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송화강 강가에서.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1. 송화강 강가에서.
21. 송화강 강가에서.
알고 보면 눈이 와서 나뭇가지마다 흰 눈꽃이 핀 게 아니라 길림 땅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비경인 운무꽃인 것이다. 우리 일행은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겨울 송화강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출근하는 차량들로 가득한 송화강변 대로에는 분주한 인파들로 붐볐는데 여느 도시와 다름없었다. 송화강의 강변도로를 끼고 걸었는데 추운 고장인 만큼 눈이 내려 그대로 쌓여있어 이곳 역시 설국 다름 아니었다. 수양버들 같이 늘어진 나뭇가지마다 수증기가 얼어붙어 흰 눈꽃을 연상시키는 풍광은 긴 여성의 머리칼마다 차고 흰 얼음 덩어리가 붙어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러한데 멀리서 나무전체를 보면 완전히 흰 눈꽃으로 덮였다기보다 봄날 벚꽃이 만개한 것 같은 환상적인 표현이 더욱 걸맞을 것 같다. 아침이라 산책 나온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도라지잡지사의 김홍란씨와 함께 강가로 내려갔을 때 쌓인 눈은 신발이 잠기도록 푹푹 빠졌으며 거기서 강 상류와 하류 전체를 보는 풍광은 절대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세상에서 자연이 빚어낸 이런 겨울 경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아침해가 떠서 햇살이 송화강을 흘러가는 물살 위를 비추고 있었는데 새 천년의 새로 열리는 아침의 서기(瑞氣)같았다. 주몽이 어릴 적 이 강상을 누비며 말을 달렸을 것이며, 주몽의 말이 이 송화강 물을 먹었지 않았겠나 생각해 보았다. 또, 겨울이라도 얼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강 물결 위로는 아침 안개가 자욱한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두 마리 물새가 한참을 강상 위에 떠서 서로 정다운 시늉을 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풍광을 두고 한 편의 시를 읊지 않을 수 없었고 보면 말이다. 이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국의 금와왕의 감시아래 유화부인은 아들 주몽과 함께 유배생활 다름 아닌 삶을 살았지 않은가. 주몽의 활솜씨나 말타기솜씨가 대소왕자들을 능가하자 더욱 위험이 눈앞에 닥친 주몽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떠나보내기 싫은 자식이었지만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주몽에게는 사귀어온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예랑이라는 처녀였다. 예희라고도 하는데 주몽은 이곳을 탈출하기 전 가섬벌에 살고있는 예랑을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결심하고 예랑을 만나러 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해 주몽은 이미 사냥해 잡은 새 몇 마리를 말의 안장 뒤에 달고 가섬벌로 예랑을 만나러 가 가섬벌 강가에서 달 뜰 무렵을 기약해 예랑을 만난 것이다.
둘은 밤새도록 노를 저으며 마지막 랑데부를 즐겼는데 그때의 일화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즉, 그날 밤 예랑과 정을 통한 주몽은 아들을 낳으면 ‘유리명’이라 부르라고 말해주며 칼을 빼어들어 두 동강을 내어서 한쪽을 예랑에게 건네며, 이걸 저 산중턱 팔각정 기둥아래 숨겨놓았다가 부러뜨린 칼 한쪽을 갖고 오는 자를 나의 아들로 증명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날이 새자 주몽은 이 가섬벌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 유화부인의 엄명대로 그날부터 주몽은 탈출을 시도해 남하한 것이다. 주몽이 남하하여 지금의 환인 땅에서 고구려를 세웠을 때, 어머니 예랑의 말대로 부러진 칼 한쪽을 가지고 찾아온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중에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명왕인 것이다. 이런 유래는 고구려의 탄생설화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천년 역사의 우리 민족의 유래인 것이다. 나는 늘 이런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나의 기운으로 여기며 품고 다니는 것이다. 오랜 옛날의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이기에 오늘의 현실에서도 더욱 태고연한 세계로 몰입됨을 또한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길림 땅 송화강에 와 발걸음을 멈춰보니 이처럼 태고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리고 강가만 조금 얼어붙어 있을 뿐 강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기만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김홍란씨는 내게 “저 흐르는 물소리 들어봐요”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아주 경쾌한 아침의 음악 같았다. 조금도 느리거나 슬프거나 가라앉은 음이 아니라 경쾌한 음악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으니 흐르는 물살에 손도 담가보았다. 아주 차가운 기운이었으나 맑고 깨끗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강물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아니겠는가. 강물은 어디론가 자꾸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 같지만 함께 갈 수 없는 게 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니 말이다. 날씨는 매우 쌀쌀하고 추웠지만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리 민족의 3대 강이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이 아닌가. 게다가 송화강은 세 강 중에서도 가장 긴 강으로 만주 땅 전역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르는 강으로 오천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강이 아니던가. 바로 나는 그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길림의 겨울 송화강에 아침 일찍 나와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계속
내가 수억만리 한국땅에서 북으로 북으로 방향을 돌려 찾아온 길림 땅의 겨울 송화강 아침, 금가락지빛 같이 칭칭 감기는 아침 햇살은 새 천년이 새로 열리는 것 같았으며 흐르는 송화강 물살은 예나 다름없이 그 소리 정겹게 들렸으며 저기 저 강상 위의 두 마리 검은 날개의 물새 한 쌍 신나는 듯 운무 속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아아, 나는 저 한 쌍의 새를 주몽과 예랑의 새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주몽과 짝하여 예랑은 많은 눈물의 세월 보냈거니, 오늘의 그 예랑과 주몽이 이천년 후에는 한 쌍의 새가 되어 보기좋게 송화강 강상 위를 어깨춤추며 날고 있는 것을!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 다시 만나 이천년 전의 사랑을, 춥지도 않은 영혼으로 나타나 나를 아시기나 하는 듯 짝짝쿵, 짝짝쿵, …하며 시야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서지월 시 ‘겨울 송화강에서’전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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