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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6박 17일 일정의 끝

아미산월 2008. 8. 11. 00:10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42. 16박 17일 일정의 끝

 

42. 16박 17일 일정의 끝


 

◇선박 안에서


 

17박18일이라는 만주대장정 여정을 끝내는 마지막 밤이 되는 「동방명주호」에 오른 시각은 저녁 5시30분이었다. 이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려면 이튼날 낮이 된다.

처음 만주기행을 떠날 때에도 이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왔듯이 다시 이배를 타고서 서해를 건너 한국으로 가는 것이다. 이런말 있잖은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어쨌든, 무더운 여름, 보름 이상을 만주땅을 돌아다니며 보냈다는 건 필생의 업을 이룬 듯한 뿌듯한 기분이었다.

3층으로 이뤄진 큰 선박인 동방명주호에는 칸칸이 등급을 매긴 방이 수십칸씩 2,3층에 즐비해 있고 선물코너 휴게실 식당 등 편리하게 갖춰져 있었으며 심심하면 난간으로 나가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 '동방명주호' 선상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멀리 북한땅이 보인다.


 

원래 좀 피곤해도 여행객은 잠이 없지 않은가. 나는 만주로 떠날 때이곳 배안에서 한국인 청년 두 사람을 만나 알고지내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이배안에서 다시 그중의 한 청년을 또 만나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잠이 안와 휴게실의 푹신한 쇼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내 고등학교 동시생 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반가워하며 나를 끌어 투숙하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은 이선박의 VIP침실이었다. 침대가 두개 놓여있고 조명도 좋고 공간도 호텔의 실내 분위기 다름없었다.

알고보니 이 선박의 선장 증 마도로스가 같은 고등학교 동기생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 친구들은 잘 알고 지내온 사이란다. 승무원이 20여명 되는데 내 고교생동기생이 선장이고 그 반수는 중국인들로 한중합작으로 운영하는 선박이었다.

침실 중에서도 등급이 많았는데 2인1실의 고급 침대가 있는가 하면 11명, 15명씩 함께 취침하는 마루바닥같은 방도 있었으며 2인 1실, 3인 1실, 4인 1실 등으로 된 보통 침대나 마루바닥으로 된 방이 대부분이었다.


◀ 단동부두에서 배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


 

우리 일행은 중국으로 갈때는 3인 1실을 돌아올때는 4인 1실로 잘못 배정되어 다시 편성을 요청해 우리 일행이 함께 쓰는 방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갑자기 중국 흑룡강성 노동자 300여명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방들이 만원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인천항 도착까지


 

배안에서 아침이 왔다. 역시 각 객실마다 울려퍼지는 스피커소리는 아침식사를 알리는 거였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가 식사시간인데, 그때를 놓치면 그만이다. 식사메뉴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한 것이어서 부탁없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짐을 다시 챙겨놓고 한두시간이 지나면 배가 인천항 부두에 도착하게 된다. 다시 한국땅 밟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언제 다시 중국 만주땅 밟아볼지…. 이런 생각과 함께 교차되는 심정이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큰 일을 해내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예술인으로써 한국문인 그것도 한국시인으로써 누가 오천년 역사의 시원의 무대가 된 만주땅을 16박17일이라는 긴 시간으로 돌아보았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한 일이었다.


◀ '동방명주호' 선박휴게실에서 만주기행을 다녀온 일행들.박월리 서지월 정이랑 이채운 이상월.


 

한국으로 돌아거서 글을 써내는 임무가 더 큰 노동이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역사의 땅을 되짚어 본다는 것, 그게 진정한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말한 이 선박의 선장인 고교동기생도 만나고 여간 반갑지 않았다. 배가 인천항에 정박한 후에야 선장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선장은 배가 이동중인 가운데는 바쁘다는 것이다. 모든걸 총괄해야 된다고 한다.

300여명, 아마 400여명이 될까, 배안에서 부두에 내리는 데도 한시간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러니까 낮12시에 인천항 부두에 도착했는데 배에서 내리니까 오후 한시가 좀 넘은 듯 했다. 게다가 통과해 나오는데 또한 북세통을 이뤘다. 그 많은 인파가 빠져나오는 시간 역시 숨가빴던 것이다.


 

◇여남은 생각들


 

부두에 내린 우리 일행은 시외버스터미날로 가 대구.부산으로 가는 표를 예매해 놓으니 두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식사를 했다. 그리고 대구로 오는데는 벌써 저녁,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집에 오니 짐꾸러기 속에 많은 것들, 우리 오천년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온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비원」에 갔었을때 T셔츠가 그러했다. 가슴에 피리부는 선녀그림과 해와 달을 머리에인 남녀 한쌍이 그려져 있는 건 바로 고구려인의 정신이었다. 그 고구려인이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구뿐이랴 그곳 언론잡지사에서 얻어온 신문과 책속에는 우리와 한 피인 조선족들의 정서가 배어있음을 물론이거니와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다시 아련거렸다.


◀ 압록강 선상유람선위에서, 서지월 박월리 조정호 정이랑 시인.


 

이루다 말 할 수 없고, 다 표현할 수 없는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가봐야 알지 말한다고 듣는다고 어찌 다 실감할 수 있겠는가.

백두산도 백두산이지만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까지 두루 섭렵했으니 이것만 해도 살아 꿈틀거리는 실재였다.

백두산 천지가 전나의 모습을 보여줄 듯 보여줄 듯 하다가 끝내 안개로 덮어버리는 아쉬웠던 그 순간은 날씬한 몸매의 향기나는 여인이 속옷을 다 벗을듯 벗을 듯 하다가 끝내 벗지 않은, 보는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한 그런 형상들, 이헌 거였다.

내 사랑하는 여인의 전나는 보았어도 백두산천지의 전나는 끝내 못 보고서 하산해야했던 심정을 헤아려 보면, 백두산 천지 역시 내 모습을 수면위에 다 비추지 못햇으니 그도 안타까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그럼없이 서로를 다 보여줘야 하는게 단연하다기 보다 순리인데 천지와 나, 나와 천지는 그러하지 못했으니까.


인간으로 태어나

옛날에 살지 못하고

지금에 살다보니

어울리지 못한 아쉬움도 커

뒷그림자 밟듯 찾아서

가 본 만주땅,

지금도 그곳에는 옛날이

벽화로 비석으로 강물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나니

나는 내 땅의 역사에

무엇을 남겨 뒷날의 사람에게

전해줄까 뒷날의 사람들이

찾아와 살아 꿈틀거리는 걸

보여줄까




이런 마지막 시한수 남기면서, 다음의 만주땅을 기약하며 이글을 맺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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