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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목단강시의 풍경(2)

아미산월 2008. 8. 10. 23:46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4. 목단강시의 풍경(2)

 

24. 목단강시의 풍경(2)


 

◇북한호텔의 풍경

 

그곳에도 한낮의 날씨는 무더웠다. 여장을 푼 건 목단강시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나온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김성우 시인이 안내한 북한호텔이었다. 목단강시에 오는 한국인은 모두 이호텔에서 투숙한다고 김성우 시인은 일러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북한호텔이란 북한당국에서 경영하는 빈관으로 빈관내에는 북한의 직원들이 와서 근무하는 것이었다. 이역시 중국 만주땅에 와서 처음 알았다.

그렇게 그립고 가 보고 싶어도 못 가고있는 동족의 땅 북한을 휴전선 하나로 두고 우리가 살아온지 50여년….

이곳에 와서 그들을 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처음에는 매우 가슴이 설레었다.

이는 화룡의 중조식당에서도 가슴에 일제히 김일성 뱃지를 달고 근무하는 북한처녀를 보아왔지만, 이곳 빈관도 북한처녀들이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이 호텔 앞에 대형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형 조선족장구치는 여인상이 흰석고상같이 세워져 있는 모습에서였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정서라는것, 이런 걸 잊으면 민족정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이것이 만주땅에 있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부모밑에서 살면 부모의 은공을 잊어버리기 쉽고, 부모와 떨어져 있으면 부모에 대한 은혜뿐만 아니라 그 품속이 그립듯 그런 이치인지 모르겠으나, 조국이 아닌 남의 주권 밑에 사는 중국만주땅 조선족이 사는 곳에는 이렇게 한민족의 표상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었으니 이것만 해도 나의 만주기행에서는 가서 보지 않으면 눈으로 확인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누가 소개해 주거나 가르쳐주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게 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국을 품안에 가지고 모국어로 따뜻하게 살고있는 한국의 실정을 보라.

어딜가나 우리의 민족정신의 향기가 풍기는데 잘 있는가. 높다란 빌딩이나 공원 잔디밭 앞에는 설치미술이라 해서 현대식 조각상들로만 널려있지, 소박하고 민속적인 건 낡은 구 시대적 방식인 양 아예 등한시해 버린다.

게다가 큰 자연석이나 높이 세운 탑 모양도 보면 그 아까운 돌에 「자연을 보호하자」니 「충효사상」이니 이런 글씨를 크게 새겨버려 오히려 역겨울 정도다.

이런건 현수막 걸듯이 자꾸 표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강요하다시피 한다.

위령탑이나 산업훈장탑 같은 것이나 자꾸 세우지 한국을 상징하는 토종의 것들은 잘 없질 않은가.

나는 만주땅에서 많은 걸 보고 배웠다. 아직 일정이 더 남아있지만 만주땅에 사는 조선족들의 생활양식이나 민족정서 뿐만이 아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문화적 가치를 들어서가 아니라 느껴서 알았는 것이 많은데, 그들은 절대 외국문화를 이식시키지 않으며 고대의 전통양식이나 복고풍을 그대로 지현하는 미의식이 많이 확인 되었다.

공원이나 시청사 시가지 네거리 등 어디가나 옛것을 잃지 않으면서 예서것의 풍토를 잘 조성하여 관광객들을 맞이하거나 그들 나름대로 향수를 즐기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미의식이나 양식을 어디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공원에가도 없고 시가지 네거리에도 보이지 않고 절간이나 박물관에 가도 모든건 숨겨져 있고 겉은 우리의 문화양식이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채색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직 만주땅은 한국으로 말할것 같으면 1960년대를 못 벗어난 덜 문명되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만 그런 우리의 것을 잃어버리고 가는 우리와 아직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그들과의 차이는 극심할 뿐만아니라 굉장하다는 차이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족학교의 풍경

 

김성우 시인과 함께 찾아간 곳은 그곳 조선족학교였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가는데 넓은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아닌 어른들이 수십명씩 무리를 지어 무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하는가 보았더니 며칠 있으면 조선족운동회가 열린다고한다.

1년에 한차례씩 중국 56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목단강지역 조선족들끼리 친목과 화합을 위한 잔치일환으로 벌어지는 행사라니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이 역시 나리잃은 민족들 저희들끼리 마음으로나마 단합하자는 이 장한 정신이 이곳에서 확인된 셈이다.

운동장에는 장년의 남여 조선족들이 북과 장구, 부채를 들고 춤을 추고 달리기 연습도 하고 일어섰다 앉았다 뒤로 돌며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한국의 실정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연습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이곳에서는 어른들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순민족적인 고유 민속놀이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축구, 그네뛰기, 배구, 씨름, 윷놀이, 농악, 가무, 장기뜨기 등으로 벌어진다고한다.

그 위의 하늘에는 국기 계양대 끝에 매달아 놓은 중국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으니 분명 이곳은 우리땅이 아닌 중국땅의 풍경이었다.

시간만 더 있더라면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물러 그들의 춤사위 및 운동회 모습을 보고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었다.

 

◇역사대하소설가를 만나다

 

이곳 운동장에서 다시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잠시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가 열어주는 저녁 만찬 가기전, 같은 출판사에 근무하는 문인들이 이곳에서 그 행사 연습을 하고 있기에 김성우 시인이 함께 만나서 가기로 되어있어 이곳에서 만나게된 것이다.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 임승환씨였다.

키가 크고 건장해 보이는 1950년 경박호 출생으로 1958년부터 지금까지 발해왕궁이 있는 룡천부마을에서 성장했다 한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지도, 즉 좌표도 없이 무작정 만주대장정길에 오르다 보니 궁금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만주땅을 밟게 되었으나 해모수와 유화부인, 주몽과 예랑, 유리왕과 치희 이런 고대인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게 나의 크나큰 사명이기도 하였으니까 말인데 소설가 임승환씨를 만남과 동시에 하나의 수수께끼는 풀리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인물이 주몽이 남하한 흔적을 캐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말쯤 자신의 역작인 역사 대하소설 「동명성왕」이 발간된다고 한다. 거기에 자세한 동명성왕 즉 주몽의 행적이 나온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속이 시원했다. 이곳에 와서 이곳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어느 누구에게 묻겠는가.

그는「발해전」과 함께 「고구려전」80부작을 집필계획으로 계속해서 「광개토대왕」,「장수왕」, 「태조대왕」 등 역사인물을 다룬 대하소설을 펴낸다고 하니 더욱 힘이 되었다.

즉, 주몽은 「어마(어매)」「어머니」의 뜻을 지닌 엄강(지금의 송화강)과 눈강이 합치는 곳인 월광포(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를 건너 무순시 남쪽(지금의 심양옆)으로 남하하였다고 한다.

내게는 굉장히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을 가보고 싶은 것이다.

주몽의 역사를 따라 언젠가 나도 남하해 홀승골성(지금의 오녀산성)정상까지 도착하고 싶은 것이 나의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생각하니까.

어쨋든, 임승환씨를 알게되어 나는 속이 시원했다.

그후 주몽은 길림 남쪽 500리쯤 되는(길림에서는 300리 거리에 있는) 휘남 근처에서 1, 2년 머물다가 드디어 비류수(지금의 혼강)가 흐르는 환인으로 계속 남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 기원전 57년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이 실제라는것, 또 한 가지는 고조선과 부여 사이에 고리부나라의 추장의 딸 유화가 주몽의 어머니로 유화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의 말대로 교과서적인 것과 실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발해수도의 경우, 처음 도읍을 세울때 경박호에서 꿈에 용이 날아올라 백양나무 밑으로 내려앉기에 그 백양나무 밑을 파 보니 맑은 샘물이 솟아나서 그래서 왕궁을 세웠다고 한다.

그 우물을 용우물이라 부르는데, 이는 고주몽 후손들에게 성장하는데 20여년간 들어왔던 이야기라 한다.

고주몽의 79대이며 장수왕의 56대 후손 고지겸 즉 고영도사가 배씨(발해왕 성씨)족보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은 두만강의 도시인 도문에서 이곳 목단강 시로 북상해 오면서 목단강시에 거의 다와갈 무렵 동경성을 지나왔는데, 그곳 동경성이 발해의 옛 도읍지인 것을 들어서 알았다.

발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서 말해준다고 할까, 길가의 큰 입간판에 발해라는 한자표기의 글씨가 눈에 크게 띄었으며 차창밖으로 비치는 건축 구조물의 양식도 예사롭지 안았었다.

아쉽게도 그냥 지나쳐 와 버린 것이다.

경박호도 들어서 안 일이지만 스위스의 제네바 다음으로 이름난 호수라 한다.

또 백두산이 사나이라면 만주땅에서는 경박호가 아가씨에 비유된다고 한다.

경박호 주변에는 발해시대의 유적지도 많으며 60리 정도 들어가면 국가에서 보호하는 원시림이 있는데 호랑이가 두마리 서식하고 있다한다.

경박호와 해림시를 못가본게 내내 안타까운 심정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시장통로를 걸어가면서 임승환씨와 나는 고구려와 발해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우리가 바로 역사의 산 증인처럼 느껴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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