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월
2008. 8. 10. 23:51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8.송화강을 가다
28.송화강을 가다
◇송화강의 정서
시인 한춘선생과 그리고 흑룡강신문사 문화부기자인 전영매씨와 함께 먼저 찾아간 곳은 송화강이었다.
그 송화강을 끼고 있는 유원지가 하얼삔의 시민공원으로 알려진 이름하여 「스탈린 공원」이었다.
◀송화강변의 '스탈린공원'의 기념탑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밀본의 만주제국때는 중국과 러시아세력이 깊이 파고들어온 그 근거지로 하얼삔은 러시아풍의 건물과 러시아 냄새들이 아직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국제적인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이 「스탈린 공원」을 끼고 흐르는 강이 송화강인데 송화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숨결이 배인 강으로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는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인 신의주로 해서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 압록강이며, 동쪽으로 흘러가 동해와 만나는 강이 두만강이다.
세 강줄기 가운데 하나가 송화강으로 넓디넓은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흑룡강을 만나 동해로 흘러드는 기나긴 강이다.
그러니까 송화강은 길림에도 있고 이곳 하얼삔에도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북으로 뻗쳐 길림을 지나고 하얼삔을 만나 흑룡강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일찍이 민족시인인 파인 김동환은 「송화강 뱃노래」라는 시에서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 보며는 고국이 천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온 길이 천리나/ 갈 길은 만리다.//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강물만 우드냐/ 장부도 따라 운다.」
이렇게 읊고 있다.
즉, 그냥 송화강에 배 띄워놓고 즐기는 풍류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는 들끓는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무어냐 하면 정든 고국을 떠나온 마음의 편린들이 물결처럼 파문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정서라 할 수 있는 서러운 운명을 송화강에 용해시켜 봐도 달랠 길 없는 장부의 회한이 전편에 깔려 있다.
그만큼 그늘진 민족적 운명을 안고 시인은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다.
고국을 떠나온 시인의 마음, 부모와 처자식 정든 고향을 떠나와 유랑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이 우리 민족의 운명으로 겹쳐 일어난다.
위대한 시인은 한 시대를 그냥 음풍영월하며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못하는 아픈 심정을 민족정서로 담아내며 한 땀 한 땀 딛고 지나가는 것이다.
말이 뱃노래이지 편치않는, 달랠 길 없는 심경이 드러나 보이는 암울했던 한 시대를 떠올려 준다.
◇송화강의 풍경들
송화강 부두가에 도착하니 유람선들이 즐비해 있었다.
우리 한국에서 가 보는 유원지의 유람선과는 늘 비교되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 그냥 비닐로 햇빛가리게 하는 유람선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 같았으니까 말이다.
◀송화강 모래섬에서 이별리 전영매 이채운 한춘 서지월 이상월 정이랑시인과 함께
용의 얼굴을 한 것도 있고 봉황의 얼굴을 한 것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유람선이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니까 특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진짜 용의 모습같다거나 봉황의 모습같았다.
현혹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고전미를 그대로 잘 살린 유람선들이라는 말인데, 한춘선생과 우리 일행은 우선 그 봉황의 모습을 한 유람선을 타고 송화강을 오르내렸는데 정말 큰 강폭과 끝없이 이어진 거대한 강이었다.
단지, 이곳에서도 아파트가 세워지고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서 강 저쪽에는 그런 빌딩의 군상들이 어울리지느 않았다.
이런 곳이라 해서 다를 바는 없겠지만 도시문명이 날로 밀려들고 있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송화강도 많이 오염되어 버렸다고 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우리의 땅이 아니지만, 어쨌든 오천년 우리 민족의 숨결이 배어온 역사의 강임엔 분명한데 이제는 어딜가나 물질문명에 못 이긴 나머지 「오염」이라는 단어가 기생충처럼 번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즐긴 뱃놀이는 그저 유람선을 한번 타 보았다는 것뿐 별 의미는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송화강 한가운데 모래로 퇴적된 섬까지는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되어있는데, 온겸에 그곳까지 걸어 들어가 보았다.
해질무렵인데 희한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나무다리를 놓아서 건너가게 되어있는데 강물위에 조그만 판자집들이 줄지어 떠 있었다.
신기해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는데 한춘선생은 수상여관이라 한다.
◀송화강에 떠있는 러브하우스들
즉 물위에 지어놓은 여관인 셈인데 숙소로 운영하는 여관이 아니라 연인들이 낮이나 오후에 잠시 들르는 그런 유락시설물이었다.
러브하우스라 해야 좋을 것 같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의아하게 느껴졌다.
개방화 물결이나 자유화바람이라는게 자본주의 국가에만 있는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미처 해보지 못한 탓인지, 일단은 멋있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이란 자신의 취향대로 연애를 하거나 사랑하며 살아가는게 당연한 미덕이니까.
게다가 벽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5원이라 적어놓은게 좀 촌스러워 보였다.
또 자세히 보니까 판자로 지은 것 같은데 한 채에 방만 면벽해서 두 칸 되게 해 놓은 것이었다. 우리일행은 한춘선생과 전영매기자와 함께 이곳 모래섬에서 해가 질 때까지 거닐다가 하얼삔 시가지로 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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