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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서지월시인 만주역사기행 . 2] 환인.통화.길림.하얼빈

아미산월 2009. 11. 30. 05:02

ㅁ[영남일보][서지월시인 만주역사기행 . 2] 환인.통화.길림.하얼빈

[서지월시인 만주역사기행 . 2] 환인.통화.길림.하얼빈

*환인 시가지의 밤풍경

 

집안(集安)을 출발, 길림성 환인(桓仁)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무렵. 이미 어둠이 깔린 눈길을 따라 시가지로 들어서니 불을 밝힌 홍등(紅燈)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환인 조선족 소학교의 김안영 선생의 말로는 새해 전야제로 홍등을 길거리에 매다는 것이 이곳 풍습이란다. 대신 한국 처럼 신년 해맞이 풍습은 없다고 했다.

 

*오녀산성

 

아침 일찍 지프에 몸을 싣고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향했다. 환인에서 30분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 곳은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의 시조인 주 몽(朱蒙)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 을 정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오녀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객차가 겨울철에는 운행을 중단하는 바람에 300여개나 되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정상까지 올랐다. 그러나 10 0여m의 절벽위에 남북 1km, 동서 300m로 이뤄진 넓다란 평지 곳곳에는 주 춧돌 하나,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이곳 성안에는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 池)'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연못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비록 수심이 2m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르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 이 연못은 고구려인들 이 식수를 제공받았던 곳이라고 한다.

 

*동단산성과 용담산성

 

길림(吉林)은 환인과 통화(通化)를 지나 송화강을 계속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부여의 옛땅이다. 이 곳은 2천500년전 부여의 옛 왕성이던 동단산 성(東端山城)과 주몽의 고향마을이 송화강을 배경으로 잠들어 있는 곳이다 .

동단산성 옆에는 또 하나의 산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중국인들이 고구려 의 최북단 산성이라고 주장하는 용담산성(龍潭山城)이 그 것. 높이 2.4m의 성벽을 돌로 쌓은 이 산성은 광개토대왕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군수물자나 식량을 보관하던 한뢰(마른 연못), 군사와 말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음마지(저수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얼빈의 빙등축제

 

흑룡강성의 중심도시인 하얼빈(哈爾濱)은 길림에서 버스로 3시간 거리. 이곳은 우리에게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특별열차를 타고 온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안 의사로부터 4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때 그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현재 아무 것도 없다. 오 래전 중국 당국이 하얼빈역을 개.증축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얼빈의 한겨울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0도. 그래서 송화강의 두꺼운 얼음을 떼어다 조각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빙등제(氷燈祭)가 해마다 1월초 부터 한달간 조린공원(兆麟公園)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완성된 얼음조각 품의 신비함과 웅장함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731부대 죄증진열관과 시체소각장

 

만주벌판 교외를 벗어나면 삭막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물지 않은 역 사의 상흔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얼빈 시내에서 50km 떨어진 위성도시 평 방구(平房區). 이곳에는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이라 쓰인 3층건물이 우뚝 서있다. 우리 동포와 중국인들을 생체실험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 현장이다. 1936년부터 10여년동안 생체실험에 사용했던 페스트균 증식기와 주사기, 현장사진, 생체실험 대상자 명단, 당시 건물구조 등을 상세하게 재연한 자료들이 2층 전시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진열관 오른쪽에는 콘크 리트 건물 잔해가 남아 있는데 일본 관동군이 생체실험에 사용했던 시체 소각장이었다.

 

*하얼빈 정서

 

하얼빈에서 머무는 동안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이 하얼빈 조선족문화관, 문예잡지사 '송화강', 하얼빈 조선어방송국이었다. 이 모두가 모국어를 보 존, 민족자주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앞장서 펼치는 곳이었다. 특히 '송화강'의 주필을 역임한 이삼월(李三月) 시인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으 로 참전, 38선까지 내려온 바 있어 민족분단의 역사가 새삼 뼈저리게 느껴 졌다. 서지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