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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두만강아, 우리의 강아

아미산월 2008. 8. 10. 23:43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2. 두만강아, 우리의 강아

 

22. 두만강아, 우리의 강아


 

◇용정의 어둠에 대하여


 

윤동주시인 생가에서 빠져 나왔을 때 금새 어두워졌다. 불타던 노을빛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이런걸 칠흙같은 어둠이라고 하는가 보다.

왠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풀잎위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잠깐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면 그뿐이라는 말인가. 너무나 많은 운명을 지고 요절한 자는 그 뒷모습이 늘 처절하게 보였거늘 김소월이 그랬고 김유정이 그랬고 이상이 그랬고 윤동주도 그러했지 않은가.

왜 그들은 힘겨운 삶을 살다 갔을까. 그것도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청춘이라는 단어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새처럼 하늘로 날아 갔는가. 땅강아지처럼 땅속에 숨었는가. 아니면 풍랑맞은 배처럼 바다속에 가라앉아 버렸는가. 이런 아쉬움과 애석함으로 뒤섞이는 마음이 뇌리를 스치면서 일행은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용정시가지의 밤풍경은 분주했다. 윤동주시인이 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리라 생각하면서,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문명화 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곳도 중소도시답게 밤의 네온사인과 차량들의 행렬은 여전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둠이 내려버려 우물터가 남아있다는 「용정(龍井)」도 보지 못하고 윤동주묘도 찾아가 보지 못하고 식당을 찾아들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이곳 용정까지 굉장히 긴 시간과 먼 거리를 왔음엔 두 말할 나위 없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동을 기점으로 환인 집안 통화 송강하 이도백하 장백 백두산 연길 이렇게 해서 용정까지 왔으니 8일간이 소요되었다. 앞으로 일정이 10일 더 남았지만 긴 여정의 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조선족식당에서의 만찬은 아주 좋았다. 입맛에 맞지 않은 고통도 적잖이 있었으므로 주로 분한식 요리라서 그게 남이 아닌 듯 음식맛을 봐도 알 수 있으니 동족이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연길시가지로 오전에 왔던 길을 다시 가서 연변작가협회 초대소가 그것이다. 이곳 만주땅에 첫발을 딛고 알았던 사실이지만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실정으로 보면 여인숙의 성격이었다. 시설도 여인숙과 다름없는데 단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게 그 특성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특히 외부 손님이 오면 안내하는 숙소로 번거롭게 여관이나 호텔을 찾을 필요가 없을 때 편하게 찾는 부대시설 같은 것이었다.연변작가협회 초대소에서 3일밤을 묶게 되었다. 용정에서 돌아오니까 밤12시 가까이 되었다. 내일 새벽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왔던 여정보다 남았는 여정이 더 많기에 조금도 지체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 연길역에서 도문으로 가는 열차시각이 7시18분이니까 서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도문행


 

새벽 6시에 일제히 기상하여 짐보따리를 둘러매고 연길역으로 나갔다. 달무리를 돌리는 조선족여인상이 크게 눈에 띄는 연길역은 한국의 여느 역과 다름없는 풍경들이라서 더욱 친근감이 더했다. 왜냐하면, 「경동보일러」라는 간판도 눈에 띄었을 뿐만아니라 대합실에도 왼통 한국어로 된 안내판 선전문구 등이 즐비해 있었으며 한국물품도 어느 곳보다 풍성하여 이국적 정취가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마음도 푸근했다.

새벽 7시18분발 도문행 열차에 오르니 한결 산뜻한 기분이었다. 다른 곳보다 열차안도 붐비지 않았으니 차창밖 풍경마저도 그렇게 환하고 싱싱할 수 없었다. 석화시인은 만주대장정이라는 먼 여행길에 오는 우리 일행을 연길역에서 그냥 빠이빠이 할 수 없었는지 함께 열차를 타고 도문까지 따라가 주고 있었다.

도문은 어디인가. 바로 두만강을 끼고 있는 중국측 도시로 조선족들에게나 한국인들에게는 굉장히 친근감이 드는 도시다. 압록강과 함께 두만강이라는 민족정서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역시 처음 가 본 두만강이었다. 말로만 듣고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 . . 」하고 우리가 얼마나 불러 댔던가.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아 더욱 안타까운 지금까지 50년 넘게 불러온 우리 민족의 한서린 노래에 나오는 그 두만강인 것이다.


 

◇두만강에 와서


 

도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두만강은 흐르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이곳도 공원을 조성하여 이름 그대로 「두만강 공원」이었다. 노점도 즐비해 있었으며 사진 찍어주는 사진사도 보였고 전망대 산책로도 만들어 놓았다. 두만강에 멱 감고 나온 아이들인지 발가벗은 아이 셋이 손동작을 보여주며 천진하게 움직이는 흰 빛깔의 조각상도 눈에 띄었다.

「두만강 여울소리」라는 시탐구회 기념비도 하나 있었는데 연변작가협회 도문시문련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해마다 이곳에 와서 문학행사를 연다고 한다. 물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련의 행사로 「두만강 여울소리 시인상」을 제정해 시상하는 연변조선족 문인들의 문학에의 열망을 짚어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얼른 두만강에 손을 담그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왔는 줄 알고 강물은 내 가까이에서 출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줄게 아닌가 말이다. 반갑고 가슴 뭉클했다. 그러나 들어온 바대로 물은 깨끗하지 못했다. 오염될대로 되었다는 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정물 그대로였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어쩌겠나. 우리 한국에도 강이라는 강은 이처럼 병들어 가는 것을 어디에 할 말 있겠는가. 이 강물은 흘러흘러 동해로 간다만 가서 동해와 만나 하나가 되지만 말이다.

나의 경우, 두만강에 오기전에 이미 「두만강 푸른 물은」(동아일보 1991년 2월13일자 <동아일보 시단>게재)과 「두만강 돌멩이」(<문학사상> 1993년 1월호)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 두만강임에는 틀림 없었다.


 

비늘처럼 눈은 떨어지고 있었다

저문 하늘에

한 마리 물총새가 물고 간 푸른 하늘 은하수

보이지 않는 사십 여섯해의 겨울이야기

지금 내가 묵시록처럼 바라보는 강은

서랍을 빠져나간 바람 아니면

붉은 꽃잎으로 드러누운 피밭이라


두만강 푸른 물은 어디로

흘러만 가는 것일까

우린 그랬지 빼앗긴 정조를 찾아야 한다고

돌자갈 위로 말은 달렸지

그러나 동강난 산허리 이어줄 산새들 합창 들리지 않는 숲에서

밤은 저을며 걸어오고

푸른 동해의 싱싱한 깃발은 멀 뿐


꿈속에서도 흰 이빨처럼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 「두만강 푸른 물은」전문

이처럼 두만강은 민족의 강이엇던 것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가지 못했던 강, 아직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암담한 심정으로 읊어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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