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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아미산월 2008. 8. 11. 00:02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7.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37.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심양이라는 곳


 

심양은 어떤 곳인가. 우리 한국인들에게 민주땅이라면 대명사처럼 들먹이던 곳이 심양이다. 바로 <만주 봉천>이 심양이다. 봉천하면 또 개장수라는 말을 많이 해 왔고 보면, 우리 아버지대나 아버지의 아버지대에 유행하던 말인 만큼 한국인의 발자국이 깊이 찍힌 곳이다.

흔히, 남자들끼리 대화하다 보면 『아, 그때 나는 만주 봉천에서 개장수했지』 이렇게 우스게소리를 내뱉고하여 웃음판을 만들어내곤 했던 귀에 익은 말이 봉천이다.

이런 우리 선대들이 많이 와서 정착했던 봉천의 지금 이름인 심양에 나는 와 있는 것이다.

만주땅 어느 도시에서나 아직 금증가한 차량을 별로 볼 수 없었는데, 연길로 하얼삔 심양에 와서 보니 번잡한 도시답게 시가지는 시끌벅적했다.


◀'고궁'에 들어서는 문, 홍등이 인상적으로 눈에 뛴다.


 

◇요녕신문 기자를 만나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서탑사거리에 있는 어느 2층 다방으로 올라가 료녕신문사의 차경순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없이 만주땅을 거의 한바퀴 돌아버린 우리에겐 늘 가는데마다 같은 혈통인 조선족 문인이나 언론 잡지사 사람들과 연계해 신세지고 안내받고 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요녕신문사 그곳에는 순한국어로 제작되는 「요녕조선문보」가 격일간으로 발행되고 있는데 나의 경우, 이곳 만주땅에는 처음으로 발을 딛게 되었지만 「요녕신문」 「해란강은 흐른다」 「두만강 돌맹이」 「추석달빛」등 5편의 시가 이미 발표되기도 한 인연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약속된 장소에는 서로가 첫 대면인 차경순기자가 나왔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고맙기 이를데 없었다. 일부러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위해 나와 준 것이다. 내가 과거부터 만나보고 싶었던 시인인 임금산씨가 이곳 요녕신문사에 있는데 고급 편집인이라서 바빠서 못나오고 대신 차경순기자가 나왔다는 그 말만 들어도 참으로 고마웠다.

차경순기자가 이끄는 대로 찾아간 곳은 고궁이었다. 여기에서 고궁이라 함은 만주족 청나라 수도를 일컫는데 청나라가 첫도읍을 정한 곳이 이곳 심양인 것이다. 장춘이 일본 만주제국의 수도였다면 그 이전 중국 청나라때 수도가 심양으로 청나라 초기 역사문화 유적 등 볼거리가 만만찮은 곳이다.


◀만주족 청나라 수도 심양의 '고궁'입구에서, 정이랑 이채운 차경순 서지월 이별리 이상월씨.


 

특히 영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청나라 마지막 비운의 역사가 서린 곳이 장춘이듯 청나라 건국수도로서 심양의 고궁은 추기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궁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30분이었는데, 나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했다. 한국의 고궁과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그 규모나 색채 섬세함들이 눈을 뒤집히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들어서는 입구부터 시가지처럼 즐비해 있는 청나라시대의 건물들이 양쪽에 그 화려함과 위엄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우선, 참으로 의아한 것은 청나라가 망한지도 수백년.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도심은 현대문명의 물결로 옛모습은 파괴되고 현대식 건물이나 차량 인파로 즐비해 망가져 버리기 일쑤인데 이곳 고궁을 들어가는 시가지는 옛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건물들로 즐비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관리되고 옛모습을 잘 살리고 있는지 신기했다. 물론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차량행렬 인파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으나, 그 건물들은 옛모습을 그대로 채색하고 있었으니까 실로 눈부신 광경이 아닐수 없었다.

역시, 들어서는 입구마저도 고궁답게 섬세한 단청의 빛깔 조각상들이 날아갈듯한 기와와 추녀 두리기둥과 함께 과거시대가 그대로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건 탄식이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족 청나라

천나라는 중국 마지막 왕조로써 그 첫 도읍지가 심양이다. 우리가 말하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것이다. 배운 것 중에 하나가 만주족 이야기 였다. 그 넓은 만주땅 어딜가나 만주족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주족 같이 불운한 민족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 만주땅 곳곳에 가면 만주족 집단 거주지역인 만주족자치현이 많은데 그들은 동족끼리 한곳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뿐 언어와 분화를 모두 잃어버리고서 완전 중화(中化)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고궁'입구의 시계탑이 인상적이다.


 

특히, 만주족은 한때 중국전역을 다스린 대왕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상실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즉 만주족은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그 언어라는 게 통치당시에도 한족의 언어를 빌려쓸뿐 한족들에 의해 완전먹혀 들어간 꼴이 되어버렸다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에 비해 아무리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도 우리 조선족의 경우는 조선족이 가지고 있어 조선어(한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문화를 보전하고 창출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볼때 한나라 한 민족의 언어라는 게 역사적 관점에서 볼때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하는가 하는 긍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연길에 가면 연변일보 하얼삔에 가면 흑용강 신문 이곳 심양에는 요녕신문 이것들만 봐도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 우리말로 된 신문을 발간하며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가.

만주족의 경우는 과거에 강대국을 건설한 통치권자들이었지만 지금은 나라를 잃어버린 나머지 그들이 보전해야할 언어문화권 마저도 없이 되어버려 한족의 언어문화권 속에서 그저 만주족이 있었노라는 것뿐, 언어표현 수단이 없으니까 민족성을 고취시켜주는 아무수단도 없이 되어버렸다는 불행한 경우라는 것이다.


◀'고궁'의 거리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선 필자.


 

우리 안의 돼지처럼 집단으로 먹고사는 것뿐인것과 무엇이 다르랴. 중국 56개 소수만족 가운데 한때 중국을 제패한 왕국으로 찬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으로 완전히 밀려나버린 꼴이 돼버린 것이다.

우리 조선족들이 중국땅에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비록 중국문화권 속에서 중국어로 통용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고유언어를 가지고 있기에 이 언어문화권이 한 민족을 대대로 지탱해 주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언어나 말의 소통이 없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안의 돼지와 다름없다는 비유가 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고궁을 찾아


 

그래도 만주족 그들이 남겨놓은 심양고궁은 청나라 첫 도읍으로서 찬란했던 한 왕국을 보여주는데 충분했다.

들으라는 말인 즉, 청나라가 북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것 그곳보다는 덜 웅장하고 규모가 다소 작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왕궁의 진면목을 보는데는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 고궁을 나는 지금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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