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용정의 하늘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0. 용정의 하늘
20. 용정의 하늘
◇발해의 왕궁터 「서고성」을 지나며
1886년부터 조선민족이 두만강을 건너서 이곳 화룡 및 용정에 가장 먼저 정착했다고 한다. 특히 입쌀이 조선민족에 의해 보급되었으며 「화룡미」라 해서 생태환경미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화룡과 용정일대의 넓은 들판이 말해주듯 산간의 옥수수밭과 함께 살기좋은 비옥한 땅으로 우리 선대들은 이곳에 이주해 와서 살았던 것이다. 저 유명한 청산리와 서일장군묘 발해왕궁터, 해란강 남쪽 평강벌의 정혜공주묘 등 둘러볼데가 많았으나 일정상 지나칠 수 밖에 없어 안타까움이 많았다. 정혜공주의 경우 이쁘고 총명했다고 한다. 아들 딸을 두었으나 30대 초반에 죽었는데 이 역시 안타까운 운명이었나 보다. 발해중기의 일로 그 흔적의 하나로 남아있다 하니 그냥 지나가기는 발걸음이 쉬 떼이질 않았다. 오후 2, 3시. 이 모든 미련을 뒤로 한 채 용정시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것은 화룡시 서정진의 발해의 「서고성」이었다. 그 성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비를 세워놓아서 그나마 옛자취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지금 이 시각 우리 일행이 가야할 곳은 윤동주시비가 세워져 있는 「용정중학교」와 「우물터」 「윤동주 생가」 「윤동주 묘」 그리고 「일송정」 등이다. 하루해의 길이는 한정되어 있는 만큼 바삐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용정중학교에 들러
화룡을 빠져나와 용정시가지에 도착해서 용정중학교를 찾았다. 용정중학교는 민족저항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그의 모교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윤동주가 문학의 꿈을 키운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대성중학」으로 1921년에 건립,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었으나 다시 옛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으며 2층에는 윤동주기념관과 윤동주가 편집해 만들었던 「별」 잡지사(윤동주문학사상연구회)가 옛 정취를 살려주는 듯했다. 한참을 둘러보고 나온 운동장에서는 운동회날인지 중학생들이 반별로 모여 앉아서 응원하고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도 나와 학교정원을 꽉 메우고 있었다. 또한 담밑의 꽃밭에는 국화의 짙은 꽃빛깔이 더욱 그 강한 빛깔을 토해내고 있었으며 윤동주시비는 이 학교를 지켜온 꿋꿋한 정신으로 다가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에서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 「서시」 전문이 새겨져 있는 시비 앞에는 사루비아꽃이 불타고 있었다.
◇「강경애문학비」 옆에서
용정중학 교정에서 만난 조선족시인은 이문선씨였다. 용정시문학예술계연합회 상무부주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북경의 중앙민속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했으며 연변조선족작가협회 시분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다. 연길의 석화시인과 이곳 용정의 이문선 시인 그리고 우리 일행 6명이 오른 곳은 「일송정」이었다. 두대의 택시를 잡아 나누어 타고 가야하기에 용정중학 정문을 나오니까 이곳도 차량이 많이 붐벼서인지 길에는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인정적인 것은 아직도 만주땅 어디를 가나 목격할 수 있는 나귀가 끄는 수레였다. 차량들이 다니는 시가지에서도 넌지시 보행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란 더욱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그 무엇과 다를바가 없었다. 택시가 큰 길을 빠져나와 산길을 접어 들었을 때 비암산 정상에는 「일송정」 정자가 치솟아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포장의 산길을 돌아갈 즈음 먼저 나타난 것은 「여성작가강경애문학비」였다. 이 역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주변의 흙들과 잔디가 완전히 다져져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꽃다발들도 많이 널려 있었다. 가신이는 말없어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여기에 꽃을 받히는구나 생각하니 다시한번 인생에 대한 오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설가 강경애씨는 1906년 황해도 출생으로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나와 1925년 이곳 용정에 이주해 와 1년반 정도 교원으로 지냈으며 용정의 문학단체인 「북향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살아오다가 3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던 신여성이었다.
◇「일송정」에 오르다
이날따라 초가을 날씨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이 쯤에서부터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풀벌레소리와 함께 하늘을 찌르는 풀잎들의 기상과 선연한 빛깔의 들꽃들이 남의 땅이 아닌 우리 땅에서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일송정」이라고 새겨놓은 비석과 「선구자 노래비」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중턱 정상에 올랐을 때 펼쳐놓은 파란하늘과 함께 한점 티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선구자노래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일송정」으로 향해 걸어갔을 때 드디어 나타난 것은 해란강이었다. 이 풍광을 어디에 비유하며 무엇으로 표현할까. 과연 용정의 들판은 넓었으며 용정과 연길시가지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 「일송정」을 향해 걸어가는 왼쪽은 화룡이요, 오른쪽은 용정과 연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 중간 우뚝 솟은 비암산 중턱에 「일송정」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송정」에 올랐을 때 한국에서 내가 왔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그동안 참았던 몸짓을 일으키며 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게 우리 민족의 말발굽과 더운 피의 기운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처음 와본 「일송정」, 「일송정」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거대한 용의 꿈틀거림으로 흐르는 「해란강」을 좀 보게나 길에 누워서 지금 연길에서 용정을 지나 화룡쪽으로 벌판 한가운데인 심장을 흐르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처음 와 본 「일송정」이지만 「해란강은 흐른다」, 「해란강아 네가 부르면」, 「일송정 푸른 솔」 같은 시를 이미 써서 남겨놓은 상태이니 직접 와서 보니 이 감개무량은 터질듯한 내 가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하루라도 진작 왔어야 할 걸, 이제사 와서 탄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구자」노래의 사연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시인 윤해영의 노래말로 알려진 이 「선구자」는 원래는 「용정의 노래」였다는 것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용정 출신으로 나라잃은 슬픔에 망연자실하던 중에 심기일전의 자세로 나날이 꺼져가는 동포들의 저항심을 회생시켜 보려고 이 가사를 썼다한다. 사연인즉 이렇다. 어느해 겨울 작곡자인 조두남선생에게 몹시 병약해보이는 젊은 윤해영이 찾아와서 자신이 쓴 「용정의 노래」 가사에 곡을 붙여주기를 부탁해 놓고 갔는데 그후 그청년은 여러해가 지나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조두남선생은 끝내 그 청년(윤해영)을 보지 못하고 만주땅을 떠나게 된 것. 남한에 정착하게 된 선생은 행여나 하고 그 청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종무소식이어서 뒤늦게나마 원작제목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고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용정을 무대로 한 이 노래 속에는 황금보다도 값지고 귀한 민족정기와 정신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서 오늘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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