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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詩壇]신지혜 시-'밑줄'

아미산월 2008. 10. 3. 04:52

[오늘의 詩壇]신지혜 시-'밑줄'



밑줄

 



신 지 혜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신지혜 /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 Famous Poets Society (2001 시인) 선정. 미동부한국문인협회원. 재미시인협회원. 현재 뉴저지 거주.

<해설>

-사유의 칼날이 번뜩이는 작품이다. 일상에서 흔히 보게 되는, 아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바지랑대 위의 빨랫줄을 시인은 치밀한 상상력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비어있는 날들이 많은 빨랫줄을 '밑줄'이라 변용한 것부터 시인의 직관력은 뛰어나다. 서지월시인의 전통서정시 '강물과 빨랫줄', 영일문학상 당선작인 이은림시인의 빨랫줄의 사계' 등이 있으나 전통어법과 서정체계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론적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데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새롭게 다가온다.    

 게다가,  비어있는 빨랫줄을 '소중한 말씀', 잘 삭힌 고요' 등 추상적 의미망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표현력이라 하겠다. 빨랫줄이란 빨래를 널어 말리는 하나의 도구라 볼 수 있는데, 시인은 빨래가 널려있는 세계를 거부하고 비어있는 빨랫줄의 세계를 자신의 독창적인 어법으로 구축한 것이다. 

 

(한국 서지월시인/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