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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고구려 최북단 산성에서
아미산월
2008. 8. 10. 23:59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35.고구려 최북단 산성에서
35.고구려 최북단 산성에서 ◇「용담산성」에 올라 아라디마을을 뒤로하고 먼지나는 길을 빠져나왔을 때 늦여름이라 날씨는 무더웠다. 고일신선생과 함께 길림시로 돌아온 일행이 곧바로 올라야 할 곳은 「용담산성」이었다. 일명 「고구려산성」이라 하기도 하고 「부여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용담산의 「용담산성」은 여기서부터 고구려땅의 시작이라는데 의미가 깊다 하겠다. ![]()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이 26세때 어버이의 어버이의 땅인 이곳까지 영역을 넓힌 고구려 땅 그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일찌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과 알에서 깨어난 주몽이 유배되어 살던 곳이며 유화부인의 뼈가 묻혔으며 고주봉이 22세까지 뼈가 굵어진 땅이니 광개토대왕은 길림땅인 이곳까지 만주땅을 차지한 것이다. 공원화되어 있는 산길을 오르는 안내판에는 중국에서도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지 광개토대왕이 쌓은 토성이라는 자세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우리 일행이 한국에서 그것도 남녁지방인 대구에서 이 머나먼 북쪽 땅까지 찾아왔지만 우리 선대의 역사기록을 보니까 마음이 푸근했다. 이게 한 핏줄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용담산성」에 올랐을 때는 해는 중천을 지나 서녁을 향하고 있었는데 희한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송화강이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이곳 길림땅을 지나고 하얼삔으로 통과해 흑룡강과 합해져서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만주땅 중앙을 가로지르는 유래깊은 강이다. 옛 문헌에서 빠지지 않는 「엄리대수」가 송화강이니 역사는 흐르고 변해 인걸은 가고 없어도 강은 남아 그대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목숨과 무한한 자연을 비교해 보면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저 송화강 즉 「엄리대수」는 주몽이 살았던 시대의 강으로도 유명하다. ![]()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송화강 이쪽에 동그란 산이 하나 앉아 있는데 직접 가서 올라보지는 못하는 형편이 되었지만 그게 바로「동단산성」 즉 주몽이 살았던 곳이라니 더욱 마음 설레었다. 아. 동명성왕이라 일컫는 고주몽이 우리같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 「동단산성」 아래라니.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안타까웠던 건 2000년이 지난 지금 중국땅이 되었지만 도심화가 극심하여 대낮 같은데도 먼지와 매연으로 뒤덮여 부옇게 보이는 것이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은 모두 빽빽한 현대식 건물과 공장들이 즐비해 연기를 하염없이 내뿜고 있었다. 이는 우리 한국의 사정과 다름없었다. 안타까운건 바로 옛것이 잊혀져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깡끄리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있다. 옛것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지만 현대생활의 편리를 위해 옛것이 풍화되어 나중에 가서는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다면 이는 실로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용담산성을 돌아서 내려오는데 마음은 안타깝고 착찹했다. 우리의 땅이 아니니 어쩔 수 없고 나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으니 그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같이 느껴졌다. 용담산성 둘레에는 아직도 고구려가 이곳까지 정벌한 그 당시 흔적들이 군데군데 그대로 남아 잘 보존되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옛 고구려 흔적들 산성을 내려오는데 큰 우물같이 깊이 패인 원형의 터가 있었다. 「한뢰」 즉 돌로 정교하게 쌓은 이 시설의 이름은 물이 없는 마른 연못이라는 뜻인데 그와는 달리 당시 군수물자와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라 전한다. 다시 내려온 길에서 바로 오르면 눈 앞에 나타나는 사찰이 「용봉사」인데 중국불교를 말해주는듯했다. ![]() 물론 대웅전 안에는 우리 한국과 같이 금빛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지만 오르는 입구에는 은빛으로 칠한 부처님을 대형유리관으로 모셔놓고 있는게 이색적이었다. 바로 이 「용봉사」 너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보이는게 또다른 고구려시대의 흔적인 「음마지」가 눈에 띈다. 용담산성에서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음마지」라는 커다란 저수지인데 지금부터 1600년전 광개토대왕이 군사와 말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지금도 있다.「음마지」를 지나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 뒤에 있는 산책로였다. 일정이 바쁜 우리 일행은 그만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언제 다시 한번 찾아올지는 기약에도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아득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어쨌든 내땅, 우리의 땅이 아니라 남의 땅을 밟는 것, 거기다가 머나먼 타국이니 생전에 다시 찾아올지 마저도 생각못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돌아오는 길 땀흘리며 소설가 고신일 선생과 함께 다시 택시에 몸을 실어 시가지인 도라지 잡지사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무렵이 다 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운 건 감기몸살 증세가 아주 심했던 것이다. 며칠전 목단강시호텔에서 춥게 잔 것이 꼬리물고 오더니 이곳 용담산성에서 나는 곤혹을 치렀으며 그게 내 컨디션을 좋지 않게 하고 있었다. 여기서 긴 만주여행에서 감기몸살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번 나열해 보고자 한다. 독자여러분께서는 잘 들어두었다가 긴 만주여행을 할 때가 오거든 꼭 조심하기 바란다. 아시다시피 여행이란 여유나 놀이가 사실은 아니쟎은가. 일정따라 숨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행위이다 보니 감기몸살이 오는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연길에 가서 2,3일 있을 때는 젊은 친구 이상월씨가 감기몸살이 심하게 걸려 애를 먹었는데 밤새도록 진땀 뻘뻘 흘리는 걸 곁의 침대에서 직접 본 경우니까 그 고통을 읽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머뭇거릴 수도 없어 움직이고 움직이고 하다 보니 그 힘에 나아버린 경우인데 그쯤인 목단강시에서 밤에 잠을 잘못 자서 내가 감기몸살 걸리는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더 이상 다른 일행들에겐 피해가 없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길림을 지나 심양에서 다시 단동에 이르는데서 정이랑씨가 감기몸살 또 걸려 헤매게 되었으니 그 고통도 내가 잘 알게 된 것이다. 나의 경우 하얼삔에서 약국을 찾아 들어가 약을 사가지고 복용하고 했지만 쉬 듣지 않았으며 만주땅이 신약이라는게 아직 우리 한국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걸 들어서도 알았지만 사실 그러했었다. 그러니 여러가지 상비약을 한국에서 철저히 준비해서 대비하는게 상책이라는 말이다. 앞으로 길림에서 저녁 열차를 타고서 심양으로 10시간 정도 밤을 가로지르며 가게 되는데 열차에 오르자마자 모든 낭만을 포기하고 감기약 복용한 채 아침에 열차가 심양에 도착할때까지 침대칸 3층에서 이불 덮어쓰고 끙끙 앓고 땀 뻘뻘 흘리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나였으니까. 도라지잡지사로 돌아온 일행은 잠시 쉬었다가 저녁식사를 고신일 선생과 김홍란씨와 함께 하게 되었지만 이 건물 지하에 노래방홀과 식당이 겸비되어 있는 곳인데 비좁은 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좀 음침해보이기도 했지만 식사나 술꾼들이 홀에서 춤추거나 노래 부르다가 이곳 골방같은데 단란하게 들어앉는 곳으로 보여졌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한국에서 왔다고 도라지잡지사에서 고신일 선생이 환대해 베푸는 만찬이었다. 만주땅 어딜가나 그렇지만 푸짐한 식사메뉴는 마찬가지였다. 과분하다고 할까, 식사를 끝내고 다시 도라지잡지사로 돌아왔을 때 저녁 기차시간이 남아서 담소 나누는 시간이 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길뻔 했던게 두고두고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으니.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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