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7>아리랑방송과 초록저고리·다
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7>아리랑방송과 초록저고리·다홍치마 ♪.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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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라는 말 생방송 중에 썼다가 결국…
초록저고리에 다홍치마 입은 조선족 아줌마들이 산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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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에 출연했다가…
내가 지난 2008년 초여름 연길로 가서 보름 정도 눌러붙은 적이 있었다.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나는 <아리랑방송>이라는말에 아주 매력을 느꼈다. 연변일보 맞은편인 대로변의 조그만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이 호텔이 마음에 드는 것은 창을 통해 내다보면 큰 길 맞은편 연변일보 빌딩이 보이고 창문 아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거나 오가는 연변사람들의 풍경이 매일매일 한눈에 들어왔다.
오전 8시 생방송프로라서 아침 일찍 일어나 먼 거리는 아니지만 택시를 잡아타고 방송국에서 좀 떨어진 강가에 내려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한국방송국과 다를 바 없었지만 다르다면 한국의 경우 인터뷰를 해 봐야 길어도 10분, 15분정도인데 이곳서는 30분도 아닌 40분간이다. 나야 글을 쓰는데 있어서나 강연을 하는데 있어서 주업으로 해왔기에 체질이 되어있어 몇 시간이라도 끄덕없고 수백 장의 글이라도 한번에 써내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연길인민방송국 아리랑방송은 FM88MHz AM900KHz로「민족방송의 한 송이 꽃」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걸고 2001년 4월에 창립되어 지금까지 전통적인 설교식 방송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교류식 무대를 꾸려오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내가 출연한 프로는「FM88 좋은 세상」생방송인데 아침에 출근하는 연변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서정시인으로서의 작품세계, 한국에서 시인으로 살아온 인생역정, 그리고 중국 만주땅을 자주 밟게된 동기 등 우리 조선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관심있게 말해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이 방송은 녹음을 해 두었다가 저녁에서도 재방송하며 아리랑방송 인터넷으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성격이었다.
남여 두 아나운서가 번갈아가며 나하고 대담하고 중간중간에 여유를 가지고 조선민족의 삶의 정서를 읊은 시 <강물과 빨랫줄><해란강에 와서> 등 시낭송도 두 남여 아나운서가 번갈아가며 들려주기도 하며 하여튼 아기자기한 진행으로 이뤄졌다.
무사히 방송을 끝내고 출연료 대신 연길아리랑방송 로그가 찍혀있는 곱게 포장된 선물용 수건을 한 세트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알게 된 일이었지만 인터뷰내용에서 '만주'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담당자가 아마도 문책을 당한 것 같았다. 그리 심각하다는 말은 안했지만 재방송이 취소되었다고만 했다, 나는 아쉬었다. 다시들을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내가 '만주'라는 말을 사전에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장백산'을 백두산으로 표기하는 것도 보았으며 방송진행 내내 '만주'라는 용어를 써도 아무말이 없기에 괜찮구나 싶었던 것이다. 쓰려면 '위만주'라 써야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유곡절이 생긴 것이다. 아니면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 해야 중국 행정구역 표기에 맞는 것이다.
◇ 모아산을 오르다
서울을 대표하는 산이 관악산 북한산이라면 대구를 대표하는 산으로 북으론 팔공산 남으론 비슬산이 될 것이다.
연변땅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모아산이라 할 수 있는데 도심의 많은 이들이 등산을 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연길분지와 용정의세전이벌 동불사벌 등 연변땅 일대 넓은 벌판을 품고 있는 모아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버섯처럼 생겼다고 '버섯산'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독버섯같다고 '독심산'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곁에 다가가 보면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꼭대기는 가름발로 된 넙적한 청석으로 층층이 덮여있어 마치 양산을 씌운 듯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며 유별나게 동그란 모습이 왕릉을 연상시켜주기도 한다.
방송이 끝나고 연변인민방송국 한일송기자 안내로 간 곳이 바로 모아산이었다. 이름만 듣던 모아산이었다. 항시 연길시가지를 지나면 네거리 한복판에 동상처럼 우뚝 솟아 백두산을 향해 포효하고 있던 백두산 백호상(白虎像)이 모아산 오르는 광장에 있지 않은가. 물어보니 모아산을 공원화 하며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모아산에 오르니 연길 시가지뿐만 아니라 용정들의 굽이치는 해란강까지 한눈에 들어와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다. 바라보이는 저 벌판이 일제치하 독립군들이 말을 달린, 선구자의 벌판인 것을 더욱 실감나게 알 것 같았다.
◇ 초록저고리·다홍치마
모아산을 내려오는 길에서 아주 이색적인 풍경이 내 시선을 왈칵 잡아끌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주 이색적인 풍경들이 내 시선을 왈칵 끌었다. 요즈음 한국의 초중고교 학생들도 소풍을 가르 때 지난날처럼 도시락과 먹을 거리를 별로 사가자 않고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고 하는 판국인데, 물론 어른들도 등산이나 할까 어디 가면 부근의 식당에서 밥먹고 가요방 가서 노래 부르고 하는게 통상적인데 연변땅 이곳은 달랐다. 요즘 누가 일부러 도시락 사서 거기다가 한복 곱게 차려입고 소풍가겠는가 말이다.이 모아산 내려오는 펑퍼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는 군데군데 사람들이 소풍을 나와서 둘러앉아서 마시고 먹고 하면서 춤을 추고 신명이 자지러졌는데 꼭 북이나 장구를 가지고 나와서 장단 맞추는 사람도 있고 또 곱게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춤을 출 때는 부채를 들고 신명을 더욱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건장한 남정네의 아코디언도 한몫 더하는 거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깃발을 나무 가지 사이를 이어 달아놓은 것 보니 아마 중국의 어떤 기념일로 공휴일을 즐기려 나온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이젠 이런 모습 찾을래야 잘 찾을 수 없는 모습 아닌가. 나는 기분이 좋아서 나를 보고 얼싸안는 연변아줌마들에게 큰 돈은 아니라도 1000원짜리 퇴계 이황을 기념으로 주니 한국돈이라고 다들 좋아했다. 아들딸들이 한국에 가 있기에 한국도 몇 번 다녀왔고 했다.
게다가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입은 조선족 아줌마를 발견했으니 말인데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는 바로 우리 민족 대표적인 색상으로 알져 있는 그것이엇이다. 특히 혼례를 치를 때 신부가 입었던 초록저고라 다홍치마 아닌가 말일세. 나도 시공부를 열심해서 알아차렸는데 일찌기 한국을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시인이 <신부(新婦)>라는 시를 썼는데 가장 한국적인 시로 꼽히기도 하며 많은 무용가들이 무용으로도 재현하기도 했는데 서정주의 시 <신부(新婦)>에 나오는 의상을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은 미당은 한국인의 숨결을 놓치지 않고 유장하고 기발하고 익살스럽고 능청스럽게 재구성해 시로 표현한 시인인데 <신부(新婦)>라는 시도 그냥 쓰여진 시가 아니라는데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전해 내려오는 설화지만 미당은 1939년 양곡주식회사 간도성 연길시지점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해 겨울에 용정출장소로 전근 갔다가 이듬해 봄에 귀국했는데 이곳 만주땅에 와 있을 때 들었던 얘기를 아무도 모르게 은근슬쩍 시로 읊어 한국인의 교유정서를 대변하는 시 <신부(新婦)>를 낳은 것이다.
말하자면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이런 내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