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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쑥부쟁이같은 얼굴의 시인 서지월/문형렬

아미산월 2008. 8. 20. 02:48

[작품론]쑥부쟁이같은 얼굴의 시인 서지월/문형렬

 

서지월시인,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시집
   ㅡ『백도라지꽃의 노래』(『白桔梗花之歌』,료녕민족출판사 간행)

 

 

 

▲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인 '백도라지꽃의 노래'

 

 


<작품론>- - - - - - - - - - - - - - - - - - - -

쑥부쟁이같은 얼굴의 시인 서지월

文 亨 列
(시인, 소설가. 영남일보 논설위원)


  시인 서지월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사춘기 무렵부터 우리는 서로 알고 지냈다. 그때, 우리에게는 문학은 엄숙한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고, 또한 문학이 알 수 없는 고뇌와 객기로 얼룩진 청춘에 무슨 대단한 보상을 줄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 보상이란 지금 생각해 보면 적어도 행복하고 살고 싶다거나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싶어하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이었을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서지월의 모습과 그의 작품을 따라가 보면 그 보상의 구체적인 정체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뒤늦고 새삼스러운 기대감의 기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돈과 권력, 그리고 인맥과 학맥으로 뒤얽혀 있는 20세기와 21세기 한국의 자본주의 속에서 그는 내내 시인으로 살아왔고,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는 일을 유일한 생업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시인들이 많다.
  그러나 시 하나를 붙들고,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을 기르고, 가장으로서 자리를 유지하는 일은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내가 곁에서 지켜보기에, 씩씩하고 줄기차게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에 사실 놀라움과 존경심과, 그리고 한없이 애잔하고 적막한 동반자로서의 우애같은 것을 느끼곤 해 왔다. 그 마음을 나는 속으로 감추기 위해 그가 쓴 시를 가만히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으로 대신한 적이 많았다.

  어릴 때 하던 버릇
  커서도 하네
  아버지 어머니 다 밭일 가시고
  닭이나 보며 철모르게
  밥때 기다리며 집보던 것이
  아버지 먼저 세상 뜨시고 어머니
  냇가 빨래 가시고
  직장도 중단하고 딸린 妻子
  아직 없이, 이제는 전화통 옆에서
  집을 보네
  참으로 위대한 벼슬같은 詩도
  이렇게 돌아와 홀로 앉으면
  밥 빌고 허망한 몰골이 되네

  먼 山이마 진달래꽃 배 고프게 피고
  길가의 앉은뱅이도 눈물나는
  이 하루 봄날......

   ㅡ서지월, 시‘혼자 있는 봄날’全文


  이 시집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나는 내내 이 시, ‘혼자 있는 봄날’이 좋았다.
막막하고 적적한 봄날을 배고픈 세상살이에 비껴 이처럼 처연하게 노래한 시가 있을까.   시인은 어느 봄날의 기억속에 주저앉아 어릴 때 철모르고 밥때 기다리던 날짜와 조금도 다름없이 집을 본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냇가에 빨래하러 가신 것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그는 어린날 보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혼자 집을 보니 봄날의 진달래꽃마저 배 고프게 피고, 자신은 마치 길가의 앉은뱅이 같은 신세와 다름없다고 여긴다. 마치 춘궁기때, 허기진 배를 가만히 움켜잡고 소리내어 숫자를 헤아리며 배고픔을 견디던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옛모습을 그는 지금 흑백의 기억이 아닌 붉고 선명한 채색화로 다시 떠올려 낸다. 머리에 부스럼을 달고 얼굴에 마른 버짐이 숭숭난 아이들은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우리네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서지월 그 혼자만의 기억이 아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들어 있었다.
종종 이 시를 외우노라면 마치 소리없는 비명처럼 피었다 지는 진달래꽃들이 금방 입속에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배고팠던 청춘의 그늘들이 눈앞에 가득 펼쳐지곤 한다.
  그도 그랬을까.
‘참으로 위대한 벼슬같은 시’가 아무도 찾아줄 리 없는 어느 봄날 오후, 혹시 전화라도 올까 싶어 전화통 옆에 앉아 기다리며 쪼그려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겹쳐지면, 참으로 허망한 몰골이 되고 마는 것을.
  그러나 그 위대한 시가 비록 아무리 밥 빌고 허망한 몰골로 자신에게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믿었던 벼슬같은 시가 더 이상 굶주림과 형언할 길 없는 허기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통절히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뒤 그 그리운 밥과 허망한 몰골에 항의하기 위한 듯 수많은 시를 써내었을 것이다.
  두 가지 길 중에 그의 길이 어느 것인지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입버릇처럼 기필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아예 작심했다.
  내가 굳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맹세한 바도 없이 어쩌다 보니 사는 일에 대해 할 말이 많고 또한 한이 서려 글을 쓴 것과는 아주 달리, 그는 세상의 하고많은 직업 중에 굳이 직업이랄 것도 없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어쩌면 前生의 업보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흔히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서 뒤도 돌아보기 싫은 날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오직 시인이 되고자 했고, 시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의 많은 것들과 싸워왔다. 아마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시인으로서의 길을 사수하기 위해 전투적 몸매로 인생의 날짜들과 싸워오지 않았다면 여기 실려 있는 155편의 시도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습작기에는 소녀적 감성이 많은 시를 쓰다가 점차 김소월과 박재삼으로 옮겨가면서 서정주에 영향많은 듯 민족의 전통서정에 기댄 작품으로 시세계를 변모시켜 나갔다. 그의 시세계에서 결정적 변화는 여기 상당 수 실려 있는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옛고구려땅인 만주여행을 하면서 도저하고 깊은 외침으로 한민족의 역사의식과 민족적 정서 속으로 질주해 나가면서부터다.

  그리워라
  죄없는 자 어디로 가고
  희부연 눈발
  꽁꽁 언 가슴을 짓누르는구나
  불러도 오지 않는 江건너 간 풀무질의
  말발굽이여.

   ㅡ‘鴨綠江아 말하라’에서


  오늘도 강언덕 내달리던 말발굽 소리 들리건만
  해란강 너는 그늘진 시대의 수심같은 골짜기 타고내려
  사슴처럼 긴 육신으로 누웠구나

   ㅡ‘海蘭江은 흐른다’에서


  아아 내가 저 강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뜬눈의 밤 지새운 날들 저들은 알아
  자꾸만 뒤돌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구나

   ㅡ‘黑龍江 물소리’에서



  이들 시에서 보는 것처럼 시지월은 한국시사에서 제외되었던 만주 이민의 역사를 시의 세계로 끌어안아 과감하고 격정적인 시편을 보여준다. 분단 이후 한국역사에서 사라져버렸던 만주벌판의 애환과 독립군들의 말발굽 소리처럼 우렁차면서도 고독하게 나부끼던 소외된 역사속의 정서를 단순히 이국땅에서 말없이 스러져간 투사들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있지 않고 나아가 다시 오늘과 미래속에 역사적 의미와 그 회복의 노래를 부단히 부르고 있는 것이다.
  흑룡강이 시인에게 무어라 중얼거리며 전하지만, 비류수가 함께 가자고 애인처럼 곁에서 팔짱을 껴주지만, 그는‘우리가 우리땅을 찾아온 것도/ 남의 힘 빌어서 온 것뿐/ 무어라 말해도 저 山川草木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시‘하염없이 비 오는 장백폭포 아래서’)하고 응답한다.


  내 잠시 이곳에 와 누군가가 지어주고 간 이름의
  黑龍江을 부르며 걸어간들 누가 곁에 와서
  말 걸어줄 것인가
  내 어릴적 북쪽으로 머리 두고 자라왔던 것처럼
  그 머리맡의 강에 와 서성이며 내 아버지를 찾고 있네

   ㅡ‘목놓아 부르는 자의 노래’에서



  시인은 한민족의 역사 속을 가로지르는 흑룡강과 두만강, 압록강, 비류수의 이름 앞에, 그리고 그 강위를 나르는 기러기떼의 이름 앞에 자신은“아무 것도 준비해 온 것 없는 내게/ 시야 흐리우는 흰눈은 펑펑 내려!”( 시‘흑룡강 연가’) 라고 만주대륙을 가득 덮던 눈발이 바로 우리 역사 속에 여전히 내재해 있음을 드러낸다. 서정시의 소재와 영역을 공간적 측면에서 만주대륙으로 확대했을 뿐 아니라 시간적 측면에서도 한민족의 상처과 드높은 기상을 시적 영역으로 수용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의 세계라 하겠다.
  그가 일련의 만주시편에서 보이는 시적 성취와 탁월한 표현은 단순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그는 1986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을 받은 웅혼한 민족기상을 읊은 시‘朝鮮의 눈발’이후의 시편에서 역사성에 대한 시적 관심을 부단히 표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 가고 있다

  아침 床 받으면
  풋풋한 생채나물
  그 미각을 더불어
  어린 날의 서당골 물푸레 나무
  결 고운 길을 따라
  잠 덜 깬 포대기 속 아이의
  꿈결같이
  굴러 가고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예지의 나라
  純銀의 밀알들,
  그대는 아는가
  바다와 江이 놋요강처럼 놓이고
  陵은 풀잎처럼 잠든다

  문경새재에 눈이 내리면
  靑솔가지 꺾어들고 오는
  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 속을
  조심조심
  미끄러져 가고 있다

  아침 신문 유액 위
  朝鮮通史가 빛나고
  한 술의 배고픔보다 천 근의 무게로 울려 올
  우리의 풍악소리......
  몇 백년쯤의 뒷날을 다시 생각노니,

  지금 나는
  세계의 가장 평안한 牛車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 간다

   ㅡ‘朝鮮의 눈발’전문



  그가 신춘문예 출신은 아니지만,아마도 운이 안 닿았을 것이고 보면 그 당시 한국문단 3대 종합문예지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던 '신인작품상'에 당당하게 당선되어 선 보인 시로 역대 문예잡지로 나온 당선작 가운데 아만한 큰 울림의 시가 어디 또 있을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오오래 길들여진 나귀가 주막에 드는 밤
  호롱불처럼 쑥국새는 밤새 울었습니다
  천년 강물 허리에 두르신 어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아버지는 걸어서 타관백리의 산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조선낫처럼 有情해서
  물맛을 배맛으로 보고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ㅡ‘우리 朝鮮사람들은’에서


  동구밖 저녁하늘 가로 질러 전진하던
  그 갈가마귀떼의 군단
  북으로 북으로 날아간 우리의 꿈들,
  압록강 너머 만주땅 시베리아 어느 벌판에서
  추운 겨울 다 보내고 돌아올 줄 모르는가
  우리의 땅 고구려를 찾기 전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인가.

   ㅡ‘갈가마귀떼'에서



  그는 만주땅의 겨울 달빛 속에서‘고구려의 아기’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오늘의 자신이 “고구려 여인을 흠모하고 고구려 여인의 젖을 빨았다고, 백마타고 달리던 저 광막한 만주의 늠름한 고구려의 남자 그 피붙이”(시‘겨울 달빛’)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동강난 거울처럼 누가 그 사실을 알고 믿어줄는지, 이미 사라진 드높은 역사의 기운을 다시 복원하고자 희망처럼 역사의 새순을 두 손으로 힘껏 보듬으려 한다.
  초기의 배고픔과 서러움의 시편에서 이처럼 도저하고 빛나는 만주대륙의 역사적 서정성으로까지 시세계가 확대된 이면에는 그의 고달팠던 생활에의 여정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잠깐동안의 교편생활 이외에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돈 안되는 시만 붙들고 20년 남짓 늘어져 왔으니(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 보면) 내내 생활의 고뇌에 깊이 물들 수밖에 없었고, 이 고뇌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은, 차리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님’에 대한 간곡한 기다림의 시편으로 변주되었다.

  봄눈이 온다. 봄눈이
  온다. 미친 봄눈이 괴나리봇짐 싸들고
  실눈으로 온다. 와서는
  이 세상 어디 배불리 먹을 곳 있느냐며
  내 살던 고향의 산천을 뒤덮고
  복사꽃 가지 끝에 와서는 풀어내는
  거짓 향기

   ㅡ‘봄눈’에서


  진달래 필 때
  온다던 님 소식도
  아니 오고
  黃砂바람만 부네

  진달래 숨막히게
  피기 시작하여서
  지기 시작하면서
  내 청춘 4月은 다 가고 마는가.

  함초롬히 나부껴야 할
  저 수양버들과 찢기운
  버선발의 심장,
  온몸으로 덮는ㅡ

  온다던 님 아니 오고
  외론 해종일
  黃砂바람만 부네
  진달래만 지네.

   ㅡ‘黃砂바람’ 全文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休息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ㅡ‘江물과 빨랫줄’에서



  그는 “여름내 기다리던 사람 다시 오려나/ 텃밭의 고추가 꽃처럼 예쁘다/....잠자리떼 머리 위 빙빙 도는 것 보니/ 분명 올 것은 오리라는 기다림 속에/ 마음은 텃밭의 고추처럼 붉다”(시‘기다림’)고 올 것은 오리라고 다짐하지만, 그래도 괜히 빨갛게 타기만 하는 자신의 심정을 고추에다 책임을 전가하듯이 슬쩍 내비치기만 한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해도 기다리던 그 무엇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히려 목을 매다는 듯한 기다림 속에 햇빛이 비치고 학이 날아가고 가을 달이 지고, ”만리밖 찬 강물소리만 문지방 넘나들며 찰랑찰랑 옆구리에 와 닿기만“( 시‘베겟모의 금실 안에’) 한다는 것을.

  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새삼 그의 시를 읽어보니, 그의 지난했던 시적 이력과 삶의 흔적이 금방이라도 손끝에 와 닿는 것 같다. 정말 멋도 모르고 문학에 뛰어들었던 젊은 날들이 환하게, 마치 그가 외쳤던 만주벌판의 눈보라처럼 뿌옇게 일어난다. 나는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랜 친구임을 늘 즐겁게 생각해 왔고, 이 글을 쓰는 까닭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시인에게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는 그가 젊은 날 열망해 왔듯 드디어 시인이 되었고, 그 이후는 자신이 시인임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꽃이 자신의 피어 있는 시절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듯 그도 열심히 살아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본다. 문학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보상해 주었을까. 어떤 댓가를 그는 기대했을까. 대답은 그의 몫일 것이다. 다만 나는 늘 대해왔던 그의 얼굴이지만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 분명히 다가오는 것을 본다.

  우리가 먼 길 가는 바람 앞에서
  늘 배웅하는 자세로 흔들린다면
  흐르는 시냇물도 제 갈 길 따라 가겠지만
  가서는 오지 않는 이름들이 가슴에 남아
  밤이면 무수한 별들의 재잘거림으로 높이 떠서
  이마 위에서 빛날 일 아니겠는가

  심지어 때아닌 먹구름장 겹겹이 몰려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위협할 때도
  땅에 뿌리박고 사는 罪 하나로
  흠뻑 비맞고 놀라 번뇌의 세상 굳굳하게 견뎌낸다지만
  표석처럼 지키고 선 이 땅의 이름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먼 길 재촉하는 구름이나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귓전에 사무쳐 오지만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며 스스로의 잠언을 풀어내는
  몸짓 하나로 남아서
  모두가 떠나도 떠나지 않고
  푸른 손 휘져으며 여기 섰노라

   ㅡ‘ 쑥부쟁이의 노래 ’에서



  이처럼, 그는 우리 산하에 가을이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쑥부쟁이꽃 같다. 일제치하 젊디젊은 어느 독립군이 만주로 떠나는 길에 갓 혼인한 아내에게 쑥부쟁이를 한 송이 꺾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 꽃을 보거들랑 나를, 나를 그려다오”라고. 그 또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날들이 비록 인생의 전부라 해도 말이다.

 

 

  **문형렬/1955년 고령 출생. 영남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꿈에 보는 폭설> 당선.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물뿌리기>당선. 현재, 영남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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