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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2009)<대륜 대륜인>민족서정시인, 서지월시인

아미산월 2009. 10. 17. 13:54

[샛별](2009)<대륜 대륜인>민족서정시인, 서지월시인

 

[샛별](2009)<대륜 대륜인>


민족서정시인, 서지월시인

 

 


한국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건국한 요녕성 환인땅 오녀산성을 새 천년의 시작인 2000년 1월 1일에 올라  해맞이를 하며 웅혼한 민족기상을 키웠는가 하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올라 민족서정시를 낭송한 바 있는 대륜 출신의 민족서정시인인 서지월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문학평론가 박태상교수는『 서정의 질그릇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이라는 서지월작품론에서,

 ㅡ「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서지월 시인은 가장 전형적인 서정시인이다. 시인 치고 서정성을 강조하지 않는 시인이 없겠지만, 서시인은 유독 김소월 - 서정주 - 박목월로 이어지는 한국의 전통적인 에스프리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주류 서정시인이다. 서지월 시인이 김소월에서 나왔지만, 김소월에 머물지 않고 김소월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시 「나는 마차를 끌고 싶다」에서 단순한 서정과 미학을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에 대해 반추해 보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시적 계보측면에서 정지용 - 조지훈 - 신경림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아름다움과 민중적 흥취를 조화시킨 전통의 계승은 시인 서지월을 한국문학사에서 순수 서정시의 굳건한 초석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라 언급했다.

 

 

졸업 후 35년만에 모교초청 문학강연 가짐

 

 

▲대륜고등학교 대강당에서 후배학생 1300여명 앞에 문학강연을 하는 서지월시인.

 

지난 8월 28일에는 대륜고등학교 졸업 후 35년만에 시인이 된 신분으로 모교의 초청을 받아 대륜고등학교 대강당에서 1200여명의 재학생을 대상으로「나와 대륜, 그리고 민족서정시」라는 주제로 문학강연을 해 후배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은 바 있다.

모교에서 문학강연을 가진 서지월시인은, 강연요지에서 밝혔듯이 평생을 전업시인으로 살아온 시인으로 중학교 2학년때부터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으며 40년 세월동안 하룻밤도 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시인의 사명이란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이 투철해야  올바른 그 나라의 모국어 시인이라는 것이다. 외래문화가 난무하고 고유한 것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시대 시인으로서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서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소신도 밝혔는데 거짓과 위선이 난무한 시대에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며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 했다.

 

대륜 학창시절 시인이 되고자 꿈을 키워

 

 

▲서지월시인 망중한-생가 골목에서


서지월시인은 1955년 음 5월 5일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서 대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 그리고 연개소문과 같은 단오날 출생하여 가창초등학교를 거쳐 대륜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대륜중 2학년때부터 시인이 되고자 꿈을 키워 대륜고 3년간 <씨알>, <회귀선> 문학동인 활동을 통해 열심히 문예활동을 했으며 그게 밑거름이 되어 좌절하지 않고 시인의 꿈을 더욱 확고히 다져나갔던 것이라 한다.  

일찌기 대륜고등학교는 영남지역에서도 가장 문인을 많이 배출해 낸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일제치하 교남학교 시절 <광야>의 이육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같은 민족시인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며 국회의장을 지낸 바 있는 당시 교장인 한솔 이효상을 비롯해 조기섭 이성수 같은 모교출신시인이 대륜의 문학풍토를 기름지게 해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서지월시인은 1985년 고 박목월시인이 창간한 시전문지「심상」및 「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시가 각각 당선되어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해 『강물과 빨랫줄 』 ,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 『 가난한 꽃』, 『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등을 펴냈으며, 현재 한국시단에서는 민족서정시의 그 맥을 잇고있는 독보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되고 있기도 하다.



중국에서 가장널리 알려진 서지월시인

 

 

▲서지월시인.중국 장백산문학상 수상(왼쪽에서 첫번째)


특히 한국시인으로서는 유일하다시피 동북삼성인 중국 만주대륙을 9차례나 밟으며 웅혼한 민족기상을 시로 승화시켜왔는데 일간신문에 6년에 걸려쳐 연재한 방대한 만주기행문과 고구려역사 현장시도 수백 편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더우기 웅혼한 민족기상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써는 한국시단에서는 전무후무한 시인으로 알려졌으며 2002년에는 중국 「장백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 』(白桔梗花之歌)가 한국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출간된 영예를 안게되기도 했다.

특히 대한민국 전업시인 1호로 알려져 있기도 하는데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후 의성 다인중학교 봉화 춘양고등학교 국어교사 2년이란 짧은 기간 교편을 잡은 그 이후 지금까지 20년 넘게 오로지 전업시인으로 활동해 왔으며 1999년도에는 대한민국정부 전업시인특별문예창작지원금 수혜시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문단과 한국문단에 크게 공헌했는데 명문인 현대시칭작전문강좌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으로 20년 가까이 우수한 대구시단 및 한국시단에 숱한 제자시인들을 많이 배출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한중공동 시전문지『해란강』한국측 편집 주필 및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상임고문. 한중문예대학 및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으로 있다.


 

전통서정시의 주류,그 맥을 잇다

서지월시인의 가장 한국적인 시를 한 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햇빛은 항시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이지만
얼굴 없는 바람은
부뚜막 위에서 불고
장독대를 넘어와
어머니의 허이여신 머리칼 위에도
분다.


하늘과 땅 그 크낙한
화해를 위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분별(分別)을 위해
두 귀 바지랑대는
생명의 줄을 튼튼히 받치고 있다.

천년풍우 그 어느날에도
우리의 제기(祭器), 제기(祭器) 같은 것.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휴식(休息)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ㅡ 서지월  시「 江물과 빨랫줄」 전문.


부모없는 자식 없듯이 어린날 시골 마당에 빨랫줄이 쳐져있고 거기 우리의 옛 어머니들은 손시린 냇물에서 빨래를 해 가지고 와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어말리는 수고를 집안 식구를 위해 자식을 위해 평생해 오신 것이다. 그걸 서지월시인은 놓지치 않고 전통서정시 기법으로 읊어보인 것이다.

그리고 서지월시인 시비가 한국전원생활운동본부 주관으로 詩碑「신 귀거래사」가 영천 보현산자연수련원에 2006년도에 세워졌으며, 2007년에는 달성군 주관으로 한국시인협회 MBC KBS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등 후원으로 詩碑「비슬산 참꽃」이 비슬산 자연휴양림에 세워졌다.


[서지월시인과의 인터뷰]

**대륜 출신의 시인으로서 대구는 물론 한국 뿐만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너머 중국 만주땅까지 가는 곳마다 '한국 서지월시인'이라는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 모교출신 서지월시인을 만나 대담을 나누어 보았다.

학청시절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촌놈입니다. 우리 나이에 촌에서 태어나 자라나지 않은 사람 잘 없겠지만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서 태어나 가창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 시절부터 버스로 통학하며 수성방천에 있는 대륜중고등학교를 6년간 다녔지요. 나는 그때 굉장한 꿈을 가졌었는데 바로 내가 이 나라 이땅 이 지역 시인이 되는 거였습니다. 김소월과 같은 민족시인이 되는게 꿈이었습니다. 저 북한땅 평안북도 정주 곽산 골짜기에서 김소월시인이 나왔다면 이곳 남한땅 경상북도(지금은 대구광역시) 달성 가창 골짜기에 서지월이라는 시인이 나온다는게 내 소명같이 생각했습니다.


대륜학교 학창시절 받았던 영향이 무엇입니까?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게 주로 단군왕검부터 안중근까지 한민족 역사의 위인시리즈였습니다. 그러니까 5천년역사를 초등학교 시절 완전히 섭렵을 한 셈이지요. 그리고 대륜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방과후면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냈는데 이때 읽은 것은 주로 문학서적들이었습니다. 강소천아동문학접집을 비롯해서 김소월시집 등 그게 대륜공등학교까지 이어졌는데 나는 대륜중고등 6년간 도서관에서 문학서적을 뒤적거리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중에 내 시집도 여기 도서관에 오면 꽂혀있을까 하는 생각도 미리 가져보았던 것이지요.    


시인이 참 많은데 민족시인이 되신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

 

 

▲제9차 만주기행에서 백두산에 올라, 시「바람불어 좋은 날」을 낭독하는 한국 서지월시인.

-그냥 시인은 그냥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지요. 사물이나 대상을 두고 느낌이나 사유를 집어넣어
문체를 꾸미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통서정시나 민족적인 기상을 노래하는 서정시는 체질이어야 된다고 봅니다. 아니면 역사와 민족,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안목이 길려졌을 때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 민족의 숨결을 보전하며 노래하는 시인이 진정한 그 나라 그 민족 그 지역의 시인 아닐까요.


중국 만주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시인이라 들었는데 말씀해 주시지요?

 

 

▲서지월시인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백도라지꽃의 노래」(『白桔梗花之歌』)


-사회인이 되어서 동료들 보다는 좀 늦게 시인으로 등단을 했지요. 서른의 나이였으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줄곧 전통서정시를 써왔습니다. 알다시피 전통서정시는 좀 고루하게 보는 경향도 있지만 우리의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살던 고향이 눈 가린다 해서 없어지는게 아니듯이 우리의 풍습이나 정경, 조상의 숨결은 눈에는 안보이지만 흐르고 흐릅니다, 그걸 노래하는 거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민족서정시란 우리 민족, 역사의 큰 흐름을 간파해 시로 승화하는 일이지요. 좀 늦었지만 1999년도 처음 만주땅을 밟았는데 그때 압록강도 보고 두만강도 보고 해란강 송화강도 만났는데 그게 우리 5천년 역사의 땅이라는 겁니다. 이걸 어찌 그냥 두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피가 끓었지요. 그래서 그 이후 만주땅 저 최북단 흑룡강 7천리까지 열심히 만주땅 전역을 답사하며 많은 것을 얻고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내가 있는 것이라 봅니다.


시가 가곡으로 많이 불리워지고 있다고 하는데 말씀해 주시지요?

-좋은 말입니다. 시가 시로서 끝나는게 아니라 인접예술과 하모니를 이룬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 봅니다, 문학작품이 문학작품 자체의 여운도 있겠으나 그게 음률에 실리거나 그림과 조화를 이룬다면 새로운 창조가 된다고 봅니다. 내가 쓴 작품이 가곡으로 작곡된게 10곡이 넘는 걸로 아는데 <건들바위>, <비슬산 참꽃>, <한국의 달빛>, <달구벌의 빛과 소리>, <울릉도 섬말나리꽃> 등은 그 자체가 우리 고장을 노래한 가곡들이지요. 특히 대구 MBC 창작예술가곡인 <달구벌의 빛과 소리>는 내가 직접 시를 쓰고 계명대 음대 김정길교수님께서 작곡하셨는데,  대구 MBC 문화방송 창사 43주년을 맞아 작곡된  대구문화방송의 노래가 되었지요.


앞으로의 바램이나 사명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요

-할 일이 많습니다. 대개의 시인들은 자신의 시만 쓰고 이름 빛내기를 갈망하는 걸로 아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제까지도 함께 나아가는 삶을 추구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입니다. 바램이라면 내가 더욱 좋은 시를 써나가는 일입니다. 민족과 역사 그리고 시대 앞에 당당히 남길 수 있는 시를 계속 쓰는 일일 겁니다.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라는 한중문화예술단체도 조직했는데 이는 한국과 중국조선족과의 문화예술교류의 장입니다. 내 필생의 작업이라 보는데 여기에 깨어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와 후원이 있으면 더욱 든든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조선족들을 위해 하는 일이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만주땅에 조선족이 없다면 우리민족의 과거 5천년 역사의 터전도 없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들이 지키고 있다고 해야 옿겠지요. 많이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민족의 얼을 보전해 나가는 일이니까요.


전업시인으로 살아왔다 했는데 마지막으로 전업시인의 삶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서지월시비「비슬산 참꽃」*서지월시비「신 귀거래사」

예, 좋은 말입니다. 누구나 전업시인을 꿈꾸겠지요. 알다시피 시인은 돈이 안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시를 써 줘봤자 댓가를 지불해야되는 건지 아닌지 자체를 모르니 한심합니다. 지각이 없는 사화라 봐야 하겠지요. 일간신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통닭이나 자장면 시켜먹으면서는 돈을 지불하는데 시를 받아가져 가서는 게재만 하고 원고로 지불할 생각 아예 못 가지니 한심할 노릇입니다. 책이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는게 아니듯이 돈도 하늘에서 눈송이나 빗방울처럼 공짜로 떨어지는게 아니지요. 그런데 왜 공짜로 가져갑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애들은 학교 가는데 아침마다 돈 달라 하지요, 돈이 생기는데는 없지요. 내 집사람하고 말 안하고 지낸지가 5년이 넘습니다. 물론 얼굴도 안 보고 한 지붕 밑에서 나는 이쪽 방에서 시쓰며 살아가고 애들과 집사람은 저쪽 방에서 지냅니다.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ㅡ'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서지월시인은 토로했는데 우리시대가 한 시인에게 안겨주는 충격은 너무나 큰 것 같다.

<샛별 편집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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