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심양고궁' 이야기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8. '심양고궁' 이야기
38. '심양고궁' 이야기
◇고궁에 와서
만주족 청나라의 고궁은 두번째로 옮긴 북경의 것보다 규모는 작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역사의 한면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보면 그 찬란함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보배가 아닐 수 없다. 늘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규모부터가 클 뿐만아니라 기둥 단청처마 용마루 할 것 없이 채색의 섬세함과 우아미는 그대로 지은 양식이 아니었다. 목조건물로 이뤄진 이것들이 궁중옷에서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현란함과 더욱 눈에 띈다.
우리 일행이 요녕신문 문화부 차경순 기자와 함께 돌아본 고궁은 북경고궁 보다 그 규모가 작다고는 하나 우리가 보기엔 이만해도 어마어마한 궁이었다. 각각 한채씩 수십채가 되는 황제궁 빈국 등이 눈에 띄었으며 특히 황제와 각 장군들의 거처지가 지어져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각 빈궁들의 처소도 한 채씩 마련되어 있었는데 비단이 드리워져 있는 처소의 침실은 침대식이었으며 화려한 색상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쪽 칸에는 세수하는 그릇 밥짓는 도구같은 것들이 옛모습 그대로였다. 앞서 밝힌대로 문살하나 기둥하나에도 무늬와 색채를 달리해서 그냥 된 것이 없었다. 물론 천정에도 화려한 문양과 등이 수실을 짜서 드리운 운치가 더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관광객을 맞기 위해 한 채의 처소 앞마다 궁중복을 차려입은 중국 아가씨들이 버티어 서 있었는데 안내원이라기 보다 누가 손댈까봐 주시하는 보초원 같았다. 처소안 사진 찍는게 절대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용감하게 찍곤 했다. 왜냐하면 말은 안 통하지만 찍고 나서 마안하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 어딜가나 그 용감성 발휘에 익숙했으니까 나는 그런걸 놓치기 싫었고 또 놓칠 수 없는 성미에서였다. 예를 들자면 이번 만주기행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로 최고로 이름난 집안의 5호군 4호묘 휘황찬란한 벽화를 비디오로 찍었으며 광개토대왕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기서 하나 밝혀둘 것은 고구려 첫 도읍지인 환인의 오녀산성인데 오녀산성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고 비디오로 생생한 촬영기록을 한 사람은 한국인으로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가 최인호씨가 다녀온 「왕도의 비밀」에서의 오녀 산성도 보면 공안국에 걸려 압수당해 다큐멘터리서는 대신 사진으로 보여주었으며 2000년 1월에 4부작으로 방영한 「대고구려」편에서도 오녀산성의 소개가 나오는데 역시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늘 내 인생주관을 집념으로 살며 이런 여행이나 업에 있어서는 센스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되내여 왔던 것이다. 이런게 맞아 떨어졌는지 나는 어딜가나 무엇을 보거나 미리 대비에서 가능한한 놓치지 않으려고 있던 흔적들이 많다. 뿐만아니라 고궁에는 어마어마한 단장과 건물들이 우람하게 날아갈듯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날씨는 무더웠다. 고궁을 빠져 나왔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사는 늘 현재에 존재한다는 사실, 과거는 인명과 함께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말없는 유물 유적들, 그것이 오늘은 반추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다물어 버렸다는 사실에 숙연해질 따름이다.
◇「만주」라는 이름
중국 동북삼성, 즉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 그 삼성을 말함인데 이곳 심양은 요녕시의 성도이다. 심양 동쪽에 「심빈현」이라는 곳에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났고 이곳 심양에 바로 후금을 세웠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그의 넷째 아들 황태극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1635년에 여진 각 부의 칭호를 폐지하고 「만주(滿洲)」라 하였다 한다. 그 다음해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으며 9년 뒤 5월 황태극의 아홉번째 아들 복림이 청조의 3대 황제, 즉 청세조가 되면서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심양고궁」은 북경의 자금성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작지만 그래도 중국에서는 두번째로 큰 궁으로 꼽히고 있다. 면적은 6만평방미터이며 건물이 70채, 방은 300여칸이나 된다. 또 이 고궁은 만주족.한족.몽골족의 특색이 혼합되어 있고 만주족들의 생활양식이 반영되어 지어졌다 한다. 그러니까 청태조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황태극의 황궁이다. 우리가 부르는 「만주」라는 이름이 불리워져 오고 있는 것이 청나라 초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고궁을 나오며
고궁을 빠져나오며 우리가 가야 할곳은 처음 만주땅을 밟았을때 첫 도시인 단동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오후 4시 6분 심양발 열차에 몸을 실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다시금 느낀 일이지만 고궁을 나와서 걷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참으로 흐뭇한건 역시 번잡한 도로였지만 질서정연한 도로 양 옆의 상가건물들 모두가 고궁과 같은 옛건물로 즐비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줄지어 길게 뻗친 건물들이 멋진 단청빛으로 채색되어 옛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게 맘에 들었다.
자칫하면 옛모습을 헐어버리거나 언제 있었냐는 듯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도심개발이 심한데 전쳐 그렇지 않다는데 공감이 컸다. 간판하나 하나도 현대식이라기 보다 그들 특유의 글씨와 채색으로 잘 꾸며진 옛스러움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것도 배워야 할 점으로 느껴졌으니까 하는 말이다. 비닐수지나 아크릴 같은 것으로 만들어 붙이는 현대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풍스런 그대로였음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홍등을 하늘높이 줄지어 달아놓고 있어 도로의 운치는 더욱 고풍스러워서 좋았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분명히 이런것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번듯한 건물만이 아니라 주변 풍경을 옛그대로 재현해 놓음도 그 나라의 민족정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계속> |
TOP Copyright ©2000,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