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선생님,광주 전남 현대문학연구소 개소식에 참가합니다
▲한국 서지월,장춘 남영전시인, 연길조선족 석화,길림조선족 리옥금시인
2008년 6월 19일~7월 9일까지 중국 장춘 국제세미나 주제발표 및
연길에서 한중문예창작대학 시특강, 연길아리랑방송 출연
그리고 연길시인협회가 주관한 훈춘농촌체험시창작 2박 3일
용정에서의 포석 조명희문학제를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인 방천과 삼합 양수진 등 두만강 일대 기행 등
20박 21일간 장기 만주기행을 다녀오신 서지월선생님은
지난 2008년 7월 10일(목) 충남 당진 시전문지 제30회 <심상 해변시인학교> 참가에 이어
오는 2008년 7월 25일(금) 오후 7시에 개최되는
<광주 전남 현대문학연구소>(소장 강경호시인.계간시전문지「시와사람」발행인)
개소식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며 대표시 <강물과 빨랫줄>도 낭송합니다.
중국 조선족 대표적인 시인으로 중국문단에 명성이 드높은
대형문예잡지「장백산」총편 겸 길림신문사 사장 남영전선생님이 보내온
<광주 전남 현대문학연구소> 개관 축하의 메세지인 축사도 대독됩니다.
또한 대전 배제대학교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길 조선족 석화시인과
내한해 전주에 머무르고 있는 중국 길림 조선족 리옥금시인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계간 시전문지「시와사람」과 「서정과 상상」이 공동주관하여
<광주·전남 현대문학연구>를 마련하여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poemmoon21 제공=
[한국 서지월시인 제8차 만주기행의 의미]
- 장춘에서의 4일간 머무르다 연길로 와 도문 양수진 훈춘 방천 용정 삼합 왕청 배초구 등 파노라마식 만주기행이 이어졌는데 연길에서의 14일간은 참으로 숨가빴다. 만나고자 하는 분들이 많아 1주일을 더 연기해 있게 되었다. 40~50 여명 가까이 된다고 할까, 매일 점심때와 저녁 만찬으로 이뤄졌었는데 많은 연변문인들과의 만남은 이례적이었다.
물론, 한국의 고급 현대시를 소개하는 한중시창작 특강도 세 차례에 걸쳐 해주었는데 아주 호응이 좋아 연중으로 강의해 주기로 했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대학생들부터 70대 원로시인들까지 경청을 했는데 신선한 충격을 준 건 사실인 것 같다. 연길아리랑방송에도 생방송으로 40분간 대담형식으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민족서정시를 쓰는 내게 있어서 자부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7월 5일부터 7월 7일까지 2박 3일간은 연변시인협회에서 주관한 현지시창작체험기행이 훈춘시 영안현 농촌마을에서 실시되어서 현지시창작체험에 한국시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하게 되었으며 중국북방교역협회에서 주관한 연변군중집단무를 관람하는 절호의 기회도 가지게 되었는데 3만명이 넘는 출연진의 장엄한 스캐일로 이뤄진 군중무는 바로 <장백산 진달래>였다. TV 사극 대하역사드라마를 보는 듯했는데 물동이춤이나 진달래춤 등이 아리랑 노래가락에 맞춰 물결을 이루어 조선민족의 기상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이번 만주기행에서는 두만강 최하류 즉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과의 경계를 이루는 방천까지 가봤는데 한국과는 또 다른 국가정세가 한눈에 목격된 듯 했었다. 한국은 북한과 경계를 이루는 군사분계선인 휴전선이 가로놓여 있지만 두만강을 국경으로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3국의 국경지대인 방천은 지나간 역사가 말해주듯 그들끼리의 팽팽한 긴장력이 감돌고 있는 듯 했었다.
용정을 거쳐 개산툰을 지나 북한과 경계인 사이섬(간도:間島) 기행도 가졌는데 간도(間島)라는 말이 생겨난 곳으로 역시 우리 민족 이주사에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지난 시절 조선인이 살았을 적 사용했던 것 같은 밥사발을 하나 기념으로 주어 가져오는 행운을 갖기도 했었다.
훈춘시를 두고 흐르는 두만강 역시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었으며 도문 양수진을 흐르는 두만강은 북한의 온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삼합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두만강은 북한의 회령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순간도 마음놓고 있지 못할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두만강 변경도시를 나는 이번 8차 만주기행에서 둘러보았던 것이다.
그래도그들이 두만강을 두고 철길로 북한과 오가는 풍경은 분단된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두만강 변경에는 가는 곳마다 조선족들이 낙후된 땅을 일구고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동족으로서의 회한 같은 것도 느껴졌었다. 즐비한 옥수수밭과 감자 콩 등 잡곡류가 심어져 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드문드문 마을을 이루고 있는 붉은 벽돌집 앞 텃밭에는 호박 오이 가지 고추들이 한 생을 맡긴 듯 달려 한적한 농촌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들이었다.
달맞이꽃과 철조망
서 지 월
언제부턴가 달맞이꽃이 철조망을 넘어다 보고 있었습니다. 철조망은 달맞이꽃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꿈이 푸른 옥수수밭 옥수숫대 키우기에 여념 없었습니다
휘돌아 흐르는 두만강은 반백년 넘도록 그대로인 물굽이를 이루며 수많은 잔돌들을 품안에 안았다 버렸다 하며 누워 흐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달맞이꽃이 두만강 이쪽에서 철조망 저쪽을 목 빼들고 넘어다 보고 있습니다 철조망이 달맞이꽃을 가로막고 있는 것 보면 둘이서 해결할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만주기행시「두만강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앞의 시는, 바로 연변시인협회 주관 현지시창작체험기행이 훈춘시 영안현 농촌마을에서 실시되어서 배를 타고 들어가서 봉천도(奉天島)라는 두만강상의 섬이 생기게 되어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의 철조망 아래 노란 달맞이꽃이 피어있는 풍경을 보고 읊은 것이다.
마음대로 넘어가고 넘어올 수 없는 철조망에 대한 회한과 말은 없으나 몸짓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한 달맞이꽃이 어쩌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넘나들 수 없는 우리의 분단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달맞이꽃이 두만강 이쪽에서 철조망 저쪽을 목 빼들고 넘어다 보고 있는 현실에서 '철조망과 달맞이꽃' 둘이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데 촛점이 맞춰지는데 무슨 말인가. 철조망이 개인적인 입장으로 배려해 준다 해서 달맞이꽃이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국경지대이기에 이는 국가간의 팽팽한 대립으로 긴장의 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인 것이다. (서지월시인/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