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인학교 강의시]오세영 감태준 이태수 정일근 강연호 시편
ㅁ[대구시인학교 강의시]오세영 감태준 이태수 정일근 강연호 시편
**2009'현대불교문학상 시상식에서, 오세영 감태준시인과 함께 한 대구 서지월시인.
[2009'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
장작을 패며
오 세 영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러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2009'현대불교문학상 수상, 오세영시인 수상.
반성
감 태 준
온종일 여기저기 허공에 빠뜨리고 다닌 깃털을 불러들인다
돌아온 깃털들은
머리맡에 접어둔 날개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지금
서둘러 오고 있거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변두리 변두리 허공을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영영 잃어버리는 깃털이 없다고는 믿지 말자
내가 까맣게
그 이름과 얼굴을 잊고
부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돌아오지 못하는 깃털이 늘어나
두 날개의 살갗이 닳아지기 시작한다면!
그리하여 어느 날 뼈날개를 달고 공원에서 여린 햇빛
을 쬐고 있는 새가 되지 않는다고는
자신하지 말자
지리산 오솔길
이 태 수
지리산 고즈넉한 자락에 들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희미해지는 낮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멧새들의 낮고 따스한 지저귐.
자꾸만 물러서는 길 더듬어 떠돌던
내 발자국들이 빚어놓은
저 희미한 포물선. 그 너머로
하염없이 가는 몇 점 조각구름,
무심한 바람 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나뭇잎들.
작아지고 작아지다 가까스로 만난
산속의 작은 길 하나.
마음 비우고 길 다 버리고서야
가르마처럼 열리는 숲 속 길,
햇살 뛰어내리며 되비추는
우리의 저 오솔길 한 줄기.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 일 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강 연 호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방죽 너머 긴 머리채를 푸는 산그늘이 서러워질 때
언젠가 무작정 상경하고 싶었지만 갈 곳 몰라
이름 모를 역광장에 입간판처럼 서 있을 때
어느새 조약돌만큼 자란 목젖이 싫어
겨울 다가도록 목도리를 풀지 않고 상심할 때
쉽게 다치는 내성의 한 시절을 조용히 흔들며
가만가만 가지마다 둥지를 트는 속삭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내가 실연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출렁거리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남아 쓸쓸해질 때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 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림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허나 운명은 언제나 텅 빈 복도를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와 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법이네
다짜고짜 따귀를 후려치고 멱살 낚아채
눈 가리고 어디론가 무작정 끌고 가는 것이네
내 어느날 문득 더 자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묵념처럼 세상은 함부로 권태로워지고
더 이상 간직할 슬픔 하나 없이 늙어가는 동안
옛날에 나무에 스치며 나를 키우던 바람소리
다시는 듣지 못했네 들을 수 없었네
ㅡ200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