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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4>'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아미산월 2010. 3. 31. 06:20

ㅁ[영남일보](연재)서지월 시인의 만주이야기<4>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서지월 시인의 만주 이야기 .4]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필자가 장장 9시간 반에 걸쳐 단동에서 눈 덮인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으로 타고갔던 낡은 중국 시외버스의 뒷모습.
필자가 장장 9시간 반에 걸쳐 단동에서 눈 덮인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으로 타고갔던 낡은 중국 시외버스의 뒷모습.
6·25 전쟁 당시 중공군으로 남한땅 낙동강까지 쳐들어왔다고 밝힌 중국 조선족 지병산옹.(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6·25 전쟁 당시 중공군으로 남한땅 낙동강까지 쳐들어왔다고 밝힌 중국 조선족 지병산옹.(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단동에서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흰눈 덮인 북한땅 겨울 산야 풍경.
단동에서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흰눈 덮인 북한땅 겨울 산야 풍경.

버스 바닥의 '구멍뚫린 연통' 알고보니…

#1 낡은 엔진소리도 구수했던 집안가는 버스길

 흰눈으로 무장한 항구도시 단동의 압록강은 꽁꽁 얼어붙어 천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맞은편 신의주는 더욱 동토의 나라답게 꼭꼭 문을 걸어잠근 채 적막함이 싸늘함으로 변해있었다. 얼어붙은 압록강 강상위 위화도는 풀 한 포기 없이 흰눈으로 덮여 세월의 무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말발굽소리도 이제는 먼 옛날 기억처럼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25전쟁 당시 50만 중공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미군이 폭파해버린 단동-신의주간의 부서진 철교는 이제 고물이 아니라 중국의 관광지가 되어 그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곁에 새로놓은 철교 위로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화물차의 행렬이 분주할 따름이었다.  혹한의 겨울 이 다리를 건너 50만 중공군이 폭설을 뚫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입해 동족상단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켰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따름이다.

6.25전쟁이 남긴 상처가 어떠했는가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발길을 쉬이 돌리지 못하리라. 그때 그 비극이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을 초래해 동족끼리 등돌리고 헐뜯고 서로 으르릉거려 왔으니 말이다. 가슴이 아픈 것은 지금의 중국도 아닌 이산가족들이며 우리민족일 것이다. 누가 책임져 주지 않으니 더욱 해결나지 않는 남북분단은 당시 미국과 중국에 의해 다시 나누어진 결과라면 틀린 말일까.  

우리민족의 두 새대의 상흔이 흰눈으로 덮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단동 압록강을 벗어나 내가 무작정 가기로 한 곳은 집안땅이었다. 역사는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낡아 엔진소리가 진동했는데 그러나 아무 탈 없이 잘도 굴러가는 것이었다. 예닐곱시간이면 도착하는데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다.

시골사람들이 날마다 이용하는 유일한 장거리 시외버스로 중국인들은 첩첩산중이라 할 수 있는 시골소읍과 항구도시인 단동을 이어주는 이 시외버스를 타고 장을 봐 오고 하는 것이었다. 버스 안 바닥에는 밟으면 뜨거운 구멍뚫린 연통같은게 드러누워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안에는 코일이 들어있어 벌겋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그게 열을 내어 훈기를 공급하는 일종의 히타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된 버스같았는데 이런 버스가 몇 시간씩 걸리는 장거리 운행에 아무 고장없이 달리는 것이다. 그것도 천지가 흰눈으로 덮혀 미끄러운 시골길인데도 아랑곳 없이.


"6·25때 난 중공군이었다" 노인의 고백

#2 6·25 때 인민군 할아버지와 감회어린 대화 

달리는 버스 오른쪽 차창의 풍경은 역시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얼어붙은 압록강과 흰눈으로 치장한 북한땅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있으련만 내게는 계속 따라오는 압록강과 북한의 산과 들이라는게 예사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만나고 싶어도 자유로이 만날 수 없는 동토의 땅이니 말이다. 집안땅으로 달리는 시외버스 안은 초만원을 이룰 정도로 승객들이 빽빽했다.

내 뒷자리에는 시골 부모님댁에 인사하러 가는 길이라며 중국인 젊은 청춘남여가 앉아있었으며 내가 앉은 통로 좌측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군 모자를 눌러쓴 초로의 어른 한 분이 함께 가고 있었다. 만주땅  어딜 가나 조선족 한두 사람은 만나기 일쑤여서 요행이었는데 마침 조선어를 하는 조선족 중년의 남자가 있어 내 뒷자리의 중국인 젊은 청춘남여와 내 왼쪽의 중국인 어른 한 분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잇었다.  그는 단동에서 조그만 무역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고향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때, 우리끼리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 우리말을 들은 인민군 모자를 눌러쓴 노인 한분이 통로 맞은 편에 조그만 과자상자박스 같은 걸 안고 앉아계셨다. 그분은 66세의 중국국적의 조선족 노인으로 한국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메스컴.언론을 통해서 우리와 똑같이 대하고 있어서 모든 한국정보를 다 알고 계셨다. 한국대통령의 이름을 줄줄이 다 대기도 했다. 이 지병산옹은 평안북도 출생으로 17세때 6.25한국전쟁에 참전해 낙동강까지 내려왔다고 하셨다. 휴전후에는 중국땅에서 젊은 시절 군생활을 10년 했다 한다. 같은 민족이지만 중공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러한 운명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까. 남들이 볼 때는 조금도 놀라울 것 없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내겐 놀라움을 넘어서 쇼크로 와 닿았다. 즉 한국측에서 보면 중공군이었으니 적과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의해 일어난 일이지 인간개인의 잘잘못은 아니고 보면 말이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어쨌든 그 중국어르신과 기념사진도 찍고 몇 가지 말을 노트에 기록해 두기도 했다. 뒷좌석에 앉은 중국인 젊은 연인들은 나하고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었던 어르신하고 나눈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역사인 문화대혁명은 알아도 6.25 한국전쟁을 알 리가 없을 것이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리라.그러나 만주땅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예순이 넘고 일흔이 되어가는 중국의 노인들은 북조선 역사의 상흔으로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원로시인의 한탄 "부끄러워 고개조차…"

#3 덜컹거리는 버스안에서 리삼월 시인을 생각하다 

◆단동에서 장장 9시간 반에 걸쳐 눈 덮인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국 서지월시인과 이은림시인 등과 중국 청춘남여들과 함께.

 

동행한 이은림시인이 뒷좌석에 앉은 젊은 중국청춘남녀와  담소 나누며<미인(美人)>이라고 한자로 써 보여주니까 생글생글 웃으며 고맙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동밍, 25세의 나이로 현재 직업은 없으며 남자친구의 이름은 종명으로 26세로 단동에서 금융계통에 직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은림시인이 두 사람의 관계를 한자로<호(好)>라 써주니 생긋 웃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었던 것. 이런 것만 봐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은 통할 수 있다는 걸 여행중에서 느낄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덜컹거리는 버스속에서도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들 둘의 다정한 모습도 찍어주었다.

내가 지금 흰눈을 뚫고 가고 있는 곳이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부터 19대 광개토대왕때까지 고구려 제2의 도읍이었던 집안땅으로 압록강으로 우측에 끼고 거슬러 가고 있는 덜컹거리는 시외버스 안이었는데 버스가 계속 덜컹거리다 보니 내가 앉은 시트가 낡아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걸 손으로 꼭 쥐고 눌러앉아 가는 것도 여행의 별미였음을 말해둔다.

하얼빈에 가면 리삼월시인이 있다. 흑룡강성을 대표하는 하얼빈의 조선민족 시인으로 하얼빈 조선민족문화예술잡지인「송화강(松花江)」을 흑토에 빛을 보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난 11월 타계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는데 내가 하얼빈 가서 몇번이나 만나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눈 적이 있는데 내게 부끄러운 자신의 행적을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6.25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으로 남한땅 경북 왜관까지 내려왔다고 말하며 부끄러워 하시는 하얼빈 조선족 리삼월시인과 흑룡강신문사 한춘시인, 그리고 한국 서지월시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장면(하얼빈에서, 중간이 리삼월시인)

알고보니,  앞서 중국인 노인에 대해 밝힌 것처럼 리삼월시인도 6.25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군으로 북한을 거쳐 남한땅에 쳐들왔다는 거였다. 이 역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동족인 리삼월시인이 총을 메고 남한땅으로 쳐들어온게 괘씸한게 아니라 같은 동족을 적으로 만든 장본들이 누구란 말인가 생각하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25 한국전쟁이라는게 단순한 남한북한 동족살육을 넘어서서 8.15 해방후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에게도 멍에를 입힌 역사의 비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한 북한 중국조선족 3자의 동족상잔이었다는 것이다. 리삼월시인은 정확한 지리명은 모르지만 경상북도 왜관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그러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다며 한국 가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난  리삼월시인을 달랬다.  '선생님 그런게 아닙니다. '그건 선생님 개인 일로 빚어진 행동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씀하시어 지난 역사의 잘못됨을 시대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하고 위로했다. 하얼빈에서 조선민족 예술잡지 <송화강>초대 주필을 지냈고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원로시인의 만주땅에서 이런 인생역정 역시 아무나 간직하고 있는게 아니니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해 12월 2일 새벽 1시에 심장병으로 영면하셨다는 비보다. 중국조선족 흑룡강성 북방문단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고 리삼월시인은 1933년 5월 15일 중국 길림성 장춘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리경희로  리삼월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000 여수의 시를 창작하였으며 중국조선족 문단에서 우리민족의 문학발전을 위해 혼신을 받치신 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