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이도백하에서 일박ㅡ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16.이도백하에서 일박ㅡ
16. 길림을 떠나며
◇볼만한 거리의 ‘양걸무’ 여름날 저녁 해지는 송화강을 빠져 나오며 아쉬운 마음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또 머나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 얹혀서 흘러가고 있는 흑룡강 7천리를 가야하니 그 여정은 더욱 길고 멀다. 고신일선생께서는 다음에 오면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라고 권하신다. 송화강에서 나는 물고기 맛이 일품이니 저 강 따라 거슬러 가면 식당들이 즐비해 있고, 또 길림땅은 북한의 김일성이 청소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김일성이 다니던 고등학교가 이곳에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강가에서 보낸 우리일행들은 큰길로 나왔다. 다시 두 대의 택시를 잡아 짐을 풀었던 ‘이화원 식당’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만주땅에서 더러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많은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고 거리의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다를까, 양걸무를 춤추는 시민들이었다. 아마 내가 만주땅에서 보아왔던 양걸무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의상이라 할까. 그리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거리의 악사들의 연주속에 빙빙 돌며 부채춤을 추는 것이었다. 60대가 넘어 보이는 노인이 연주하는 나팔소리와 50대 장년남자가 장단맞추는 리듬악기와 그리고 심벌즈같이 양손에 철판같 은 악기를 들고 맞부딪혀 울리는 3인조 밴드의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여기에 맞춰 송화강가 대로변에서 30여 명의 사람들이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온 팔과 몸과 다리를 흔들며 아주 율동있는 춤을 추는 것이다. 주로 40-50대가 되어보이는 여성층이 많고 그리고는 장년층 남자들과 노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으며, 어린아이들까지 가세하여 흥겨운 춤의 한마당이었다. 무대가 따로 없는 수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변에서 말이다. 그들의 의상은 중국 궁중 전통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비끼며 휘장을 두르고 있었으며 머리 위에도 현란한 꽃들로 장식하거나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여인들마다 달랐다. 춤을 리드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꼭 왕비와 같이 더욱 눈에 띄는 의상과 화관이 눈부셨다. 이 양걸무라는 거리의 춤은 중국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시간만 나면 거리로 나와 온몸을 흔들어 대며 줄지어 걸어갔다. 되돌아오며 무리지어 추는 춤인데 운동의 일환으로 펼쳐지는 것이라 한다. 거기다가 손에는 모두 화려한 색깔로 만들어진 부채를 펼쳐들고 일렁이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자유분방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거리의 춤에서도 완벽하게 그들 전통의상을 차려입고서 계속해서 빙빙 도는 것이었다. 참으로 멋진 일품의 장면이었다. 예술의 즐김이라는게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겠는가. 그들의 그러한 자유분방함은 우리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길림에서도 보았네 송화강 강변 저녁 대로변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나팔을 불어대며 악기를 두들기며 일정한 반주에 맞춰 빙빙 돌며 춤을 추는 중국 한족들! 노인 장년 중년여성 한데 어울려 화려한 의상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손에 손에는 공작같은 부채 하나씩 펼쳐들고 온몸 어깨 허리 다리 일렁이며 줄지어 행진하듯 땀이 흥건히 배이도록 그 춤의 화려함은 계속되었네 - 서지월 시 ‘송화강변 양걸무 춤을 보며’ 전문. ◇도문행 밤열차를 타다 모처럼 거리의 ‘양걸무’춤 구경을 지켜보다가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 타고 우리 일행을 짐을 맡긴 ‘이화원 술집’식당으로 들어갔다. 불이 훤히 켜진 식당에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일제히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족 종업원아가씨들도 어디 갔다 왔느냐는 둥 반가이 맞아주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뒷방으로 가 점심때처럼 저녁식사를 했다. 밤 9시18분 길림발 도문행 침대열차를 타야하기에. 시간이 넉넉해 서둘 필요는 없었으나 이렇게 길림에서의 하루가 다가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늘 말해온 것이지만 한국땅에서는 너무나 머나먼 곳이기에 한번 오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쉽지 않기에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한 것이다. 나의 이번 만주기행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첫째가 ‘경박호’를 관람하는 것, 두 번째가 ‘흑룡강 7천리’를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 길림땅에서 나는 ‘경박호’를 가야 한다. 경박호는 어디 있는가. 목단강시 부근에 있다. 그 목단강시는 만주땅 중에서도 동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시간과도 잘 맞질 않아 부득이 우리 일행은 이곳 길림에서 도문으로 하행했다가 도문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다시 상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열차를 타고 가면 아침에 도문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도문에서는 2-3시간 공백이 있으니 잠시 두만강에 들렀다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목단강시로 거스르는 것이 일정으로 잡히게 되었다. 이곳 ‘도라지’문예잡지사의 고신일선생과 김홍란씨는 우리 일행이 이른 아침 도문에 도착하면 마중 나올 분을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도문에는 소설을 쓰는 강호원씨외 시와 수필을 쓰는 김경희씨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보라, 만주땅에도 보면 어딜가나 척박한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도문의 김경희씨의 경우는 ‘도라지’문예잡지에도 수필 등을 발표한 분이라고 김홍란씨는 일러준다. 예나 다름없이 고신일선생과 김홍란씨 그리고 이상학씨가 길림역까지 짐도 들어주고 마중나 와 주었다. 어찌보면 외로운 듯 보이는 ‘도라지’잡지사인데 젊은 문인 이상학씨를 새로 이번 기회에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반가웠다. 밤 9시18분 길림발 도문행 밤 열차 속은 역시 먼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도문역에는 새벽 7시에 도착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만 밤 열차속에 버려져 있다. 우리 일행은 침대칸 일련번호를 찾아가 짐을 정비하고 덜컹거리는 차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풍경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표를 검사하는 승무원아가씨가 점검을 끝내고 지나가고, 우리 일행은 어디에도 말을 불일 데가 없었다. 그때 마침, 우리끼리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고나타난 사람이 우리 일행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열차 승무원은 승무원인데 그냥 승무원이 아닌 공안국 경찰이었다. 물론 우리와 한 핏줄인 조선족이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왔다. 우리는 목단강시를 간다고 했다. 거기가서 ‘경박호’ 구경을 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하얼빈에서는 다시 흑룡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만주대장정 길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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