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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우리가 지금 백석시인을 말하는 것은

아미산월 2008. 9. 22. 01:11

[칼럼]우리가 지금 백석시인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백석시인을 말하는 것은

 

 

**백석시인의 모습

 

徐 冊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월의 스승은 김억시인이며 백석시인은 오산중학교 소월의 후배이다. 백석이 시를 쓰게 된 것도 선배인 소월과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다 하니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소월은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한 비운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었지만 백석은 한평생을 유랑으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백석시인이 8.15 광복과 더불어 신의주에서 행방불명이 된 걸로 알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그의 생사를 모른 체 만주땅 어딘가를 떠돌다가 객사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백석은 8.15 광복 후 행방불명이 되어 객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을 북한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가 세상을 Em고 나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북한에서도 집단농장에 유배되어 30년 가까운 세월을 갇혀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한다.
 얼마나 시를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자유을 그리워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온다.
불운한 천재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기 일쑤인데, 백석시인이 그 한 예다. 8.15 광복 후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남한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으며 풍성한 문학적 삶을 누렸겠는가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목이 메인다.
 백석시인이 아마도 8.15 광복 후,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니 고향을 희구해 서울생활을 청산한 것 같다. 잠시 신의주에 들렀다가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남기고 고향으로도 가지 않은 채 증발된 것으로 기록해 왔었는게 그의 인생행로의 전부이지 마지막이었으니까.

 우리가 지금 백석시인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민족은 하나인데 둘로 나눠진 비극이 천재시인을 더욱 불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역사의 정당한 댓가는 커녕 걸레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야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빛나는 문화인물 다름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침이슬처럼 허망하게 사라져간 목숨에 대한 애석함이다. 그 시대의 문화가 산 역사의 얼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역사는 외면했던 것이다.

 남한에서의 백석의 평가는 대단하다. 해방기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기도 하며 백석의 애인이었던 자야여사가 남긴 유산으로 해마다 ‘백석문학상’이 수여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백석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문학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다.
한 시대를 가장 불운하게 살다갔으며 우리 민족의 유랑정서를 문학작품으로 가장 잘 승화시켰다는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석을 몰라도 현대를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는 듯도 하니 말이다.

 소월과 같은 동향으로 소월의 후배로, 선배시인을 부러워 하며 시를 길을 걸어왔던 비운의 백석연보가 90년대에 들어와 새로 수정되었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는 북한 어느 집단농장에서 쓸쓸히 눈 감았던 것이다. 남한에서처럼 애도하는 그 누구도 없었으며 단지 홀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다가 몸을 놓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