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신동집 특집>신동집(申瞳集)시인을 말한다
ㅡ신동집시인의 시에 대하여
서 지 월(시인)
대구시단을 말할 때 8.15 해방 전에는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이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시인이 대표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시인이 많았겠지만 그 업적을 두고 말해야 하는 것인 만큼 해방 이후, 김춘수와 신동집시인이 대구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해 왔다고 보는 나의 견해다.
뛰어난 작품이 당대의 풍요를 넘어서 다음 세대의 여파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자칫 조명이 흐려 퇴색되기도 하는데 신동집시인의 경우 여기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혼신의 힘으로 문학활동을 해오며, 시대적 시간대가 맞지 않아 신동집시인에 대해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대구시단에서 지난 세기의 풍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신동집의 시가 현대시의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하기에 재조명해 보는 성격으로 이글을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김춘수는 기억하는데 왜 신동집은 기억 못하는가?'라는데 있다. 이는 굉장히 의미있는 대목으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김춘수는 만고의 명시를 남겨 기억하며 신동집은 얄팍한 시를 끄적거려 기억 못한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데 있다. 신동집만큼 감각이 뛰어나고 서정과 사유가 적절히 잘 배합된 시를 남긴 시인이 해방전이나 해방 이후나 대구시단에서 드물다고 보는 나의 견해인 것이다.
늘 말해오지만, 시를 멋으로 써도 안되지만 시인이랍시고 고리타분하게 모자 하나 눌러쓰고 술만 퍼먹으며 '나, 시인입네!' 행세하던 과거시대가 있었는데 술을 퍼마시고 기행을 일삼아도 뛰어난 시인들이 있었고 보면 그들은 참시인의 길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의 진정성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 시인은 고래로부터 방랑벽이 있었는데 그 모두를 통털어봐도 자신의 문학적 뚜렷한 가치관과 굳건한 작품을 부지런히 써 남겼기 때문에 선전을 안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시를 시나부랭이라 조소하는데 시가 하급계념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무렇게 갈겨써서 자신의 시가 위대한 양 뻐기는 데서 오는 비아냥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 물들면 아니되고 시를 끄적거라기만 하면 되는 양 일상의 넋두리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도 내포하리라 본다. 꼿꼿한 자세도 한몫하는데 원천적으로 뛰어난 질감의 시를 남겨야 한다.
8,15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해서 이런저런 문단사와 시인 개인의 행보가 적잖게 문단을 풍미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매료되는 것은 그 시인들이 남긴 작품의 비중이 우선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 대구시단에 신동집시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도의 어느 저명한 시인은 '대구의 신동집시인을 요즘세대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아!'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국시단 뿐만 아니라 대구시단이 삐뚤어진 길을 택해 온 것처럼 불안정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앞서 밝힌 대로 신동집은 내가 등단하기 전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내가 등단해서 이십여년 가까이 문학활동을 하는 동안 신동집시인은 오랜 투병기간이었으며 그 사이 세상을 뜨신 것이다. 그러니 나하고는 한두 번 일면식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전혀 학연이나 지연 다른 어떤 인연도 닿지 않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대구시단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을 준 시편들로서는 신동집시인이었음을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하고 같은 맥락을 지닌 시류라거나 한 것도 전혀 아니다. 좋은 시란 같은 맥락이나 시류를 전제하지 않아함은 물론이거니와 그리고 깊은 울림을 주는 것도 모든 것이 배제된 작품 그자체인 것인 만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리라.
간략하게 신동집시인의 연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24년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및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을 수학했고 1954년 시집「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했으며 1981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세상을 뜨기 전까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했다. 많은 시집을 냈는데 「대낮」, 「서정(抒情)의 유형(流刑)」, 「들끓는 모음(母音)」, 「빈 콜라병」, 「귀환(歸還)」, 「송신(送信)」 등이 있다.
참고로 김춘수시인의 연보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22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니혼대학을 중퇴했다. 1946년「해방 1주년기념 시화집」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했다. 주요 시집으로는 「구름과 장미(薔薇)」, 「꽃의 소묘(素描)」,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少女)의 죽음」, 「처용(處容)」,「 꽃을 위한 서시」 등이 있다.
신동집시인은 계명대학교 영문과에서 평생을 몸 담았으며 김춘수시인은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몸 담았다. 두 시인 모두 피라미나 미꾸라지 같은 시인은 아니었으며 나름대로 눈부신 활동을 펼진 잉어라 할까. 두 잉어가 동시에 대구시단을 움직여서 그런지 두 시인은 다방에서도 절대 한 자리에 앉지 않고 딴 자리에 가 등 돌리고 앉았다고 하는데 대단한 기질이 아닐 수 없다. 두 시인다 잉어이기 때문이리라.
퍽 사적인 그런 에피소드는 뒤로 하더라도 시인은 작품성에 그 비중이 있는 만큼 작품을 보면 김춘수에게는 <꽃>, 신동집에게는 <빈 콜라병>이 있다. 이것만 봐도 두 시인이 맞수였던 건 확실한 것 같다. 어느 시대나 맞수가 있는 법, 맞수의 작용속에 더욱 치열한 시를 빚어내기 일쑤인데 그러한 면에서도 두 시인은 대구시단을 풍요롭게 혹은 큰 흐름을 형성했던 것이리라.
◇ ◇
먼저, 신동집시인의 대표작으라 할 수 있는 <빈 콜라병>을 보자.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리를 생각하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리를 생각하고 있듯이.
불고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 병을 다스리고 있다.
ㅡ신동집 시 <빈 콜라 병> 전문.
버려진 것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데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서정성을 잘 발휘하고 있으며, 분명한 것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빈콜라병의 존재를 확연히 규명하고 있다는데 이 시의 매력이 있다 하겠다. 목숨이 있는 인간과 인간에 의해 필요충족의 대상이 되어준 사물간의 상관관계 설정이 뚜렸한데 이게 신동집시인의 돋보는 시적 기법으로 보여진다.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작품으로는 <구두>가 있다.
고철이 번쩍 손을 쳐들고 있는
들판 모서리에
떨어진 구두짝 하나.
속에는 귀뚜리가 미사를 울리고 있다.
귀뚜리의 가냘픈 염도소리도 끝나면
한동안 다스리는 들판의 고요,
풀잎이 댓 잎 하늘거리고 있다
구두는 돌연
소리 없는 고향을 지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잃어버린 짝을 찾는 소리다.
오해 말라
시시한 사람의 발은
죽어도 필요없다.
지금은 어디로 갔나, 없어진 짝
구두는 전신의 향수를 털어놓는다
저무는 가을날
다시금 시작는 귀뚜리의 염도 소리
ㅡ신동집 시 <구두> 전문.
보라, 서정적 배경이 되고 있는 '들판 모서리'에 인간에 의해 선택되었다가 인간에 의해 처절히 버림받은 구두가 무생명이지만 자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시한 사람의 발은 / 죽어도 필요없다'고 구두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존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에 의해 헤어진 '잃어버린 짝을 찾는'향수도 그러하거니와 떨어져 버려진 구두짝 속에 '귀뚜리가 미사를 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하나의 미물인 귀뚜리가 등장하여 그 비애를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아, 그 참!
앞서 <빈콜라병>에서는 새 친구가 되어주듯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 피어난 자리를 생각하고 있듯' 피어나 한들거리듯 들국을 통해 빈 콜라병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불고가는 가을 바람이 / 넘어진 빈콜라 병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편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행인1>을 보자.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 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지난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 있는 사람도 있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ㅡ신동집 시 <행인 1> 전문.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까.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시인의 관조는 이토록 심도 있게 읽히는 것이다. 행인이라 함은 인간사에 있어서 누구나 행인인 것이다.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보는 인생의 나른한 한 때, '길은 분명 같은 길'인데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되는 게 인간사 다름아닌 것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작품이 <악수>이다.
많은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 갔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왔고
그리하여 서로들끼리
말 못할 악수를 한다
죽은 사람과
죽지 않고 남은 사람과,
악수란 오늘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의 한 편 팔을
땅 속 깊이 꽂히어 있고
다른 한 편 팔을
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한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를 그리워하며
살은 사람이 죽어 갈
때를 그리어 보며
ㅡ신동집 시 <악수> 전문.
인간사에 있어서 악수가 의미하는 인관관계를 잘 포착하여 쓴 시이다. '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하듯 손내밀어 서로의 관계를 맺는 수인사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가 인간세상이라면, 먼저 죽고 나중에 죽고 하는 것을 통해 인간존재의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향수가 있고 추옥이 있고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양해>라는 시를 보자.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에
바람이 무어라 양해를 얻고 싶은데
미안하여 차마 입을 못 열고
자꾸만 그저 우물거리기만 한다.
나락도 걷어 누인 들판에
햇살은 좀더 노닐고 싶은데
망설이며 도리없이 자리를 옮기고 있다.
으스스 밀리는 해그늘 자락.
나에게도 이젠
말없이 떠나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조심히 다가오는
그런 것도 지레 비쳐 보이고
이런 저런 일에도 정다이
눈을 돌리며
고마웠던 가을날에
인사를 한다.
ㅡ신동집 시 <양해> 전문.
시인의 겸허한 시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넋두리식이 아닌 서정적 요소들인 나뭇잎, 바람, 들판, 햇살, 해그늘 등의 조합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명징하다. 이런 서정성에 추상성이 가미된 시인의 인식체계가 그것으로 호소력을 더하고 있는 수법을 쓰고 있는데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에 / 바람이 무어라 양해를 얻고 싶은데 / 미안하여 차마 입을 못 열고 / 자꾸만 그저 우물거리기만 한다'는 부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의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을 통해 시인의 겸허함이 흠뻑 묻어나고 있다.
한정된 지면이라, 지면 관계상 한 편만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황봉에 올라갔더니
천황봉 뻐꾸기가 신통히 운다
‘아무개야 너
고얀 놈을 닮지 마라.‘
점심을 먹고
구분쯤 잠을 청하니
뻐꾸기가 다시 운다
‘아무개야 너
이기려면 버려라‘
배낭을 챙기고
구두 끈을 조르면
또 한번 뻐꾸기가 운다
‘아무개야 너
할 일이 따로 있느니.‘
연달래가 사르르
고개 저으며 나를 보낼 때
뻐꾸기는 작별의 울음을 운다
‘떠나라 행인
돌아보지도 말고‘
ㅡ신동집 시 <천황봉 뻐꾸기> 전문.
신령스런 자연속에 몰입되어 세상욕망으로부터 초월의지가 강하게 드러나 보이는 작품이다. 지리산 천황봉 등정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를 통해 인간세상의 혼탁을 말하면서, 검은 까마귀떼 속에 섞이지 말고 백로가 되라는 포은 정몽주선생의 어머니 교훈같은 여운을 안겨준다.
◇ ◇
이처럼 신동집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는 인간의 근본정신을 매개로 하여 존재가치를 부여하는가 하면 때론 존재의 허무의식을 자연의 정감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서정과 존재의 탁월한 묘사가 본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동집시인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 너무나도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을 맞아았음도 그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겠지만, 영원한 예술장르인 과거 문학작품을 놓치고 지나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시단사에서 김춘수는 기억하고 신동집은 기억에서 멀어졌으니 말이다. 아, 내게는 그리운 시인이 신동집시인인 것이다.
패기있던 젊은 날, 신문기자가 시 한 편을 가지고 가서 한 달이 지나도 연락 없고 고료도 주지 않아 벼르고 벼르던 차 길에서 맞부딪혀 귓때기를 올렸다고 하는 일화도 시인의 위상을 짐작케하며 찡하게 와닿지만 '지나간 시절은 감미롭기만 하다'라고 실토한 신동집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 감동으로 안겨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