지어 송판을 둘러댄 것이었다. 바람이 숭숭들게 나무로 지 어놓은 이것은, 만주땅 일대가 거의 옥수소로 가득하니까 그걸 넣어두는 창고쯤으로 생각했 다.

알고보니 '부경'이라는 것이었다. 일찌기 중국사서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고구려인들은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부경'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부경 역시 만주땅 전역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단동에서 환인까지 6시간20분 버스타고 오면서 차창밖 시골농가마다 나
타나는 것을 보며 신기하게 여겨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어왔던 것이다. 지금 환인시내
에서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 않은 '장군묘'를 찾아가면서 바로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것말고도 전형적인 우리 한국의 시골 텃방같이 싸리로 울타리를 치고 싸립
문을 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차를 세워놓고 직접 찍어 카메라에 담기까지 했으니 그것도
함께 여기 소개한다.

장군묘는 신라 경주에서 나타나는 고분이나 경북 고령에 있는 대가야 고분, 충남 공주의 백
제시대 고분과 다를 바 없는 규모가 큰 왕릉과 같았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나 '장군묘'
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일설에는 주몽(동명성왕)의 무덤이 아니겠느냐고 추증하는 하기도 한
다고 박태근씨는 일러준다. 그런데 무덤 안의 벽화에는 연꽃문양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보면, 고구려시대에 불교가 전해들어온 소수림왕 시대와 연관지워(?) 보면
한참 후의 일로 연대가 맞지 않을 뿐만아니라, 이곳 환인은 주몽이 나라를 세운 후 제2대
유리왕 21년까지 통치한 도읍으로 볼때 그 당시 인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어쨌든,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역사란 허무하기 그지 없음을 우리는 이런 경우에 바닥치
면 으례이 실감하는 것이다. 흙과 자갈돌이 그대로 드러난 채 잡풀만 무성할 뿐 아무도 돌
보아 가꾸는 이 없으니 누가 사직을 두고 몇 천년 간다고 말하겠는가. 무덤 주위에는 야산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국화 마타리 메꽃 동자꽃 싸리꽃들이 피어 세월의 무상을 말해주는
듯 했다.

주위는 온통 옥수수밭으로 들어찼으며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궈져 있었다. 그래도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1988년 12월20일 요녕성 인민정부 즉 대련시인민정부에서 세웠다는 '
미창구장군묘(米倉溝將軍墓)'라는 비석이나마 세워져 있어 옛날을 증명해 주고 있으니까 다
행스러웠다.

이 장군묘는 힘꾀나 썼던 상당한 지위의 인물이 묻혔을 거라는 입증은 어렵지 않다. 흙으로
봉한 봉토석실은 합장묘로 벽화의 연꽃무늬의 주변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좌우 둘레
110m 반경 45m 높이 8m로서 고구려시대 대형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왕과
장군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늘 외세에 대비해 침공하거나 방어하는게 주임무였으니까 장군
이라는 말은 곧 왕을 뜻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환인현지(桓仁縣誌)'에도 '장군
묘'라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집안 이전에 환인에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집안 이전
에 야트막한 야산 언덕에 천년 아니

이천년의 세월을 지나왔을, 그 당시 고구려인의 숨결을 짚어라도 보는 듯 혼강(渾江)은 주위
를 에워싸며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몇 천년을 흐르고 있었으니 필자가 옛 고구려 나라에 찾
아온 것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고성자묘'를 찾아서

우리들에 현지 가이드로 도움을 준 분은 환인조선족 부부교사인 박태근씨의 부인 리영숙씨
였다. 특히 리영숙씨는 이곳에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가이드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
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이날 일정의 마지막인 '오녀산성'까지 리영숙씨의 힘을 입은데 퍽
다행이었다.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상고성자묘군(上古城子墓群)'이었다. 집석묘(集石墓)로서 100여개가
되었는데 지금 30여개가 남았다고 한다. 상고성자란 하고성자(下古城子)와 함께 지역(지방
성) 이름으로 상고성은 평원성 가까이 있으며, 전쟁때는 산성으로 올라가 전쟁에 대비했으
며 평화시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살았던 평민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집
안(集安)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무덤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지만 이곳 상고성자의 집석묘도
무너뜨려 돌을 가려내어서 밭을 일구고 한 나머지 옛모습은 점차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하고성자지'를 찾아서

'하고성자지(下古城子址)'는 흙을 다져서 쌓아올린 평원성, 즉 평지에 있는 성으로 지금까지
도 남아서 전해내려오고 있는 성곽이 있던 자리를 뜻한다. 당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현장들이었다.

지금도 그 모두가 마을이 들어서고 밭귀퉁이나 골목입구가 되어버렸는데 이것 역시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하고성자지'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마침 긴 삽을 들고 웃옷은 입지 않은 채 들로 나가는 중국인 농부 한 사람을 만나 함께 기
념사진을 찍게 된 것도 여행에서의 재미있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바로 우리가 어제 환인시에 도착했을 때부터 마음 설레게 했던 '
오녀산성'인데 오녀산성까지 네곳을 돌아보는데 다른 곳과는 특이한 경우가 이런 거였다.
환인에서의 고구려 유적기행은 아무나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적지마다 안내원
이 있어서 직접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며, 환인소재 여행사에 신청을 해야 하며, 여행사에
신청하면 차량과 감시원 한명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유적지 수효와 인원수를 곱해서 관람
비를 내어야 하며 차량이용비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며 친절히 동행해 주
고 있는 김안영선생과 박태근 리영숙부부는 제외하고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 6명이 네곳을
둘러보게 되니까 돈계산을 해 보념 다음과 같다.

장군묘 4달러, 집석묘 4달러, 평원성 3달러, 오녀산성 관광은 8달러, 차량이용비 5달러, 합해
서 1인 24달러이다. 여기에 6명분을 곱하면 144달러가 되며, 오녀산성 오르내리는 레일교통
비와 여행수속비가 중국돈으로 10원, 30원 합해서 40원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그들은 한국
인들에게 보여주는 고대유적지마다 비싼 관광료를 받고 허락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함부로 개방을 하는 것이 아니니, 중국땅을 밟았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관광할 수 있
는 것도 아니다. 오녀산성의 경우, 개방을 한 것이 1년도 채 못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완전
개방이 아니라 중국정부직속 여행사에 통과절차를 밟아야 하며, 그들이 내어준 차량과 감시
원(안내원)이 따라 붙는다. 고대 우리 선조들의 유적지를 찾아가는데, 잃어버린 땅 즉 우리
의 땅이 아니기에 설움은 이런데에 있는 것이다. 살다보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돈없는 설
움도 설움이지만 그 보다 더 큰 설움은 잃어버린 우리 땅을 찾았을 때의 설움이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늦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국력에 힘을 써야하며, 그럴려
면 우선 우리 국민들이 특히 지식인층이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할 것이며 일개인의 부귀영
화에만 탐닉하지 말고 민족과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거듭나야 한다고 보는 견
해다.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말해본다면, 해외여행이라는게 즐기며 좋은 곳을 돌아보며 유흥식 관
광으로 일관되어버린것 같은데, 우리의 민족혼을 찾고 깨우치는데 공헌하는 민족성 없이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과 지금처럼 잃어버리고 나서 아무리 몸부림쳐 봐야 헛되다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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