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의 조선족시단

[연변문학](2010)<한국시특집>구석본김세웅서지월홍승우고희림정이랑고안나

아미산월 2010. 4. 5. 10:36

ㅁ[연변문학](2010)<한국시특집>구석본 김세웅 서지월 홍승우 고희림 정이랑 정경징 김남희 고안나시인, 혜봉스님

 

[연변문학](2010)구석본 시-'중심의 정체' 외

 

중심의 정체 
         

구 석 본

 

갈비탕을 먹는다 갈비를 뜯는다
그래, 갈비는 뜯는다고 한다
몸의 중심을 뜯는 것이다
한 몸을 지탱하던 중심을 뜯으며 맛있다고 한다
갈빗살은 질기다 그 질긴 살을 씹을 때
몸이 숨겨 놓은 욕망이
끈끈한 국물로 흐르며 목젖을 적신다
죽은 욕망은 살이 되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며
또 다른 욕망으로 살아난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게 살아나
내 몸의 중심으로 스며들어 일어난다
몸속에 숨겨진 뼈 하나가 더욱 단단하게 굳는다
국물도 한 모금 마신다
갈비의 육수, 땀으로 흐른다
마침내 그릇은 비워지고 뼈만 남는다 
눈앞에 드러난 한 생을 떠받친 중심의 정체,
잠시 머물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정지화면

 

구 석 본

 

밤,
한 쌍의 남녀가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의 정면은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은 등만을 클로즈업한다
클로즈업 되는 순간, 모든 것은 정지한다
정지화면으로 보는 남녀 간(間),
어깨와 어깨, 등과 등, 허리와 허리에 
넘을 수 없는 유리벽 같은 사이(間)가
외로움의 숙주로
정지화면에 클로즈업 되어 파랗게 나타난다
화석처럼 두껍고 단단하다 외로움의 DNA가
저 화석 속에 문신처럼 박혀 있다
이윽고 가로등 불빛이 꺼지면 
정지화면이 풀리고
유리벽 같은 사이도 풀어지고
다시, 두 남녀가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깊은 어둠 속으로 묻혀간다
그 무렵,
외로움의 DNA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상의 섬
             
구 석 본

 

익명의 사람들이 물결처럼 모였다
무리지어 지상의 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 한가운데 오똑한 섬,
사람들이 이루는 물결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밤이 되자,
등대에 적막을 밝히는 불이 켜지고
사람들 안에서 출렁이던 외로움이
파도가 되어 섬을 덮친다
무수한 외로움이 무수한 파도가 되어
덮치면 덮칠수록
외로움으로 살찌는 섬은 점점 비대해질 뿐이다
밤새도록 몸을 부풀리는
고도(孤島).

 

 


<약력>

 

▲경상북도 칠곡 1949년생.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
▲영남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과 졸
▲1985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2000년 대구문학상 수상
▲2008년 대구광역시문화상 수상
▲시집 『지상의 그리운 섬』,『노을 앞에 서면 땅끝이 보인다』,『쓸쓸함에 관해서』 등
▲현재, 대구광역시문인협회장

 

 

[연변문학](2010)김세웅 시-'장자의 나비' 외2편


장자의 나비


김 세 웅


한밤에 자다가 깨니
내가 영 내가 아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되풀이되는 꿈을 깨면
장자의 나비처럼,
살아가는 내가 영 내가 아닌
되풀이되는 꿈일 수 밖에 없다
그럼, 죽음도 두려워할 건 아닌 건가
죽어서야 꿈 아닌 삶을 찾을 수 있다면,
혹은 창문 안에서만 바라보던 바깥풍경을
이젠 바깥 풍경 속에 직접 서서
오히려 비좁은 창 안을 들여다 본다면
그 것이 죽음이라면,
삶은 영 내가 아니구나
가위눌린 꿈을 깬 새벽에
잠든 마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누라에게 미안하고 미안하나,
살아가는 내가 영 내가 아니다

 

 

봉지 안의 잠


김 세 웅


새우깡을 먹다가 잠이 든다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봉지 안의 잠이다
봉지 안의 은박에 눈이 부신
잠 속에선
옆의 새우깡이 꿈결에 나에게 발을 걸쳐온다
봉지 밖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은 더욱 구부려지고
새우깡끼리 발 걸친 채 떠다니는 눈부신 바다,
봉지 안의 세상은 또 하나의 화엄이다
사명과 의리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맡겨두고,
四海가 잡념 없이 은빛 가득한
봉지 안은 시방 새우깡의 불국토다

 

 

寒食

 
김 세 웅


밤나무 위의 쏙독새, 큰 입 열어 운다
건너 편 굴참나무 쏙독새 더 큰 입 운다
그 큰 입에 아버지 무덤 들어갈라,
쏙독새 울음에 내 속이 파인다
붉은 속은 파여 더욱 붉어져
내 속에서 익는 밥, 뜨거운 밥
아버지 생전의 김이 솟던 밥!
새여, 더 크게 울어라, 모질게 울어서 원수지거라
익어도
먹을 수 없는
붉은 밥, 쉰 밥 보다 못한 슬픔

 

 

 

 

<약력>


▲1953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81년『시문학』 추천 완료 등단.
▲시집,『삼중주』(시문학사),『날이 갈수록 별은 보다 높이 뜨고』 (시와 시학사),
『돌아가는 길』 (시와 시학사) , 『칼과 연못』 (문학의 전당) 등이 있음.
▲에세이집『바람으로 지은 집』 (문학수첩사)발간.
▲<낭만시> 동인. 세종이비인후과 원장.
▲현재, 대구시인협회 회장.


 

[연변문학](2010)서지월 시-'파냄새 속에서' 외2편


파냄새 속에서


서 지 월


정작으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면
파냄새 속에 흥건한
어머니 치마폭 같은 훈훈한 바람
드리워진 하늘의 思想과
흙빛으로 물드는 노을,
저문 밭둑에
아무도 휘파람 부는 이 없어도
세월은 파꽃처럼 피었다 지고
새로 돋아나는 파냄새의 이랑 사이
실눈 뜨고 봄은 오건만
먼길 걸어온 나비들이 靑山에 깃들기 전
고단한 나래 접어 눈물을 심고 가는 길
나는 그 파냄새 속에서
코고무신 끌고 오시는 어머니의 갸름한 모습을
지난밤 꿈속에서도 보았었네.

 


흰 봉숭아꽃의 노래

 

서 지 월

 

하늘이 흰옷을 내리신
민족의 꽃이여!

오늘은 빨강 분홍도 날려보낸
어쩌면 내 아버지의 무명적삼
내 어머니의 흰 코고무신 빛깔로
내 뜨락에 찾아와
아무 말 없으니

누이의 분홍 손톱 빨간 댕기
그마저 거두어가버린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흰 봉숭아여,
마굿간 쇠방울 소리
그것마저 온데간데 없이 흩어져 버렸으니

어쩌면 좋아
하늘이 내려주신
이 흰 빛깔의 이 정서를!

 

 

朝鮮의 눈발


서 지 월


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 가고 있다.


아침 상 받으면
풋풋한 생채나물
그 미각을 더불어
어린 날의 서당골 물푸레 나무
결 고운 길을 따라
잠 덜 깬 포대기 속 아이의
꿈결같이
굴러 가고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예지의 나라
純銀의 밀알들,
그대는 아는가
바다와 강이 놋요강처럼 놓이고
陵은 풀잎처럼 잠든다.


문경새재에 눈이 내리면
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 속을
조심조심
미끄러져 가고 있다.


아침 신문 유액 위
朝鮮通史가 빛나고
한술의 배고픔보다 천근의 무게로 울려 올
우리의 풍악소리......
몇 백년쯤의 뒷날을 다시 생각노니,


지금 나는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 간다.

 

 

 


<약력>

 

▲1955년 음력 5월 5일(端午날), 대한민국 대구 달성 출생.
▲1985년 12월, 『心象』신인상에 시<겨울 信號燈>외 3편 당선.
▲1986년 6월,『아동문예』신인문학상 동시 <바람에 귀대이면> 외 4편 당선.
▲1986년 8월,『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시 <朝鮮의 눈발> 당선.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
▲시집,『가난한 꽃』(1993, 대구시인협회상 수상시집),『백도라지꽃의 노래』(<白桔梗花之歌>,(중국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천년의 시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시집) 등 있음.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대구문인협회 외국문학분과위원장. <낭만시> 동인.
▲현재, 현대시창작 전문강좌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연변문학](2010)홍승우 시-'서신(書信)'외2편


서신(書信)

 
홍 승 우


친구여, 상처는 풀잎에서 새어나와
어둠 속을 행진하며 휘파람을 긋고, 아비의 아들 되어
머리칼 새로 빠지는 사랑의 말들을 낳는다.
신문지 위로 떨어지고, 술잔 위로 떨어지는 사랑
아이스크림을 먹다 흘려버린 사랑

 
친구여, 오늘은 하던 일 모두 제쳐놓고
우체국에 가서, 구겨진 사랑의 말들을 주워
다리미로 깨끗하고 반짝이게 다리고 싶다.
엽서에다 그 말들을 정갈하게 적어 넣고 싶다.


친구여, 완행열차 뒤꽁무니에 싣고 달리는
피곤한 삶에 햇볕 비추어
너의 그 꽃 속에 깊이 잠들고 싶다.

 

 


홍승우


생명이 고이 침전하는 동안

청신한 육신의 향기를 턴다.

 
햇살 따라 요동을 치던
꽃의 생애 위에
꽃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어지러운
흔들림이 있다.


한 마리의 나비가
허덕이는 어둠의 신음 속에서
뜨거운 생명을
가늘게 흔들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너와 난
고향을 찾는
도시의 이방인이 된다.

 

 
중년

 
홍 승 우


빈 술병만 즐비하면 무얼 하나
한 줄의 시도 나오지 않는 걸
 

책만 들고 있으면 무얼 하나
잠만 오는 걸

 
분홍빛 추억을 떠올리면 무얼 하나
배 나온 중년인 걸

 
왜 살지?

 
텅 빈 가슴
고여 있는 생각
묶여 있는 마음

 

 



<약력>

 

▲1955년 경주 안강 출생.
▲1995년,문학평론가인 서울대 불문과 오생근교수에 의 심사로「동서문학」신인작품상에 시 '새' 외 4편 당선으로 등단.
▲시집 『식빵 위에 내리는 눈보라 』(나남출판사) 있음.
▲<낭만시> 동인. 송앤포엠시인회 회원.
▲현재, 대구시인협회 편집국장.

 

 

[연변문학](2010)고희림 시-'고장난 물' 외2편


고장난 물


고 희 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길도 속곳을 다 차려입고 흐른다지요 활에서 튕겨나간
힘찬 화살도 마지막엔 비단조차 뚫기 어렵다지요 아파트 천정에서 물이 새고
있는 것을 보자니 흐르는 저 아래가 아무래도 빤스 끈을 놓쳤나봐요

 
허구한 날 새 날개에 매달린 편지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긴 하지만 내 몸이
고장이라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가령 내 몸의 어떤 분노이거나 따뜻함이라 해도
괜찮을 팽창이 네게로, 네 것은 내게로, 옆구리에서 시린 옆구리로, 穴을 벌어지게도
하는, 쪼개 먹는 삶, 지구통이 순배순배 뜨거워지듯이 말입니다

 
일언도 없이 물이 새는 것을 보자니 요 말썽들을 나누어야겠다고 나는 관리실
소장을 찾아 갑니다 소장은 보일라실 실장을 부릅니다 실장은 보일라실 보조를
부릅니다 말이 입구에서 옆구리로 갔다가 시린 아랫도리로 내려갑니다 중심
잃은 구멍에선 물에다 빤스 입혀! 라고 외치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래 저 길


고 희 림


내 앞을 달리는
저 'LPG' 가스통 두 개를 매단
저 억척스런 노동자는
 계급은 상승될 수 있다고 저 길을
인생의 밥그릇이라 여기며 차와 차 사이의
희끗한 차선을 그의 계단이라 여기며
공포의 오토바이를 타고 용감히 배달 간다


그래 그래 저 길
살아있기 보다 살아 남기,
표절과 미비의 배신,
승리감이나 패배감으로 우리네
인생이 날마다 변하는 곳,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


한동안 사라질 순 있으나, 자살할 순 있으나
영원히 벗어날 순 없는 나라
안전한 곳이라곤 부족한 편안한 나라
도망가면 죽을 때가지 도망가야 되는 나라
맞서고 싶진 않으나 맞서야 되는 나라, 저 길,
붉은 신호등이 지켜주는
위험한 나라, 우리 나라

 

 

書記


고 희 림


하느님,
쟁반 밑바닥 하얀 재 소북한 초승을 열어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경조사와 희로애락 줄어
씨 마르는 소리 찬 살갗으로 애도는 쭈그렁 호박 같은 집들 지나 
문전옥답이었을 빈 들 끝 무렵
푸른빛 교회당 양쪽의 십자가 두개는
내세와 외계의 입맞춤 주홍글씨로 떨고 있어요


휠체어 하나와 경운기 두 대 할머니뻘 두 분
어스럼 달빛 농로를 따라 새의 깃털처럼 방문한 수요일 저녁,
어김없이 하느님 말씀을 차리는 풍금소리
저녁 설거지같은 村老의 기도소리는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우는 소리처럼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말처럼*
슬프고 착합니다.


고개 숙여 밥 떠 넣듯 하늘 아래 상 차린 저녁들,
겨울나무 눈커풀, 까마귀의 알, 어디선가 번득였을 무당의 칼끝,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아궁이같은 식솔,
그것은 두두물물이겠지만


흰빛 싸늘한 밤 들판 농로를 따라 걸으며
목도리 속에 파묻혀 딸국질하는 저는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영영 읽을 수 있게**
영락없는 소복 입은 서기書記같지 않나요


*논어에서
**고영민의 시에서 변용
 


<약력>

 

▲1960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
▲봉초, 정화여중, 효성여고, 숙명여대 정외과 졸업,
▲현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과 재학
▲2009년, 대구문학상 수상.
▲1999년,『 작가세계』로 등단.
▲2003년, 시집 『 평화의 속도』 펴냄
▲현재, 남부도서관 맟 대구교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연변문학](2010)정이랑 시-'옷장 속에 갇히는 생(生)' 외2편


옷장 속에 갇히는 생(生)


정 이 랑


오렌지빛 물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다
옷장 속으로 하루의 생(生)은 저장된다


사십 년 하루같이 온전히 갇혀 있는 저 곳
거꾸로 뒤집어 놓고 훌훌 털어본다면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마냥 흘러나올 것만 같다


골목길 돌아 걸어가면 전봇대에 매달려 있는 외등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 앞마당으로 얼굴 붉히고,
아이를 업고 밤하늘 올려다보는 어머닐 만나고 싶다


도시의 소음 속 잎푸른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시집을 펼쳐든 여인과 걸음마 배우는 갓난아이
어떤 기다림으로 물들고 있는 저녁이다


생(生)이 갇혀버린 저 무덤 속으로
또 몇 년의 생(生)이 굴러 들어갈 것인지
가늠할 자는 없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생(生)들이 줄 서서 있을 따름이다

 


돼지저금통


정 이 랑


아이는 돼지 한 마리를 슈퍼마켓에서 잡아 왔다
십원 백원 오백원 천원 닥치는대로 집어넣는다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싫다고 한다
아이도 돼지저금통도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는다


어제는 연이율 5%라면서 은행에서 직원이 나왔다
먹고 살기도 힘들다 아우성인데 적금을 넣으라고 한다
전기요금 전화요금 휴대폰요금 가스요금 집세 가게세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여기저기 수납하는 돈이 넘 많다


오늘은 복권 한 장을 사고 싶어진다
1등이라도 되면 집세도 내지 않고
가게세도 밀리지 않게 건물 하나만 장만하고 싶다
돼지꿈이라도 꾸고 싶은 밤이다


나는 퇴근길 돼지 한 마리 잡으러 슈퍼마켓에 간다
한 푼 두 푼 모아 돼지 배가 가득 차오르면
연이율 5%라고 하는 은행으로 아이와 함께
돼지 두 마리 몰고 행복을 부금하러 갈 것이다


 

돼지국밥 한 그릇


정 이 랑


태어나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드리지 못했다
올해 칠순의 늙은 아버지와 마주 앉아 먹는 국밥
눈동자 한 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할 말이 없다
“고기가 많네요, 아버지.”
아직도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으로 고기 건네고
“이것만 해도 많다, 너나 많이 먹어.”
갔던 고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김은 모락모락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왔다
서른이 넘어 자식 낳고 살면서 그 흔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감사하다>는 마음 표현하지 못했다
덜컹덜컹 유리문 밖으로는 바람만 불고
비라도 오려는지 플라타너스 잎들이 손바닥 펴들고 있다
넘어가지 않는 국밥 꾸역꾸역 밀어 넣기만 하는데
푹 파인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이제 구슬구슬 빗방울도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국밥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며 527번 버스를 타셨다
그저 버스의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렇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언제 다시 대접할 수 있을까
시간의 기둥을 잡고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
비는 그치지 않고 발가락 사이로 침범하며 걸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도 우산없이 걸어 가봐야겠다

 

 

 


<약력>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1996년 <불교의 해>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학상 당선.
▲1997년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1997년「꽃씨를 뿌리며」외 4편으로 『문학사상』신인발굴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8년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500만원 수혜시인으로 선정됨.
▲2000년『현대시학』집중발굴 <시인을 찾아서>에 선정됨.
▲2005년 첫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시안 '황금알')』발간.
▲2009년 현재, 대구시인학교 <사림시>및 <시원> 동인으로 활동.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상임시인.「해란강여울소리」편집위원.


 

[연변문학](2010)정경진 시-'피아노 향기' 외2편


피아노 향기


정 경 진


꾸불텅 긴 돌담 골목길이면 어떨까
피아노 소리 들리는 골목길을 거닌다
닭살 개구쟁이들이 집집마다 벨 누르고 달아난다
왼쪽에 달린 벨,  오른쪽에 달린 벨,
높이 달린 벨,  낮게 달린 벨
방마다 시간이 다른 시계가 걸린 집 앞
벨 누르면 소리가 난다, 꽃향기가 난다
매화 국화 라일락 코스모스 장미
접시꽃 작약 목련 셀비아 천리향 백리향
머리카락이 선인장 가시처럼 쭈뼛쭈뼛 선다  콩당이는 가슴
젖은 나무가 이리 뒤척이다 저리 뒤척인다
불볕 더위에 바래어진 바람 부는 언덕
화르르 불꽃 튕기면 한낮 햇살과
그림자 토해내는 가슴 콕콕 찍고
잘 두드려진 별 꿴다
피아노 건반 널뛰기 한다  그네도 뛴다
징검다리 건넌다 토끼뜀도 뛴다
뽀족한 바늘 끝처럼 휙 지나가는 KTX열차
과녁을 통과하고 있다
하이힐 신은 이마 절반쯤 가린
깻잎머리 S라인 여인이 생각난다
그녀에게서 잊혀진 기억 깨우는 향기가 난다

 

 

꽃자리 한때처럼


정 경 진


길가에 뜬금없이 떨어진
껍데기뿐인 검은 비닐 봉지 하나
풋풋풋 달겨드는 웃음 채곡채곡 담아
웅비하는 새처럼
푸하하 날개짓하며 날아오른다
전신주에 걸릴듯
꽃나무에 사뿐 내려앉을 듯
몇 굽이 세상살이 넘고 넘다
달아나는 배꼽 움켜쥐고  나 살려라
떼구르르 굴렁쇠처럼 마구 뒹군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길 모퉁이에
후줄그레 남겨질 지도 모르는
검은 비닐봉지 하나
꽃자리 한때처럼 지금
무슨 꿈꾸며 뒹굴고 있는지
한동안 바라보며
바람부는 벌판에 나는 서 있다

 

 

목련꽃

 

정 경 진

 

잠시 잠깐
정신없이 낮잠 자고 나서
후드득 기지개 켜는
꼬인 가지들,

 

한낮보다 더 크게 웃는 목련꽃
해 떨어지는 선잠 끝에
채찍질하는 바람 닿자
화들짝 놀라
물배 채워 계단 밟는
어린 구름 어루만진다

 

먼 곳의 해
가까이 얹어 놓은 가지들
그대로 머물러 있게
처진 어깨 에워싼 허기진 하늘 아래
꿈꾸는 밤 찾아와도
잠들지 아니하고
아가방 지키는 전등불처럼
휘청거리며 깨어 있네

 

 

 

<약력>


▲1954년 부산 출생.
▲동아대학교 원예학과 졸업.
▲2001년 계간 <시현실> 봄호 등단.
▲2003년 제4회 「적벽강 시문학상」 수상.
▲2005년, 중앙일보 주관 제1회「미당문학제」시부문 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현재,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회장.

 

 

[연변문학](2010)김남희 시-'소쩍새 우는 밤' 외2편


소쩍새 우는 밤


김 남 희


골짜기 흔드는 소쩍새 울음소리
철쭉꽃은 피어 달빛처럼 환한데
울엄마 병석에 누워
희미해져가는 목숨같이
별빛마저 가물거린다


청보리 피는 四月
봄밤은 짧아
지난 세월 전설처럼 꺼내놓고
가는 봄 서러워
소쩍소쩍 울다가
울 엄마 꺼져가던 목숨
이 밤이 섧다

 


철쭉꽃 피면


김남희


철쭉꽃 피면
뻐꾹새 울것제


산골짝 골짝마다
객혈 토해놓고
검붉은 꽃잎
서러워 울것제


쓰리쓰리 쓰린 정한
풀 길 없어
피울음 울다 울다
목이 쉬것제


가는 봄 어이할래
꽃길 옮아가며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새
슬피 울것제

 

 

조선의 여자


김 남 희


살얼음 위를 조신하게 걷는 여자
외롭고 고달픈 인고의 세월
날 선 칼바람 앞에서도
오히려 서슬 푸른 정절
무명옷 받쳐 입은 달빛이 곱다


옥돌도 깎아야 제 구실 한다지
동토에 뿌리박아 삼천리 뻗은 혈맥
골마다 깊이 패인 주름살
오오, 정갈하게 돌아않아 인두질 하던
조선의 내 어머니


피가 역류한다
내가 받들어야 할 조국의 얼
숙명적인 만남과
조선의 여자로 살아야할 이유들

 

 

<약력>


▲경남 사천시 삼천포 출생.
▲시전문지 『심상 』신인상 시당선으로 등단.
▲한국가람문학상 수상.
▲시집 「미완성 인생」,「햇살 한 줌 사랑 하나」,「달빛이 숨어들어」 있음.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시인협회, 심상문학회 회원.
▲<사림시> 동인.

 

 

[연변문학](2010)고안나 시-'그릇' 외1편


그릇


고안나


닳아지기 시작하면서 부터
찌들어 산산히 깨어질 것 같다


곤두박질칠 때 경고의 음성처럼
선명하게 그어 놓은 금
이래 저래 아무 짝에도 쓰일 수 없다


사기 쟁반같은 마음 펼쳐보니
손금처럼 자잘하게 그어진 금들
깊어진 자국마다 식어진 血


깨어질 줄 몰랐던
그릇이던 것을
실핏줄처럼 일어서던 분명한 경고 
물도 사양합니다
밥도 담을 수 없어
이미 그릇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강물


고 안 나


밀고 밀리며 떠 내려가는 生
가득 채워졌다 비워지기도 하지만
어차피 한 세상 제 그릇에
담겨서 줄다리기를 한다
밀지 마라, 밀지 마라,
숨이 턱턱 막히도록 채워보아도
결국 담기지 않는 저 것
양수(養水) 차오르듯 팽팽해져도
한숨 꺼지듯 무너지는 것들
달려서 급히  천년을 돌아도
똑 같은 흐름만 탈 뿐
우린 서로 나란히 함께가고 있는 것
밀치고 달려들어 
남의 의자에 앉았던 시간같이
부끄러움 토해내는 멍던 세월아
물빛 맑은 오후
예사롭지 않은 출렁임도
허기진 배고픔처럼 사소한 것들
밀리고 쫓아가는 말미(末尾)는
또 얼마나 덧없는 것들일까

 


빈집


고 안 나


걸쳤던 옷 한 벌   벗어던졌다
누덕누덕 기웠던 흔적
잡초에 섞여 신음하는 소리
저 혼자 땡볕에 말라가던 것을
새가 되어 날아간 웃음들
얼룩처럼 바래져 바스락거린다
자꾸만 낮아지는 산그늘
스스로 일어설 수 없어 축축한데
풀어헤친 문살 사이로
달려드는  산그림자
풋감 하나 떨어져  무심히 굴러간다
여기저기 옷 벗어 던지는 소리
세상이 조용하다
움직이던 모든 것 흔적 없고
들고양이 몇 마리 들락거린다
벗고 살아도 따뜻한 날들
누군들 탄식하는 날 있을까

 

 

 

<약력>


▲1958년 경남 고성 출생. 본명 고혜은.
▲부산시인협회 주관,『부산시인』신인상 시당선.
▲시전문지『심상 』등으로 작품활동.
▲호미곶문학상 수상. 백산여성문예상 수상.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부산시인협회 회원.
▲한중공동시전문지『 두견화(杜鵑花)』편집위원.
▲대구시인학교 문화부장. <사림시> 동인.

 

 

[연변문학](2010)혜봉스님 시-'목탁새 울음소리 ' 외2편

 

목탁새 울음소리


혜 봉


그윽한 산내음
소리 없이 스며들어
청아한 목탁새 울음소리
산사에 울려 퍼지네


똑, 똑, 또르록
똑, 똑, 또르록


맑은 메아리
허공을 메우네


목탁새 울음소리
깨달음의 소리
지혜의 소리구나

 


촛불

 

혜봉

 

미혹의 삶          
어둠 속 더듬더듬
눈 떠 보아라
제몸 태워 만든
지혜의 빛
바람 불어와 삼키려 해도
변함없는 마음

부드러운듯 강한
저 밝은 힘
천지간
온누리 무진겁 비쳐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그의 품안

 


구도

 

혜 봉

 

해는 서산에 기우는데    
자루 없는 걸망을 메고
가시밭길 헤매이는 빈승(貧僧)

먹구름은 몰려오고
뇌성벽력 내려치고
수마(睡魔)는 몰려오고

무엇을 얻으려고
누구를 위하여
구도의 길 헤매이나

성불(成佛)의 길 아득하고 아득한데
언제 삼마지(三摩地) 배를 타보나

 

 

 


<약력>

 

▲東山 혜봉 대종사. 시인. 수필가. 부처골 지장선원 주지. 
▲월간 시전문지「심상」,「한국문학예술」,중국 길림성「장백산」,연변시총서「시향만리」등으로 작품 활동.
▲불교문인협회 회원.달마문인회 회원.
▲세계불교문화 홍보대사.한중일 문화교류회 이사.
▲(재)세계불교 법왕청 감사원장.
▲대한불교 범종단 원로지도자연합회 호국국사.
▲한국불교 삼론종 종정.세계불교 지장선원종 원로위원.
▲2006년 세계불교 법왕청 평화재단 최고훈장 수상.
▲2007년 청소년 종교지도자 대상 수상.
▲시집 <천년의 신비 부처골> 간행.
▲한민족사랑문화인협의회 상임위원장.
▲ <사림시> 동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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