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도백하 가는 길
◇김목수를 만나다.
아침 7시30분, 황영성씨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연길행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빠져나 왔을 때 그늘을 벗어나 햇빛나는 양지로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이곳 만주땅이라는 곳은 어딜가나 범죄가 많아서 이국인들에게는 늘 음산하기 짝이 없는 혐오감을 주는 곳도 더러 있었다.
중국인과 조선족 북한사람 등 늘 섞이고 섞이는 현장이기도 한 곳들이어서 가는 곳마 다 조심하라고 일러주기도 했던 것이다. 송강하가 그러한 곳이며 통화역 부근이 그러한 곳 이라고 말해주어 알아차렸던 것이고 보면, 장백 역시 황영성씨가 일러주는 말에 의하면 숙 소에 들면 밤에는 절대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는 당부가 그것이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 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장백뻐스분소'는 매표소와 겸하고 있는 상점이었다. 우리의 60년대와 흡사한 풍경들이었다. 헤어짐이 아쉬운 듯 아침밥도 거르고 나온 우리 일행에게 빵과 과자 과일을 안겨주고 차창 을 사이에 두고 서로 흔들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비포장도로의 덜커덩거리는 버스 속에서 멈춤도 잠시 또다시 어디론가 흘러가는 인생이었으 며 흘러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난 듯 우리들도 덜커덩거렸다.
버스 안에는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일찌기 볼 일 보러 장거리 시외버스에 몸을 실은 그 들은 분명히 이곳 장백 사람들이었으며, 중국인이 아닌 조선족들이었다. 그러나 문화가 다르 고 토양이 다른 생활의 이 켠과 저 켠을 보듯 낯설게 느껴지는 버스 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중년 남자 한 사람들이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바로 그 중년 사내와 눈이 부 딪혔고 그 사내는 자기가 앉아있는 몇 칸 앞좌석에서 필자가 앉아있는 뒷좌석 통로의 맞은 편에 앉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통성명이 오갔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는 나이가 같았다. 그러니까 1955년 양띠생 이어서 더욱 반가워 다시한번 악수를 하고 박장대소를 했 다. 동행한 친구 박월리씨도 같은 갑장(甲長)이어서 셋이서 곧 친구가 돼 버렸다.
그 중년사내는 둘러매는 허름한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는데 수첩속에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꺼내 펼쳐들며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로 그 종이가 신분증이었으며, 중국에서는 이 신분증으 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한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등록증과 일치하는 그런 신분증이었다. 1955년 양띠생으로 이름은 김성봉이었다. 서로 통성명을 하기전 그가 먼 저 내밀어 보인게 '동의보감'이었는데 선친으로부터 물려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더욱 자랑할게 있다는 듯이 다시 가방을 열어 보여주는게 있었다.
이번에는 보니 침술상자였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부스스한 얼굴을 보고서 '장이 안 좋다' 했듯이, 나는 담배를 많이 피워서 머리가 곧잘 아프다고 했더니 내 손가락 끝에다가 아주 가는 침을 두 대 놓아 주기도 했었는데 그게 모두 '동의보감'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는 내 손을 펼쳐보이더니 왈, '대낄(大吉)이야, 대낄(大吉)!'하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또 60세에 조심할 것이며 복이 많다고 했다. 듣던 중에 좋은 소리 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또 그러고는 내 여행용 메모수첩에다가 구기자, 계피, 부자 . . . .등 열 가지 약재이 름을 한자로 써 주며 지어먹으라고 한다. 물론 나는 병자는 아니다. 늘 세파에 시달리고 글 을 쓰느라 밤낮이 거꾸로 되다보니 피로가 자주 쌓이고 해서 부스스하게 보인 모양이다.
어쨌든 재미가 있는 사람을 만났음엔 분명하고, 이런 관상이나 손금을 아주 즐겨하는 나로 서는 이런 친구가 좋았다.
지금 우리가 타고 가고 있는 이 덜커덩거리는 시외버스는 다음다음의 우리의 목적지인 연길 행 시외버스인데 물어보니 무려 10시간 넘게 걸리는 장거리 버스였다. 우리들에게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장거리였다. 즉 장백에서 연길로 향하는 버스로 오전 7시30분에 출발했 으니 연길에 도착하려면 저녁 8~9시가 된다고 한다.
물론 완행이니까 곳곳의 서민들의 생활을 대변하는 시외버스였다.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기 를 쉬임없이 거듭하는 완행버스였으나,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 중년 사내와 갑동으로서 의 담소는 전혀 부담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제는 친밀감이 느껴질 정도의 사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동의보감'과는 달리 그가 하고 있는 업은 목수라 한다. 문짝 만들고 집짓는 목수 라 한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맑았던 하늘에 우기가 섞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골지방의 기 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림을 끼고 삼림 속으로 다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정처없는 유랑길 같은 신세였다. 아직 산수좋은 천혜의 삼림지대라 녹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봇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으며 백양나무 솟나무 등이 즐비해 있어서 인 상적이었다.
나무 흙집이 그대로 산골사람들의 생활양식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조그만 소읍을 만날 때마다 '견육점'이라는 개고기집(보신탕집) 간판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게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만주땅 어딜가나 즐비한 견육점임엔 분명했다.
특히,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장거리 버스이니까 그렇지만 운전수와 안내원 두 사람 다 청 년인데 둘이서 교대해 가면서 운전하는 것이 또 이색적으로 보여졌다고 할까. 하여튼 우리 의 과거 시대를 아직 그들은 고스란히 행하고 있어 정겹게 받아들이는 입장이 돼 버렸다.
오후 2시30분이면 '이도백하'에 도착하는데 이제 또 비는 멈추었고 산색(山色)은 다시 환하 게 빛나 보이는 것이었다.
그후, '이도백하 가는 길'이라는 다음의 시가 씌어졌다.
'長白에서 나와 貳道白河 가는 길 흔들리는 비포장 버스 속에서 동의보감 읽는 한 중년사내 만났네
언뜻 보기엔 옆모습이 詩仙 李白과 닮아보이는 때절은 그 중년사내 내곁을 다가왔네 이것 한번 읽어보시우! 그 사내가 내민 건 바로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허준의 '동의보감' 그것이었네
나이가 한 오십도 훨씬 넘어보이는 그 사내 신분증 내밀어 보이기에 종이로 접은 신분증 보아하니 나하고는 甲同이라 또 한바탕 박장대소하고 무얼 하시우, 하고 물으니 목수라고 한다 나무 깎는 목수질하며 먹고 산다는 그 중년사내 허름한 가방 속에서 다시 꺼내는 걸 보아하니 침술까지 터득한 그야말로 이 시대 허준 같았네
얼굴이 부스스한 걸 보니 腸이 안 좋아 처방 내려주지, 구기자 계피 부자 . . . 그러고선 내 손 잡아당겨 가느다란 침 두 대 놓고 손금 보더니 大吉이야 大吉! 하고 외치던 갑동의 그 사내
長白에서 延吉까지 10시간 넘게 걸리는 장거리 시외버스 속에서 貳道白河까지 함께 하다가 유유히 사라진 그 사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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