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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상]<2010년 봄호>(제64호)<기획특집-시와 여행>서지월-'만주땅에서의 나의 시혼'

아미산월 2010. 1. 25. 06:23

[시와사상]<2010년 봄호>(제64호)<기획특집-시와 여행>서지월-'만주땅에서의 나의 시혼'

만주땅에서의 나의 시혼


▲두만강 사이섬(간도:間島)에서, 한국 서지월시인.


서 지 월(시인)

일찍이 춘원 이광수는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목릉을 경유해 하얼빈에 내려 하얼빈에서 모스크바행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가 있는 치타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서정주는 1939년 만주로 가 연길과 용정에 머물렀는데 이듬해인 1940년 봄에 돌아왔는데 <신부>,<만주에서>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나의 만주기행은 일제치하가 아닌 한중수교 이후가 되니 그들과는 판이한 정서라 하겠다. 먼저 내가 가서 보고 듣고 느낀 만주땅의 정서를 한 편의 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땅의 풍정

가서 보면 안다
거기에도 꽃은 피고 강은 흘러
마을을 이루고 있음을
거기에도 사람이 살아
옥수수밭 일구고 울타리 가으로
해바라기 대낮을 환히 밝히고 있음을
나는 거기 가서 2천년전 高朱夢이
나라 세운 옛도읍과 아직도
흑까마귀 빙빙 하늘을 돌아
무언가를 찾으려고 시늉 해보이고 있는
山城과 1600백년전 古墳郡의
해와 달 머리에 인 남자와 여자
그들이 우리의 지아비 지어미임을
알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당나귀 노새 소달구지가 길을 가며
「견육점」이라 써붙인 보신탕 전문식당이
즐비한 풍경 낯설지 않고
때론 하늘은 비를 내리시어
땅을 적시는 것을
더러는 삼등완행열차가 벌판을 가로질러
나를 정처없이 가게 하는 것을
父子有親 같은 만주땅이
나를 놓아버리지 않고 그 어디든
나를 데려가 노래 부르게 하고
이곳에 취해 보라 하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ㅡ시 「만주의 노래」전문

이 시는 만주를 다녀와서 쓴 것이다. 내가 감동 먹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옛정서가 만주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은 선진화의 물결을 타고 옛것들이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시가지에 말이 끄는 수레가 짐 가득 싣고 버스와 택시 사이로 지나가는가 하면 인력거라는게 있는데 자전거와 리어카를 개조해 붙인 일종의 가마형 인력거인데 이것은 가마 타고 가는 기분이었다.
시가지에 말이 끄는 수레가 빈번히 목격된 곳은 고구려 제2의 수도인 집안땅이었는데 용정에 가서도 많이 목격된 풍경이었으며, 가마형 인력거는 압록강변 도시인 단동과 고구려 제1도읍이었던 환인땅에서 유난히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풍경을 보고 왜 황홀해 했을까. 덜 문명된 도심의 서민들 교통수단이었는데 이는 만주땅으로 이주해 간 우리 조선민족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서 더욱 정겨웠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딜 가나 전혀 볼수 없는 가마형 인력거가 그들의 교통수단인 것이다.  

중국 만주땅을 9차례나 밟으면서 느낀 것은 수 편의 대하드라마였으며 그때그때마다 대장정이었다. 한국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을 만주땅에서 체험했던 것이다. 그냥 그 만주땅이 아니라 여기에 매력을 더한 것은 일제치하 한반도에서 건너가 삶의 터전을 잡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조선민족의 터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의 시원의 땅이라는데도 있다.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 체제하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민족만이 갖는 고유한 풍속,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가 하면 나아가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한민족 고대국가가 그 땅을 울려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땅을 밟았다면 감개무량한 것과 같은 감흥을 나는 진하게 받았으며, 그래선지 만주땅은 가보고 와서는 또 가고싶고 또 가고싶고 하는 충동을 지금도 억제할 수 없는게 그 이유이다.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 나면 또 만나고 싶은 충동 느끼는 것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민족 오천년을 이어온 시원의 땅이라는 그것과 한반도의 6배나 된다는 광활한 만주땅이 가 보면 알겠지만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는 데서 그 매력은 다른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으리라 본다. 참으로 대단한 풍정을 가진 땅에 우리 한민족 역사가 시작 되었으며 웅혼한 기상을 드높혔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밟은 만주땅은 60% 정도밖에 안 되지만 90%를 누빈 기분인 것 어찌할 수 없는데 거의 다 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만주땅 최북단 최상류 막하시와 북극촌에서 최하류 동강시 삼강평원까지 누볐으며, 압록강 최하류인 북한 신의주 맞은 편 중국 항구도시 단동에서부터 계속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제2도읍 집안땅과 그리고 북한땅인 혜산 맞은편 장백까지 거슬렀는가 하면, 두만강 최하류인 훈춘 방천에서 두만강 상류인 북한땅 무산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남평까지 거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서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두고 단동까지,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을 두고 남평까지 갔으니 두만강 최상류 숭선땅만 남겨놓은 셈이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으로 만주벌판을 가르질러 흐르는 송화강이 있는데 이 송화강은 고구려 제1도읍 환인땅을 거쳐 고주몽이 태어나 어머니 유화부인과함께 22세까지 살았다는 길림땅을 지나 하얼빈으로 뻗혔다간 다시 북동쪽으로 휘여지는데 한참을 가면 동강시 삼강평원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과 만나 북태평양으로 흘러드는데 갈 수 있는 중국땅 마지막 도시인 무원만 남겨놓고서 삼강평원까지 뻗쳐갔던 것이다.

백두산에 흘러내리는 세 강에 대해선 내가 쓴 <삼형제 강>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三兄弟 江!
서으론 압록강, 북으론 송화강
동으론 두만강이다
백두산할아버지는 압록강과
송화강 두만강 삼형제를 길러
길이길이 백의민족 역사
뻗어가라고 잘 길러 내었지
그 강가에서 목놓아 울기도 했으며
말 달리기도 했건만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
어디로 가 엎드리었고
들풀만 돋아나 아우성같이
흔들리고 있는가
금 그으며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짓
힐끔 내려다보곤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구름송이
그 어느것에도 마음 달래 수는 없었다

ㅡ시 「삼형제 강(三兄弟 江)」 전문.


북방하늘의 땅
  
일찌기 이용악시인이 시로 읊었는데 이는 만주땅을 기점으로 더 북쪽인 오랑캐나라를 노래했다면 나는 한국땅을 기점으로 만주땅을 북쪽으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악은 시 <두만강, 너 우리 강아>에서도 잘 말해주고 있듯이 이용악은 함경북도 어딘가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땅 북간도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있다. 나는 시 <북방하늘의 땅>에서 우리 조선민족 진한 혈육의 정을 읊었던 것이다.  

아아, 북방하늘의 땅
눈물 마를 날 없지 않았지만
저 하늘이 저리 푸르고
바람 불어와 옷깃에 머무는 것 보면
흐르는 강물도 잔돌들 껴안고 살아가며
물동이 물 이고 오는 여인이
내 누이인 것을!

나의 더운 피가
저 하늘에 스며있음을 알아
밥 아니 먹어도 배 부르고
님을 못 만나도 슬퍼지 않았네

모든 것이 사위어갔지만
해가 떠서 열매 맺고
달이 떠서 향기로운 것 보았지
내 눈물 보태어도 다함 없지만
아아, 북방하늘의 땅!

ㅡ시 「북방하늘의 땅」전문.


제1차 만주대장정

뭐든 처음의 일이 오래 남고 설레이듯 나의 첫 만주기행이 가장 감명 깊었는데 인천국제여객선터미날에서 <동방명주호(東方明舟號)> 라는 유람선을 밤 지세우며 타고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 압록강 최하류인 단동에 도착해서 만주기행이 감행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고구려 제1도읍인 환인땅과  제2도읍인 집안땅을 거쳐 통화라는 곳에서 열차를 타고 다시 송강하를 경유해서 이도백하, 장백 등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는데 이 코스가 아주 신비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처음 고구려 제1도읍인 환인땅을 6시간에 걸쳐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했을 때, 환인시가지를 휘돌아 흐르고 있는 비류수와 저만치 병풍처럼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드러내고 있는 오녀산을 바라보았을 때 찬탄을 금치 못했는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손색없는 그대로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먼저 비류수(현재 중국표기로는 혼강) 강가로 나가 땀을 씻었는데 저녁무렵이 되자 하늘에서는 날카로운 초승달이 떠서 한국에서 이곳까지 온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탄식을 시로 읊었던 것이다.


주몽이시여
그대 꿈결의 초승달 하나
그대 2천년 꿈의 머리맡 돌아
비춰오시니 어찌하오리까
벌써, 다 먹어버린 밥그릇처럼
이 땅은 남의 것이 되었으며
이 강 역시 우리의 말(馬)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었음을 아시오니까
2천년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시매
누가 이를 증명하며 부싯돌에
칼을 갈아 저 천공에
번쩍이오리까
주몽이시여,
머리부분 빼앗기고
허리마저 동강나 그 동강난 두 다리
이끌고 천만리 길 마다하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왔건만
조금만 쉬어가라며
이 땅의 새 주인은
비자만 한 장 달랑
손에 쥐어 주더이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흐르는 눈물 닦을만한
손수건도 없이
저 달이 차오르는 것마저
몇날 며칠 지켜보지 못한 채
어디로 저를 가라 하는지
아아, 주몽이시여,
어찌하오리까!

ㅡ시 「비류수에 와서」 전문.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니 대고구려가 천년 신라처럼 우리 품안에 있지 않고 남의 나라의 땅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역사의 비극인라 하는지 민족의 애환이라 하는지.


백두산과 일송정과 사이섬, 그 비극의 현장

백두산에 올랐을 때어도 3분의 2가 중국땅으로 경계선까지 선명했는데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면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세운 도읍 오녀산(원래 표기는 홀승골성 서성산)은 민족의 성산이 아니던가. 나는 백두산을 머리맡에에 두고 전날밤 천지호텔에서 하룻밤을 묶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백두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봉은
세워놓은 병풍으로
천지 호수의 물은 한 잔 술로 떠받들어
조상신께 제사 드리는 듯
백두산 아래 머리 두고 잠을 청하는 밤
쉬임없이 흘러내리는 장백폭포 물소리는
이곳까지 들리는 듯
그 물소리의 기운 온몸으로 엄습하는 기운 느끼며
밤새도록 나는 잠을 뒤척였네

울창한 숲과 가파른 길 내려와서
들뜬 내 이마 짚어주고 가시는 것 같은
백두산 신령님,
열어둔 문틈으로는 별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네

ㅡ시 「백두산 아래에서의 하룻밤」전문.


이렇듯, 내가 백두산을 노래한 것도 보면 '백두산 신령님'은 우리 민족이 수천년 세월을 신령시해 온 제1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백두산 이름마저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도로변 좌측편으로 우뚝 솟아있는 비암산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비암산 중턱에 일제치하 항일독립군의 근거지로 소나무를 한 그루 심어 <일송정>이라 불리우는 정자가 세워졌는데 거기 우리 민족에게는 영원한 얼처럼 애송되고 있는 <선구자의 노래>가 새겨진 비석도 몇해 전 철거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어가고 있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는 그리움으로 벅차올랐던 것이다.


내 누이들이 숨져간 해란강에
나는 무얼 찾겠다고 서성이고 있는가
강물은 저만큼 뒤 안 돌아보고 흘러갔고
내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것 보면
누워서 말없는 저 따뜻한 돌멩이들만
잘 왔노라 반겨주는데,
해란강 해란강 목놓아 불러도
누이들은 보이지 않고
올려다 보이는 일송정 너머론
누이들 남색치마물결로 곱게 물든
하늘만 높네

ㅡ시「해란강에 와서」전문.

이처럼 해란강과 일송정은 변함없는 우리 민족의 얼로 남아 있었다.

9차에 걸쳐 감행한 만주기행 중에 두만강 최상류를 가 보지 않아서 늘 찜찜하던 차에 그 출발지점이 용정이라 먼저 어느 지인이 동행해 주어 사이섬을 지난 2008년 처음 가 보았다. 사이섬이란 <간도(間島)>를 말하는데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간도(間島)>는 두만강상에 떠 있는 섬인데 이 섬을 기점으로 강 건너 북쪽인 만주땅을 <북간도(北間島)>라 불리어지게 된 바로 그 간도인 것이다.

그런데, 거기 섬으로 들어서는 숲길에 별 볼품은 없었지만 자연석에 <사이섬(間島)>이라 새겨진 비석마저도 누군가 밤에 깨뜨려 조각조각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는데 역시 가슴이 찢어질듯 아려왔었다. 도대체 어찌되어가고 있단 말인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수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사이섬에 들어가 잡풀과 모래밭을 헤치고 찾아낸 것은 조금도 손상없이 깨끗한 얼굴을 한 사발 하나였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두만강 건너 북으로 이주했을 때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던 이주민이 남기고 간 사발 같았다. 저기 두만강 너머 남쪽 방향이 되는 북한땅 산기슭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라는 대형 고딕체 흰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또한번 가슴을 후려치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두만강물은 좋다 싫다는 말도 없고 기쁘다 슬프다는 표정도 없이 흘러만 가고 있었으니. 이곳 천평벌은 지난세기 40년대 만주국 강덕황제에게 진상할 쌀을 생산하였다는 <어곡미>라 불리는 어곡전(御谷田) 명품 쌀이 유기농법으로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주땅 최북단을 가다

이제, 북진해 보기로 한다. 연길에서 도문으로 가서 열차를 타고 북진하면 목단강시가 나온다. 목단강시에서 관광버스를 갈아타고 30여분을 달리면 만주땅에서는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경박호>라는 호수가 나타나는데 모택동이 쓴 '천하절경 경박호'라는 휘호가 새겨진 비석이 조금도 손상없이 건재해 있다. 이곳은 발해의 도읍을 부근에 두고 있으면서 고대국가인 동부여 금와왕이 금개구리 형상으로 발견되었다는 설화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목단강시 조금 위에 위치해 있는 도시 <동경성>은 글자 그대로 발해의 옛도읍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목단강시에서 다시 또 열차를 타고 계속 북진하면 레일이 좌측으로 좀 휘어지면서 4~5시간 후에 도착하는 곳이 하얼빈이다. 알다시피 하얼빈은 안중근의사가 원흉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하얼빈역이 그 현장이다. 하얼빈의 송화강은 강폭이 넓어 그 흐름도 완만한데 내 생각으론 파인 김동환시인이 남긴 시 <송화강의 뱃노래> 현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강폭이 넓고 봉황이나 갖가지 청룡, 백호, 주작의 머리를 한 유람선이 떠서 세월을 얹고 있는 것 보면 나 먼저 파인 김동환시인이 와서 이곳 정취를 담아 늠름한 남아의 기상으로 시로 읊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재미있는 말은 흑룡강신문사에 근무하는 한춘시인이 내게 들려준 말인데 송화강변 유원지에 나가면 에 100미터 간격으로 미인이 걸어가는 것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과거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던 하얼빈이었기에 미인의 대명사인 러시아처녀들을 일컫는 것 같았다. 몸이 근질근질해 못 견디어 쓴 시가 바로 <美人의 나라>이다.


美人이 많다는
하얼빈에 와서
프리지아 꽃향기 같은
이국정서 느끼네

美人의 나라에는
靑石으로 바닥을 깔아
구두발자국 소리뿐만 아니라
날씬한 종아리 탄력의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하얼빈에는 아마
송화강이 그 美人들을
날마다 비추며 심심하지 않을 테니

오늘은 송화강에 나가
100미터 간격으로
美人이 걸어가는 것 볼 수 있다는
그녀들 종아리 따라 나설까
흩날리는 머리결 따라 나설까

ㅡ시「美人의 나라」 전문.


이곳 하얼빈에서 만주땅 최북단으로 오르는 세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왼쪽으로 거슬러오르는 흑룡강 최상류이며 두번째가 중앙으로 거스러는 흑룡강 중상류인 흑하시이며 그 세번째가 오른쪽으로 거슬러 굽이지는 흑룡강 최하류로 가는 동강시와 삼강평원 지점인 것이다.
나는 이 흑룡강 최상류에서 최하류까지 다가보았는데 7천리나 되는 긴 강이었다. 흑룡강을 두루 탐사한 나의 감흥은 가슴에 다 퍼담을 수 없었는데  흑룡강 최상류이며 중국 전체 땅덩어리의 최북단이기도 한 북극촌에 이르러 흑룡강 물살을 만졌다는 것, 거기서 광개토대왕이 넘었다는 대흥안령산맥을 끼고 끝까지 북진해 우리 민족 시원의 새 부활을 꿈꾸어 본 것이다.

해가 저물면 마음도 저물고
江이 저물면 내 사랑 뒤켠에 있는
푸른 버들도 저무는가
어느날 이 江에 와서 빨래를 하던 女人
그 뒷모습같은 바위 하나 굳어져 말이 없네
내가 그 바위 문 열고 들어가면
新房이었던 자리 옷고름 맨 女人 하나
아주까리 등불아래 다소곳하게 앉아
장차 이 나라 새로 일으켜 세울 아기장군 잉태할
黑龍의 胎夢 예견하고 있겠지
곧이어 용의 눈썹을 한 건장한 사내
말머리 세워 놓고 房에 들겠지
그 사내가 지금 이 강에 와서
소리쳐도 열리지 않는 바위 앞에 마주서서
스물 여덟 개 하늘의 별 불러들여 굳게 닫힌 문 열면
바위깨고 나오는 아기장군 울음소리 천지를 진동해
江을 거슬러 오르는 거북이떼와
하늘을 가득 메우는 흑가마귀떼 울음소리
대나무로 만든 퉁소소리 한데 어울러
둥근 달과 뒹굴 때
저 강 건너오는 오색깃발들 차오르는 물살의
북소리 울리며 南下하는 馬車의 바퀴소리로
새 하늘이 열리는 것을
아아 수억겁의 내 사랑이
길을 열어 子孫萬代 진달래꽃 머리에 꽂은
어진 百姓의 나라 이룩함이여

ㅡ시「黑龍江에서 부르는 노래 4」전문.


그리고, 흑룡강 중상류에 위치한 흑하시 강둑에서 강 건너 맞은 편 러시아땅 블라디비센스코를 바라본 풍경이 일품이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흑룡강 최하류로 통하는 삼강평원과 그곳에 대한 거대한 매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강시에서 승용차를 잡아타고 끝없이 펼쳐진 삼강평원을 누비게 되었는데 도착한 지점이 삼강공원이었다. 삼강공원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가이 장관이었는데 북태평양이 손짓하는 듯한 충동마저 느껴졌으니 말이다.
무어라 해도 돌아나오는 길의 삼강평원의 해지는 풍경이 또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두고두고 잊지못할 삶에 대한 그 무엇이 널려있었던 것이다. 바로 <해가 지는 삼강평원>이라는 시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쬐끔한 날벌레 한 마리 날아들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먼지 알갱이
두서넛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아, 해가 지는 해가 지는 지평선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펼쳐진
그대로 해가 지고 있는 삼강평원
잘난 것 못난 것 둥근 것 모난 것
하나 보이지 않은 채
어디로 갔는지 내 사랑은
날개 가진 내 사랑은 어디에서
비어가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을까
날개, 날개, 날개……
아, 날으고만 싶은 욕망들이 잠재워진 채로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단지
저 붉은 황혼 말없는 황혼만이
치맛단 내리듯 세상의 모든 것 거두어들여
어디론가 떠날 채비이고 보면
아, 해가 지고 있는 지평선
그 위에 내 육신도 드러누워라
드러누워 수억 만년 일어나지 말거라

ㅡ시 「해가 지는 三江平原」전문

중국 만주땅 최북동쪽 흑룡강 하류에 위치한 삼강평원(三江平原)은 남한땅의 대구경북을 합친 크기의 '북대황'으로 불리어진 황페했던 땅으로 송화강과 우수리강과 함께 합류해 북태평양으로 흘러가는데 해지는 광경이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길림이라는 곳

이쯤에서 방향을 바꾸어  길림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길림은 고주몽이 태어나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부여  도읍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송화강이 북진해 뻗어가다 보면 하얼빈 송화강에 당도하기 전에 길림땅을 휘돌아 거스르는 곳이다. 이곳 길림땅은 광개토대왕이 북진하며 쌓았다는 그 유명한 고구려산성(일명 용담산성)과 고주몽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동단산성이 잇는데 그 용담산성에서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송화강 강가에 위치해 있다. 나는 이 길림땅을 잊을 수 없다. 한 편의 시로 축약해 보았다.


어찌된 것이냐
한줌 흙 풀 한 포기
구르는 돌멩이마저 말 없으니
여기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땅 아니더냐
벌판을 휘둘러 온 저 바람마저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불고 간다
어찌된 것이냐
강과 언덕아 나무들아
분명 이 곳은 낯선 땅 아닌데
저 廣開土大王 말발굽
이곳에까지 닿아 북녘 향해
북소리 울렸다 하는데
어찌된 것이냐 그 옛날
柳花夫人과 朱蒙이 살았다는데
활 잘 쏘는 주몽의 화살은
어디 가고
물 긷던 동네 아주머니들
물항아리는 어디에서 쉬고 있는가
송화강 물 길어 저녁밥 지으면
지붕위론 새하얀 박꽃 피던
시간마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아 이리도 내 마음
답답해져 오는 것은 저 강줄기
휘돌아 흘러 벌판을 향해
함께 흐르지 못하기 때문인가

ㅡ시「吉林의 노래」전문.


유리왕의 수양버들나무에 대한 그리움

이토록 열심히 만주땅에 대해 애착이 가는 것은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라기 보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발정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 머리맡에 떠 놓은 냉수처럼 늘 내 머리맡에 손 내밀면 닿을 듯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게 용케도 아주 늦었지만 1999년에 첫단추를 끼웠던 만주대장정이 되었던 것이다. 고주몽이 길림땅에서 태어나 22세에 어머니 유화부인을 두고 남하하여 닿은 비류수와 오녀산 정상까지의 행로도 행로이지만 고대시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의 현장이 어딘지 늘 내 가슴엔 축축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이마에 흐르는 땀 닦으며 말고삐 놓고 쉬었다는
유리왕의 수양버들나무 어디 있는가
유리왕은 가고 없고 그 수양버들나무
어디에서 잎 틔우는가 불고가는 바람결에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가
가늘은 조선여인의 허리같은 가지 늘어뜨리며
훈풍과 노닐다가 하나 둘 이파리 땅으로 흘리는가
그 수양버들나무 위 공중에서 랑데뷰하던 꾀꼬리 한 쌍
그들도 나이 먹고 늙어 이 세상을 하직했을 터,
내가 말하는 것은 유리왕이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쉬었다는 그 수양버들나무
서 있는 곳 어디인지 왕비였던 조선 여인 화희(禾姬)와
애첩이었던 한(漢)나라 여인 치희(雉姬)마저
이기와 질투로 싸우다 치희가 떠나버렸다는
비보가 당도했던 그 수양버들나무가 서 있던 곳
내가 찾는 일이다

ㅡ시 「유리왕의 수양버들나무」전문.


내게 남아있는 그리움이 바로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이마에 흐르는 땀 닦으며 말고삐 놓고 쉬었다는 유리왕의 그 수양버들나무가 서 있던  곳을 찾아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민족 오천년 역사에 남아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황조가>의 현장이니까 찾아가 보고 싶은 것이다.

<끝>

= 서지월시인 약력 =

• 1955년, 고주몽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 출생.
• 대륜중고등학교를 거쳐 대구대학교 졸업.
• 1985년,『심상』및『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
• 1993년, 제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
• 2003년, 중국 연길 한국정지용시인 국제세미나 참가 등 9차례에 걸쳐 만주땅 전역을 답사함 .
• 대구문인협회 외국문학분과위원장 맟  한중공동 시전문지『두견화』한국측 편집 주필. 만주사랑문화인협회 상임고문.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시집으로『꽃이 되었나 별이 되었나』(1988, 나남출판사),『江물과 빨랫줄』(1989, 문학사상사),『가난한 꽃』(1993, 도서출판 전망),『팔조령에서의 별보기』(1996, 도서출판 중문),『백도라지꽃의 노래』(2002, 중국 요녕민족출판사),『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2003,천년의 시작) 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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