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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단동항의 풍경들

아미산월 2008. 8. 11. 00:08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41. 단동항의 풍경들

 

41. 단동항의 풍경들


 

◇단동시장을 가다


 

우리 일행은 내리는 빗속을 헤치며 단동의 시가지를 누볐다. 내일이면 이곳 단동 그러니까 중국땅을 완전히 벗어나야 하니까.

시장에 중국그림을 사러 갔는데 그곳 백화점 2층에는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북한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 단동 여객 터미널 <단동항 객운점>전경.


 

그 북한 그림들은 대부분이 한복입은 북한 여인도들이었다. 남녀의 사랑을 의미하는 성춘향과 이도령의 랑데뷰 그림도 눈에 띄였다.

다시 어느 시장 골목을 물어물어 가 보았다. 그곳 1층 상가에는 열댓 군데가 옛그림을 팔고 있었는데 저녁시간이 되어 거의 다 문을 닫았고 한두 군데가 열려있어 마음에 드는 중구 고서화를 하나씩 샀다. 우리 돈으로 일만원 이만원이니 큰 부담이 되지 않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그림은 중국의 옛 선비들이 음풍영월하는 그런 그림이나 미인화들이었다. 그걸 하나 사서 집에 가지고 와 걸어놓았을 때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그 운치가 더없이 좋을테니까.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간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소개 받아 갔는 곳은 단동시장이었다. 참깨 들깨 옥수수 가루 등이 굉장히 값싸기에 한봉지씩 샀다. 기름의 경우도 보면 한 통에 일만원이천원 정도 되니까 우리의 참기름 한병값이 이곳에서는 10병정도 되는 셈이다.

어쨋든 우리 한국보다 시장경제가 낙후된 곳에서의 장보기란 우리의 과거 시대를 보는 듯한 정감이 있어 좋았다.

◇단동항을 향하여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그 이튿날이 돼어서야 멈췄다. 단동항에서 오후 5시 30분 배를 타면 그 이튿날 12시에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 적어도 오후 3시까지는 단동항에 들어가야 하며 사전 수속도 밟아야 하기에 낮 12시 까지는 단동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 신의주 하류 압록강에서 바라본 단동 시가지 풍경.


 

오전에 10시 30분 경 소설가 조정호씨와 역시 소설가인 이군씨가 강빈호텔 숙소로 찾아왔다. 앞서 내가 안 만나고 그냥 떠나오기에는 너무 섭섭해 아침에 간신히 연락이 다은 조옥자씨도 와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중국만주대장정 첫코스인 단동에 도착했을때 그날 밤 나하고 블루스를 추었던 조선족 여인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짐에 짐을 또 더하게 되었는데 그건 조정호씨가 가져온 평양소주 한 박스였다. 그러니까 북한소주인데 이곳에서는 많이 선호되고 있는 평양소주인 것이다. 크고 작은 크기의 평양소주 한 박스가 짐을 더욱 보태게 되었지만 귀중한 것이었다.

조정호씨와 이 군씨와는 먼저 작별을 하고 강빈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기까지는 조옥자씨가 있어 주었다. 중국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택시를 잡아서 요금을 흥정하는데도 어려움이 늘 따랐기 때문이다.

압록강가 강빈호텔 앞에서 두 대의 택시를 잡아타고 우리 일행은 이번 모든 만주기행을 청산한 듯 단동항국제 공항터미널로 향했다. 조옥자씨하고는 작별을 다시 고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는 심정인 것이다.

역시 단동터미널에는 상인들로 시끌벅적했다.한국에서 이곳으로 올 때도 그러했지만 95%가 여행객이 아닌 상인들이 인천과 단동을 오가며 개인무역을 하는 무역상들이었다.

알고 보면 1주일에 두번씩 이들이 오가며 한국에서는 청바지 화장품 비누 등 일상용품을 공급하고 그곳에서는 참깨 옥수수 콩 등의 곡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 압록강산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 강변 풍경.


 

한 사람당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게 한 짐씩인데 그걸 여섯짐씩 들이고 나가니 번잡할 수밖에 이런 풍경을 보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단동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에 특이한 풍경은 300명쯤 되어 보이는 중국 만주땅 흑룡강성에서 노동자들이 일제히 검은 흑룡강성이라는 글씨를 써 넣은 흰 티셔츠를 입고 줄을 길게 지어 단동터미널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단동항 이동버스안에서도 그들과 함께 타고 내렸는데 대부분이 장년 남자들이었으며 아주머니들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는 꽃다운 처녀 총각도 끼어 있었다. 300여명이나 되는 그들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었다.

만주땅 시골에서의 찌든 삶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에 노동자로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에 한국에 돈 벌러 오기까지 수속비 및 여비를 오백만원씩(중국돈) 빌려 왔다는 딱한 사정도 털어 놓았다. 한국에서 취직해 1년 벌어 빚값고 2년 벌어 생활비하고 나머지 3년을 벌어가면 그곳에서는 아주 큰 돈이 된다는 그들대로의 계산이다.

우리나라 과거 60~70년대의 실정이 그러했듯이 주로 젊은 처녀 총각들 보니까 안스런 생각도 들었다.


◀ 단동시내 가요방에서. 왼쪽부터 이상월씨 조선문인 조옥자.리원삼.백운숙씨 그리고 노래부르는 서지월 시인.

 

장년의 남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가지고 온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은 것을 손에서 떼지 않고 들고 있었는데 물어보니 술통이었다. 술을 잘 못 먹는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왜냐하면 생수물통이나 간장통으로 쓰는 반말내지는 한말들이 플라스틱 흰 통에 술을 그것도 중국에서 먹는 아주 독한 높은 도수의 술이라는 거였다.

날씨도 덥고 또 가야 할 길이 멀고 하니 그 뚜껑을 열고 안주없이 심심찮이 그대로 통을 들어 마시기도 했으니 진짜 술꾼이었다.

그러기에 통과절차를 밟아 단동 터미널을 빠져 나와 단동항에 도착해 「동방명주호」선상에 올랐을때 인파는 그들로 가득 채워 있있다.

안 그래도 한국인 상인들로 가득한 이 배안에 중국 흥룡강성 노동자들이 300여명 승선하니까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은 우리 일행이 바로 며칠 전만해도 이곳 머나먼 만주땅 흑룡강성을 최북단으로 겨쳐오지 않았던가 하는 거였다.

연길에서 목단강시 하얼삔을 거쳐온 게 중국 만주 땅 동북삼성 가운데 하나인 흑룡강성이니까. 그 벌판뿐인 시골을 연상해 보면 쌀 곡식 농사보다 잡곡식이 대부분인 그곳 농촌 현실을 알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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