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선사문화제]흥천사 과거길 서낭신 초혼제(招魂祭)
ㅁ[나옹선사문화제]흥천사 과거길 서낭신 초혼제(招魂祭)
일시 2009년 7월 19일 오전8시 ~오후3시까지
장소 : 성황사 / 흥천사 단군전앞 노천마당
[나옹선사문화제]<조령산신녀 초혼제>서지월 시-'조령산 서낭신녀(鳥嶺山 서낭神女)'
<詩>조령산 서낭신녀(鳥嶺山 서낭神女)
서 지 월
徐 芝 月
서낭神女는
수 백년을 옮겨다니지도 않고
鳥嶺山에서만 살아
한양 과거길 가는 선비들
걸음걸이나 이마만 봐도
장차 나라에 쓸모 있는 자 쓸모 없는 자
척척 잘 알아차려 가려내어서는
쓸모 있는 자는 고갯길 무사히
잘 넘어가게 해 장원급제하게 하고
쓸모 없는 자는 허둥지둥 고갯길 넘어가
과거를 봐도 낙방하게 하는 영험으로
문경 새재길 지켜왔다는
鳥嶺山 서낭神女
산신령 호랑이 등을 가마처럼 타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누비며 다녔다는데
지금도 山제비 반기며 넘다들고
서낭神女 옷매뭅새 빛깔로
山도라지꽃 피어서
바람 불면 살래살래 머리채 흔들더이다
서낭神女께서는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山도라지꽃 속에 들어가 동그마니 앉아계시는지
아니면, 山제비 영혼으로 훨훨 날아다니며
아직도 지나가는 길손들 굽어 살피시는지
神女여, 神女여,
서낭神女여,
배 고프면 산딸기 따 먹고
적적하면 산고갯길 나와
네 모습 보여주려무나
**성황사(城隍祠)
여신을 모신 사당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지만 1975년 상황사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헌종 10년(1844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되어 아마도
1700년대에 건립된 사당으로 보인다.
성황사 여신은 영험이 뛰어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구전으로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다.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이 젊었을 때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성황사 여신이
예쁜 색시로 나타나 새재를 같이 넘으면서 최명길에게 "장차 나라에 큰 일을
칠때 청나라와 화친하여 나라를 보전하라"는 말을 해주어 그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나라의 중신들이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것을 제의하고 나왔으나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구했다는 전설이 스려 있기도 하다.
최명길이 호란후에 그 예언을 사례하고자 이곳에 신당을 지어 주었는데
이것이 주흘신당이고 이 주흘신당은 주흘산사로 호란 이전의 기록 에도 나타나므로
최명길의 설화는 후세에 이곳을 넘어가는 숱한 사람이 안전을 위해 빌었던
산신신앙의 유물로 윤색 되지 않았나 싶다.
아울러 최명길의 전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설화가 대부분 그러하듯, 어떤 원통한 사연에 인과를 모색하는 모티브를
형성시킨다.
신선한 휴머니즘이 묻어 있는 성황당 여신과 관련된 설화 한토막을 살펴보면..
신립장군이 스무살 무렵, 무과급제를 꿈꾸고 이 험난한 새재로 호랑이 사냥을
나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호랑이에 홀려 미행 하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산중의 한
외딴집을 찾아 드는데 그 외딴집에는 묘령의 색시가 살고 있었다.
그 색시는 산적의 아내로 원래는 종이었던 산적이 양친을 죽이고 가산을 턴
다음 그녀를 납치, 이 산중에서 동거 중이라고 고백한다. 청년 신립은 이 가엾은
낭자를 구하고자 곳간에 숨어 산적을 기다리는데 키가 7척인 산적과 궁술로 싸워
그를 죽인다.
원수를 갚고 몸을 구해준 이 은인에게 낭자는 몸을 맡길 수 있길 원하지만 무사도
에서 금색은 훈령이라 신립은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규율이냐? 인간이냐? 성리냐? 성정이냐? 헬렌이냐? 헤브류냐?....
많은 고민끝에 신립은 결국 무사도 정신으로 규율을 택하여 그만 이 낭자를 버리고
험준한 산속을 떠나가게 되고, 급기야 버림받은 낭자는 애걸복걸하며 매달렸다가
죽어서도 한을 풀지 않겠다며 초가삼간 집으로 되돌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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